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02화 (102/115)

102.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굳은 다짐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맹렬한 고민에 잠겼다. 아실을 들여보내도 되는지, 왜 그녀의 방을 찾아온 것인지.

에드윈은? 황제의 사절로서 온 것이라면 에드윈과 가장 먼저 마주쳤을 텐데 그가 순순히 보내 주었단 말인가? 이대로 그에게 돌아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나디아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안 돼, 지금은 회피할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니 마지막일 것이 확실한 지금이야말로 그와의 일을 끝맺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더는 에드윈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게 아닌가. 혹시나 그가 무슨 일로 아실을 만났냐고 물어도 잘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전과 다른 에드윈의 태도를 떠올리자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들어와요.”

다행히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내뱉은 허락의 말에 지체 없이 문이 열리고 그녀를 찾아온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놀란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상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느릿하게 숨을 뱉어 내며 평정을 가장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아실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둘만 남은 공간에서 나디아는 몰아내려 애썼던 복잡한 상념들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실의 걸음마다 갑주의 이음새가 절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부러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온 아실이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디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사가 그 위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경도… 무사하다고 들었는데, 다행이에요.”

간신히 입 밖으로 몇 마디 꺼내어 놓자 말문이 턱 막혔다. 수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제가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기라도 하는 듯했다. 나디아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정리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아실과의 재회는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러했다.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던 때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말로서 전해 듣는 것과 무사한 실물을 보게 되는 감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나디아의 시선이 기억하던 것보다 야윈 뺨과 어깨에 닿을 듯 길었던 머리카락이 귀 아래까지 짧아진 모습을 스쳐 지나갔다.

아실은 그녀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염려하듯, 짧은 인사 후 조금의 지체도 없이 손을 놓고 물러났다. 그의 눈길이 잠시 나디아의 다리와 그녀가 짚고 있는 화려한 지팡이를 향했다.

“늦었지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아실의 말투는 담담했다. 도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다시 깃들기 시작했던 달짝지근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었고, 모래가 서걱이는 듯한 삭막함만 남았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긴 공백과 그사이에 벌어졌을 일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졌다. 나디아에게는 갑작스럽기만 한 태도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을, 그녀는 알지 못하는 일들.

누군가 상처 위로 소금을 뿌린 것처럼 가슴팍이 쓰라렸다.

작별…. 나디아는 그 단어를 음미하듯 되풀이했다. 그녀가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제법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홀로 잔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기라도 한 것 같은 공허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바뀌어 버린 아실의 태도가 낯설고 서글퍼도 나디아도 이게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하는 사이 아실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무슨 말을 할지 미리 다 정해 놓고 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늘 이후로 다시 뵙게 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그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겁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건틀렛을 벗더니 손목에 매여 있던 끈 팔찌를 잡아당겼다. 반쯤 해어져 있던 팔찌가 맥없이 끊어졌다. 아실이 끊어진 팔찌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름의 끝자락, 누구의 눈에 띄기라도 할세라 몰래 떠넘기듯 건네주었던 것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시원한 강바람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디아는 끈 팔찌에 대해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똑같은 것을 나눠 가진 뒤, 제가 저지른 대담한 짓에 놀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후회를 거듭하다 몰래 숨겨 두었던 팔찌를 끄집어내 창밖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진 이후로는 떠올리려 하지도 않았더랬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장신구에 대한 기억은 깊숙이 침잠했었다. 우연히라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녀와 같은 장신구를 나누어 가졌던 아실은 저 별거 아닌 팔찌를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을 만큼 아끼고 있었는데.

커다란 죄책감과 함께 깨달음이 밀려와 나디아를 마구 휘저었다. 그녀는 이제야 제가 그에게 미안해했던 이유를 정의할 수 있었다.

더는 아실을 사랑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다 못해 미약한 온기만 남긴 채 재로 변해 버린 것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마음이 쫓기고 있었나?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한 일들이 휘몰아치는 사이 그녀가 바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그 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외면했던 것인지 구분하기가 두려웠다. 아실을 저 좋을 대로 이용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와 숨통을 조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녀는 비겁하고 나약한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나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너덜거리는 팔찌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그랬듯이 어딘가 내다 버리지 않고, 이렇게 직접 건네주는 건 확실히 끝내겠다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매달려 오는 상대를 냉정하게 쳐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지막. 은연중에 느끼던 것이 실체가 되어 다가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을 잇기가 힘겨운 듯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괜한 오기로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실에게 그런 말을 건넬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부정할 수가 없더군요,”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다. 나디아는 부정도,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짙게 가라앉은 녹색 눈은 쉼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는 남자를 보며 나디아는 입술만 질근질근 씹었다. 지금은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을 낚아채 도망갈 용기도 없었고 힘들게 손에 쥔 지위를 내다 버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설픈 위로의 말도, 괜찮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냥 반짝반짝 빛나기만 하던 감정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흉터가 남을 게 분명한 상처들만 가득했다. 이젠 무슨 수를 써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자의 창백하게 질린 손이 초조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과욕이었습니다. 귀부인을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당신은 괴로워지기만 했죠. 진작 놓아 드렸어야 했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부인을 괴롭게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진작 끝냈어야 했을 극의 막이 느리게 내려왔다.

“부디 용서하시길.”

쌓아 둔 것들은 흘러 내려가지 못한 채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구 소리라도 지르면 좀 나아질까?

그녀를 괴롭게 했던 일…. 쉬이 용서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올랐다.

끔찍했던 결혼식 다음날은 잊으려야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날 흘린 눈물과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관통했던 고통은 아마 과거를 묻어 두고 아실과 함께한다 한들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되살아나 평생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뒤이어 그를 멋대로 이용한 일들 역시 생각해 냈다. 아실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그녀는 영악하게도 그 감정을 저 좋을 대로 이용했다. 투정을 부리고, 감정에 이끌려 저를 더 챙겨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를 불안하고 괴롭게 만드는 일들을 열락에 잠겨 잊고 싶다는 핑계로 그를 유혹해 보낸 밤 역시.

후회할지도 모른다던 아실의 말은 딱 맞아떨어졌다. 나디아는 충동에 휩쓸렸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억지로 지새운 그 밤은 결국 아실에게도 에드윈에게도 죄책감을 느낄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죄책감에 욱신거리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어디선가 치졸하기 짝이 없는 반박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내게 상처 주었으니 나 역시 그래도 되는 거잖아.’

차마 입 밖으로 낼 생각마저도 할 수 없을 만큼 졸렬한 변명이었다.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쫓아냈다.

뭐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쉬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디아는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할 말을 정리했다. 어차피 그간의 기억들을 완전히 털어 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별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는 동요하지 않는 녹색 눈을 바라보며 목구멍에 걸린 것을 토해 내듯 말했다.

“그러니 당신도 용서하지 말아요.”

나디아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팔찌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떨림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숨소리만 들리던 방 안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멀어지는 인기척을 들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으로 멈춰 있던 숨을 내쉬었다. 자그맣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는 뒷모습을 잠깐이나마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나디아는 그녀처럼 뒤돌아본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마지막이 될 이 순간, 서로의 얼굴을 한참이나 마주 보았다. 영원 같았던 순간이 지난 후,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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