106.
그녀가 또다시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할 틈도 없었다. 거침없이 치마 속을 파고든 손이 아플 만큼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정원 한복판이었다. 입맞춤이라면 모를까, 그 이상을 진행하기엔 심히 적절치 못한 장소였다.
혼비백산해 그를 밀어내려던 나디아의 손목을 꽉 움켜쥔 에드윈이 못을 박겠다는 듯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원망하고 싶다면 원망해. 당신에게 목매는 나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피를 말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를 떠나겠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어.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니, 무섭고 답답해도 내 옆에서 살아.”
그동안의 달짝지근한 봄바람 같던 태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윽박지르듯 쏟아지는 목소리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원하던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다예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사나운 태도였음에도 더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무섭기는커녕 관계의 우위를 점한 것 같다는 우월감까지 느껴졌다.
항상 여유롭게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던 남자가 초조함을 감추지도 못하고 안달하며 갈구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나디아에게 묘한 충족감을 안겨 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었는데 이제는 웃고 싶어졌다. 그녀는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더 할 말은 없나요?”
에드윈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하더니 입을 벙긋거리다 결국 입 안에 맴돌기만 하던 말을 꺼냈다.
“미안해.”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사과하지 않았을 남자가, 설령 했다 하더라도 본심은 아니었을 것 같은 남자가 한참 어린 아내에게 건네는 사과는 누구도 그 진의를 함부로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절절했다.
한참이나 나디아를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이윽고 기운이 다한 것처럼 몸을 숙였다. 가장 약해진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다는 듯 숙여진 머리는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애달팠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숨결이 기꺼웠다. 에드윈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뒤이은 목소리까지 정답이었다. 나디아는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매만졌다. 그녀의 손톱에 긁힌 상처에서 흐릿하게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상처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
연회는 별다른 사건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나디아는 축하객들이 보내 준 수많은 선물을 풀어 보며 제법 즐겁고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랄 만큼 많은 선물을 일일이 풀어 보는 것도 일이었다. 물론 그녀의 일은 아니었다. 나디아가 발코니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동안 하녀들이 선물과 보낸 사람의 명단을 확인했다.
밀라의 감시가 있음에도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화려한 상자 속에서 새로운 물건이 나올 때마다 하녀들의 탄성이 함께 쏟아졌다.
“마님! 이것 좀 보세요!”
“어쩜 이렇게 부드러울까?”
창가로 환하게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과 은은한 홍차 향 그리고 종달새처럼 재잘대는 목소리들이 어우러지는 오후였다.
그녀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 하녀들이 보여 주는 선물들을 감상했다.
최신 유행을 따른 드레스와 섬세한 장식이 매달린 모자, 구두는 물론이고 반짝이는 보석과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는 목걸이와 팔찌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구하기 어렵다는 귀한 서적과 극락조의 꽁지깃과 금으로 만든 깃펜들, 윤기가 흐를 만큼 부드러운 감촉을 지닌 흑표범 가죽 한 무더기와 낯선 향기의 향유 스무 상자도 있었다.
이국의 귀한 꽃들의 씨앗까지 발견한 나디아는 탄성을 내뱉었다. 동봉된 꽃의 그림은 가슴이 설렐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에 씨앗이 꽃 피울 시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사시사철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라 한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엘란츠 성에는 이미 훌륭한 온실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씨앗들을 하녀에게 내밀며 정원사에게 건네주라 일러두었다.
그 외에도 그녀의 방까지 가져올 수 없었던, 영롱하게 빛나는 새파란 깃털을 가진 이름 모를 관상조와 들여놓는 데에만 일꾼 열 명이 동원된 커다란 사자상 또한 있었다. 후작 부인의 생일 선물이라기보단 엘란츠가에 대한 아부에 가까웠다.
과한 물건도 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물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게 훨씬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그녀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상자였다.
가장 작았지만 그 안에 든 것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고급스러웠다.
묘한 얼굴을 한 하녀가 상자를 나디아의 앞으로 가져왔다.
“마님, 이건 직접 열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부드러운 벨벳의 감촉이 느껴졌다. 크기와 달리 제법 묵직했다. 상자 크기로 보나 무게로 보나, 보석일 것이 분명했다. 나디아는 지체 없이 상자를 열었다.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디아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핑크 다이아몬드가 화려한 빛을 흩뿌렸다.
그녀가 가진 그 어떤 보석도 이 정도로 크고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이 브로치는 에드윈이 보낸 선물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커팅된 면마다 햇빛이 반사되며 수십 가지 빛깔로 산란했다. 그 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나디아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마음에 안 들어?”
정적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 그녀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고개를 번쩍 치켜들자 뻔뻔한 남자가 씩 웃었다.
“언제 왔어요?”
에드윈이 ‘지금.’ 하고 대답하며 주위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나디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리게 걸으며 손끝으로 선물들을 들춰 보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노인네 같으니. 여기가 북부인 줄 아는 건가? 겨울이 지난 지가 언젠데. 흑표범 가죽을 이렇게 많이 보내 봤자 덥기만 하지.”
불만스럽게 흑표범 가죽을 툭툭 건드리던 남자가 화려한 깃털이 길게 늘어지는 모자를 살펴보았다.
“이걸 쓰면 사람인지 공작인지 구분도 안 가겠군.”
그다음은 굽 높은 구두였다.
“다리도 성치 않은 사람한테 이런 구두를? 이걸 보낸 게 누구지? 내가 친히 충고를 해 줘야겠는데.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장식이라기엔 너무 못생겼지만….”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디아가 입을 떡 벌렸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에드윈은 나디아의 앞으로 도착한 선물들을 보며 트집을 잡느라 바빴다.
“이건 좀 쓸 만하군.”
그가 반대편이 훤히 비쳐 보일 만큼 얇은 레이스 속옷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제야 나디아는 품위 없이 벌리고 있던 입을 닫고 정신을 차렸다.
당장 에드윈의 손에서 속옷을 빼앗고 싶었지만 일어나기가 번거로워 그럴 수 없었다.
“뭐 하러 왔어요?”
그는 나디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얼빠진 듯한 얼굴을 슬쩍 보더니 들고 있던 것을 대충 내던지고 빠르게 다가왔다.
나디아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에드윈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상자를 빼앗듯 가져가더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이 다이아몬드가 실은 그의 선물이라 판단한 것이 틀렸던 건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다이아몬드는 완벽했는데….
“역시 이게 가장 아름답군.”
상자를 다시 휙 내민 남자가 과장된 태도로 감탄했다.
“순도는 물론이고 크기도 독보적이지. 커팅 역시 흠잡을 데 없어. 봐, 이렇게 빛이 비치면….”
“에드윈.”
그제야 에드윈은 말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꼭 대답하라는 듯 힘주어 물었다.
“뭐 하러 왔느냐고 물었는데요.”
“…당신이 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보려고 왔지.”
의뭉스럽게 굴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 달리 에드윈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렇게 유치한 남자였나? 색다른 모습이 불러일으킨 감상은 이제 전만큼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절한 고백과 맞물려 즐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더는 그가 무섭지 않은 자신은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그의 색다른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짓궂은 장난기가 솟는 것 역시도. 나디아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럼 지금은?”
“당신에게 내 선물의 특별함을 납득시키려는 중이야.”
그의 대답은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막힘없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특별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왜 그런 얼굴을 했어?”
“그런 얼굴?”
혼잣말을 하듯 되묻자 에드윈이 그녀의 표정을 흉내 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찌푸렸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냥, 눈이 부셨던 것뿐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가 유치하게 다른 선물들을 깎아내리던 모습은 기억 못 하는 사람처럼 담백하게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평소에 하고 다니기엔 과하고 중요한 날에나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의 단정한 손톱 끝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마음에 들어?”
“물론이에요.”
나디아는 솔직하게 긍정했다.
“이런 물건은 경매에나 나올 텐데 늦지 않았나 보네요.”
“그건 아니고,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경매가 끝났더군. 낙찰가의 두 배를 제시했지.”
“두 배라고요?”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 배라니. 본래의 금액을 들은 건 아니었지만 낙찰가도 보통이 아닐 텐데 두 배라면 대체 얼마일지 상상하기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놀란 얼굴이 제법 흡족했는지 에드윈이 목을 울려 웃었다.
“푼돈이지.”
“그러니까….”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디아는 심술이 돋았다.
“내게 선물할 물건을 푼돈으로 샀다?”
웃던 얼굴이 쩡하고 굳었다. 그의 당황이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짜릿해졌다. 그동안 어디에 이런 속내가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달라진 것은 에드윈의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잖아.”
에드윈이 쩔쩔매는 모습이 좋았다. 관계의 역전이라는 게 이런 걸까? 마주하기만 하면 사소한 말에도 쩔쩔매던 사람은 나디아였는데 이젠 반대였다. 그의 약점을 거머쥔 기분이었다. 그 약점이 자신의 기분이라는 사실은 쉬이 믿기지 않았지만.
“장난이었어요.”
나디아는 손을 내저었다. 남자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의 피를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겨우 알량한 충족감으로 만족하기는 서글프니까.
“날씨가 좋은데. 소풍이라도 갈까?”
그녀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자 에드윈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변명했다.
“환심 좀 사 보려고.”
희미한 웃음이 새었다. 나디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에드윈은 본모습을 한껏 억누른 채 노력 중이었다. 혼란이 멎지 않았다고 한들 차갑게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식지 않았고 도리어 달아오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