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04화 (104/115)

104.

그녀는 오늘, 바로 며칠 전에 완성되었던 연한 로즈골드색과 크림색이 우아하게 어우러지는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에드윈의 ‘나디아 살찌우기’가 계속된 탓에 반 치수 크게 맞춘 게 딱 들어맞았다. 코르셋을 조일 필요도 없었다.

드레스는 목 부분이 살짝 파인 데다 상체는 한껏 조이고 엉덩이 쪽은 잔뜩 부풀린 디자인이었다. 팔꿈치에서부터 확 넓어진 소매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거렸다.

하녀 셋이 달라붙어 매무새를 가다듬느라 바빴다. 허전한 목에는 목걸이 대신 손가락 두 마디 넓이의 드레스와 같은 색 실크 리본을 나비 모양으로 묶었다. 등 뒤로 리본이 길게 늘어졌다.

가슴께에 커다란 사파이어 브로치를 달고 손목이 짧은 레이스 장갑 위로 결혼반지를 꼈다. 나디아는 거울 앞에 선 채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장식한 다이아몬드 핀이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렸다.

이렇게 꾸민 모습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몇 달 가까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먼지투성이 옷을 입고 다녔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제 눈으로 보면서도 도피 중의 나디아와 지금의 나디아는 다른 사람인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것도 기나긴 꿈의 일부였을는지도 모르지. 터무니없는 생각은 무심코 짚은 오른쪽 다리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각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꿈일 리가 있나.

“아름다우세요, 마님.”

“수고했어.”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랜 시간 고생한 하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영주님께서 오시면 함께 내려가시면 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요기할 것 좀 가져왔어요.”

막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마침 허기가 지던 차라 냉큼 자리에 앉은 나디아는 햄과 치즈를 사이에 끼운 빵을 한 조각 먹고, 잼을 넣은 쿠키 한 개와 복숭아 설탕 절임 두 조각을 먹은 뒤 민트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간단히 식사를 끝냈다.

“내 지팡이 좀 가져다줄래?”

그녀의 말을 들은 하녀가 냉큼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와 손에 쥐여 주었다.

시간은 1시를 훌쩍 넘겼다. 에드윈이 온다고 했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나디아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성안에서 그녀의 방문을 저렇게 함부로 열어젖힐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뭐야, 왜 서 있어? 힘들 텐데.”

“지금 일어선 거예요.”

성큼성큼 걸어온 에드윈이 나디아의 앞에 멈춰 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리게 훑어 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예쁘네.”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등줄기를 뻣뻣하게 만들었던 긴장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디아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고마워요.”

“좀 춥지 않겠어?”

에드윈의 손끝이 드러난 쇄골 근처를 쓸었다.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리자 그의 손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망토를 가져와.”

성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 입었던 칙칙하고 두꺼운 망토를 떠올린 나디아는 한숨을 내쉴 뻔했지만 하녀들이 가져온 것은 목 부근에 흰 토끼털이 달린 하얀색 망토였다.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직접 망토를 받아 든 에드윈이 그것을 나디아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앞을 여미고 끈을 묶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부드러운 털이 뺨을 간질였다. 배 속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작게 고개를 흔들어도 에드윈은 말없이 그녀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은 하녀가 시간이 다 되어 간다고 말했을 때였다.

나디아는 제 쪽으로 내밀어지는 팔에 손을 얹었다. 속도를 맞춰 주는 남자에게 의지해 연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속 한곳을 차지한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느리게 심호흡을 좀 하다 보면 가라앉곤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짧은 회랑을 지나가자 바람이 휘잉 불었다. 춥지 않겠느냐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람은 따뜻하기만 했다. 하지만 에드윈이 바람을 막아 주려는 것처럼 서 있던 위치를 바꾸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배려였다. 설레야 할 일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불편함에 굳은 표정이 풀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연회장을 채운 수많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할 때에도,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들을 마주하면서도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건성이었다.

가슴을 꽉 조이게 만드는 답답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그녀는 은연중에 이 연회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깨달았다.

연회는 단순히 엘란츠 후작 부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오늘, 율리안이 죽은 뒤 처음으로 승리자가 누구인지와 엘란츠가의 건재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디아는 귀족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고, 제 눈으로 확인한 바 에드윈은 수완이 좋은 남자였으니 치밀하다며 감탄이나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그녀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연회가 진행되었다. 귀족들이 후작 부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끝도 없이 하인들의 손에 날라져 들어왔고 나디아는 애써 웃는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이어 악단이 춤곡의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물러나며 가운데에 공간을 만들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엘란츠 부부가 가장 먼저 춤을 춰야 했다.

나디아는 당황했다. 매 걸음 절뚝이는 다리로 춤을 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드윈, 나….”

“괜찮아.”

그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근처에 서 있던 하인에게 건넨 에드윈이 나디아의 허리를 안고 들어 제 발등 위에 올렸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디아는 서둘러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 음악이 멈췄다가 곡이 바뀌었다.

에드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것처럼 바짝 붙은 채로 나디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과 바쁘게 지나다니는 하인들, 빛이 일렁이며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벨벳 커튼과 커다란 창밖에서부터 내리쬐는 태양빛, 벽을 장식한 명화, 향기를 뿜어내는 화병의 꽃들 그리고 춤을 추기 시작한 두 사람을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들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마주 잡은 에드윈의 손을 꽉 쥐었다.

발이 부르트도록 연습해 아예 몸에 익어 버린 춤을 이제는 제 발로 선 채 출 수도 없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에드윈은 발등 위에 그녀를 올려놓고도 조금도 힘들지 않은 사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몇 분 남짓의 춤이 끝나고 숨을 헐떡이는 건 에드윈이 아닌 나디아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한쪽으로 물러났다. 에드윈이 꽉 끌어안았던 허리를 놓아주기가 무섭게 나디아는 휘청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디 안 좋은가? 얼굴이 창백한데.”

그녀는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답답한 것뿐이니까. 나디아는 목구멍 너머로 울컥울컥 치솟으려 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미련하게 삼키기만 했다. 그녀는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안 좋아서….”

“약을 가져오라고 해야겠군.”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걸을래요.”

소화제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에드윈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가 제게 건네는 다정함을 느끼고 있자면 기쁘면서도 서글펐다. 더는 그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내내 꾹꾹 눌러두기만 했던 게 터져 나오면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느릿하게 연회장을 빠져나가 회랑을 지나쳐 정원으로 향했다. 연회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커다란 음악 소리가 여기까지 흘러나왔다.

산책로에 깔린 디딤돌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장미 덤불에서부터 진향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장미가 피려면 좀 더 있어야 할 텐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정원사들이 바빴겠구나. 나디아는 건조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걸었다. 추운 겨울의 찬바람을 헤치고 걷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하는 그녀로서는 이 계절의 변화가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등 뒤에서 서두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이 한 박자 늦게 그녀를 쫓아 나왔다. 어깨 위로 그가 들고 나온 망토가 내려앉았다.

“혹시 모르니 걸치고 있어.”

그녀는 그가 연회장에 머무는 대신 저를 따라 나온 게 기뻤다.

“손님들은요?”

“취해서 정신없어.”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자 음악 소리는 멀어졌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장미 덤불 사이로 분수대가 드러났다.

“이제 슬슬 말해 주지그래.”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나디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어느샌가 에드윈 또한 멈춰 있음을 깨달았다. 한차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봄이 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미지근한 바람이 품고 있는 꽃향기가 산뜻했다. 나디아는 진득하게 따라붙는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화단 가득히 피어오른 샛노란 수선화와 그 아래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잔디밭을 듬성듬성 채운 연보라색 제비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뭘 말이에요?”

불안하게 들쑥날쑥하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을 테니 그가 이상하다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디아는 모른 체했다. 유치하고 미숙하기 짝이 없을 자신을 타인 앞에서 끄집어내기 싫었다.

“왜 그러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성큼성큼 걸어온 에드윈이 나디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손을 뿌리친다는 게 그만 그의 뺨을 쳐 버렸다. 날카로운 타격음이 들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두 사람은 잠시 넋이 나간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해요.”

나디아는 남자의 붉게 물든 뺨을 보다 허둥거리며 사과했다. 뒤이어 걷잡을 수 없었다는 것처럼 울음이 터진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에드윈은 뺨을 맞은 것보다 그녀가 우는 모습에 더 당황했다.

“하지만 다, 당신은… 사랑한다 하기 전에 먼저 나한테 사과해야 하잖아요….”

그의 옷 앞섶을 꽉 움켜쥔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처 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한테 했던 짓들은 다 잊었어요?”

“나디아.”

실타래가 풀리듯 말을 꺼내 놓을수록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어 갔다. 나디아가 기껏 결심을 굳히고 아실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으니 이젠 에드윈과 그녀 사이에 남은 것들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모른 척 넘어갈 생각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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