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황제의 사절로서 엘하임에 내려왔던 붉은 가시 기사단은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퀘른으로 출발했다. 방을 거의 벗어나질 않는 나디아가 앞으로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손님은 떠났는데도 성이 묘하게 어수선했다. 방과 온실만 오가는 나디아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일꾼들은 분주했다.
때때로 발코니에 서 있자면 성안으로 짐을 가득 실은 채 들어오는 마차 따위가 보이곤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아무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으니 궁금증은 커지기만 했다.
“얘.”
나디아는 화병에 새로운 꽃을 꽂던 하녀를 손짓하며 불렀다.
“예? 마님, 부르셨어요?”
“무슨 일이니? 왜 이렇게 어수선해?”
그녀의 물음에도 하녀는 곤란한 낯을 하는가 싶더니 모른 척 배시시 웃으며 의뭉을 떨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제게 말하지 말라는 당부라도 했는지. 의문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답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다그쳐 답을 얻어 내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곧 알게 되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 그녀의 관심을 돌릴 만한 일이 생겼다. 봄을 맞이하여 에드윈이 부른 재단사가 성을 방문한 것이었다.
노련한 재단사가 바쁘게 움직이며 나디아의 치수를 쟀다. 나디아는 하녀들이 조잘거리며 이것이 더 어울린다느니, 저것이 더 어울린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천을 고르고, 유행하는 디자인이라며 보여 주는 책자의 그림 중 맘에 드는 디자인을 살폈다. 그러고 나면 순식간에 반나절이 지나갔다.
봄옷을 맞추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필요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동안 살이 너무 많이 빠진 탓에 막 깨어났던 그녀는 보기 흉할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수도에서 가져왔던 봄 드레스들은 치수가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맞추는 건 귀부인들의 취미 생활의 일환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주 있는 일이었다.
가문의 재력을 과시하려는 의도 역시 있었다. 엘란츠 가는 부유했고 나디아가 드레스를 수십, 수백 벌 맞추든 재정이 휘청이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굳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터 에드윈은 그녀를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속셈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이것저것 먹이려 들었다.
매일 식사를 함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가 손에서 식기를 내려놓을라치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더 먹으라고 들이미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하녀들이 그녀의 방 안 곳곳에 간식거리를 날라 오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하나둘 집어먹다 보면 어느새 텅 빈 접시만 남아 있었다. 덕분에 나디아는 빠르게 본래 체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었다. 배부르다고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은 나디아는 그가 접시 위로 놓아준 커다란 새우를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며칠 전, 아실이 그녀의 방을 찾아왔던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윈은 마주칠 때마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아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나디아는 그에게 먼저 아실이 찾아왔었다고 털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하고 넘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에드윈이 식사를 끝내려는 듯이 식기를 내려놓고 유리잔에 든 한 모금 남짓의 와인을 쭉 들이켰다.
“흠.”
나디아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놀랐던 것을 감추려 괜히 물잔을 매만졌다. 다행히 에드윈은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뭔가 필요한 건 없어?”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 같지가 않았다.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낄 만한 생활이 아니었다. 대체로 그녀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준비되어 있게 마련이었고, 설령 무언가 필요하게 되었더라도 하인들에게 명령만 하면 되었으니까.
에드윈은 제가 말을 꺼내고도 멋쩍은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곧 당신 생일이잖아. 선물을 하려 했더니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더군. 당신은… 특별히 애착을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아….”
나디아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그러고 보니 곧 그녀의 생일이었다. 원래부터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일이었던지라 계절이 바뀌는 걸 뻔히 보면서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걸 먼저 챙기려 드는 사람이 에드윈이라는 사실은 제법 의외였다.
“그래서 요 며칠 성이 소란스러웠던 거군요.”
그녀는 별생각 없이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필요한 것, 필요한 게 뭐가 있지? 나디아의 침묵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에드윈이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갖고 싶은 건 없어? …그러고 보니 알레그로 광산에서 주먹만 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더군. 조금 늦긴 했지만 웃돈을 주면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걸로 브로치를 만드는 건 어때? 티아라를 장식해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에블랑에 별장을 지어 줄까?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 풍요롭고, 아름답지.”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읊는 그의 모습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에드윈은 풋사랑에 빠진 십대가 된 것처럼 굴었다. 나디아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묘한 열기와 불안이 뒤범벅된 얼굴. 그녀는 문득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느끼는 사랑과 그가 느끼는 사랑이 같은 무게일지, 같은 밀도일지, 과연 그 끝은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복잡한 상념들이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다 흩어졌다.
나디아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화려한 선물들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다른 것을 떠올렸다.
“류트….”
“류트?”
혼잣말처럼 튀어나온 것을 에드윈이 낚아챘다. 나디아는 서둘러 부정하려다 그것 외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현이 끊어져서….”
“연주할 줄 알아?”
“조금요.”
에드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디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생각을 읽는 재주는 없었기에 궁금증으로 그쳤다.
에드윈은 몇 번 마른침을 삼키더니 다시 태연한 낯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에 깃든 뜨거운 열기는 쉬이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고 그는 일견 예전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연주하는 거 들어보고 싶군.”
“그런, 누굴 들려줄 정도는 아닌데….”
나디아는 당황해 손을 내저었지만 에드윈은 말을 무르지도 않았고 농담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나디아는 때때로 구석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줄 끊어진 류트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종종 생겼다.
악기에 다시 손대기 시작한 건 오랜만이었다. 칠 수 있는 곡도 몇 곡 되지 않았고 어디 내보일 만한 솜씨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디아는 이제 류트를 볼 때마다 저를 내려다보던 열기 서린 눈을 떠올리게 되었다.
연주를 들려 달라니. 입바른 말 따위는 할 생각도 안 하는 남자의 성격상 진담일 것이 분명했다. 줄 끊어진 악기의 유려한 곡선을 따라 미끄러지던 손이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방에 홀로 남은 나디아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돌렸다. 온 성의 사람들이 바쁘게 준비 중이라는 그녀의 생일 연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녀들이 나디아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깜짝 놀라기를 바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찍하긴.
성안의 사람들이 바빴던 것처럼 나디아도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드레스, 다음은 구두 그리고 다음은 장신구였다.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날씨는 점점 더 따뜻해졌고 봄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창을 열면 따뜻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정원사가 바쁘게 모종을 옮겨 심었던 화단의 푸른 물결 사이로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온실은 계절을 잊은 화려한 꽃들이 만개했지만 바깥은 아니었다. 나디아는 얼른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위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
나디아의 생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축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귀족들의 마차가 속속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하고 또 손님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게 신경 써야 하는 건 그녀의 일이었지만 허약해진 몸과 불편한 거동을 이유로 에드윈이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미 엘란츠 후작과 그 후작 부인이 겪은 일에 대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소문이 퍼진 이후라 성의 없다고 여겨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소문이 아니었더라도 엘란츠 후작에게 따지고 들 만큼 배짱 좋은 손님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드넓은 성이 복작복작하게 느껴졌다.
연회 당일, 나디아는 해가 떠오르고도 한참이 지나 느지막이 일어났다.
연회는 오후 두 시부터 시작이었다. 성안은 장식을 위해 곳곳에 꽂아 둔 라일락 향기로 자욱했다. 그녀는 수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라일락 꽃송이를 뿌린 온수에 몸을 씻었다. 꽃향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젖은 머리와 몸에 향유를 바르는 하녀들의 부드러운 손길에 다시 잠이 들 뻔했지만 그녀가 꾸벅꾸벅 조는 동안에도 젖은 머리채를 말리거나 얼굴에 화장품을 펴 바르는 일은 계속되었다.
“마님,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해.”
나디아는 반쯤 졸면서 대답했다. 간신히 졸음을 떨쳐 낸 것은 머리와 화장이 끝나고 드레스를 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