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짝 굳은 이유는 깜짝 놀랄 만큼 순식간에 공간을 잠식한 성적 긴장감 때문이다.
정말이지, 수완이 좋은 남자였다. 나가는 척하고는 문을 여닫는 소리만 낸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다리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들어온 몸이 바짝 밀착했다.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얼굴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밀어내려 다리를 버둥거려도 그 사이에 갇힌 남자의 허리를 문지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나가라고 했잖아요.”
“내가 나가면 당신은 쫓아오고?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할 필요가 있나?”
에드윈은 이불 위에 흩어진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나디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런 적 없는….”
“거짓말쟁이.”
숨소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목덜미에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스쳤다. 솜털이 곤두서고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커다란 손이 덥석 허리를 잡았을 땐 눈에 띌 만큼 몸이 튀어 올랐다. 불길했던 긴 꿈도, 그의 감정에 대한 불확신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녀의 귓가와 목덜미를 배회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배 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간지러운 접촉은 이윽고 귓불을 콱 깨무는 감각에 끝이 났다,
“앗!”
놀란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쥐고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나디아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아프다고 속삭이자 힘이 풀렸다.
에드윈이 그녀의 턱과 뺨을 따라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말랑한 입술을 짓누르듯 몇 번이고 키스가 내려앉았다.
“입 벌려 봐.”
낮게 잠긴 목소리가 명령했다. 나디아는 잠시 망설이다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어 댔다. 에드윈이 주무르는 게 젖가슴이 아니라 제 심장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껏 가볍게 닿던 입맞춤은 장난이라는 듯 저돌적으로 입술이 달려들었다. 에드윈의 손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자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남자의 혀가 한껏 밀려들며 좁은 입 안을 휘저었다. 질척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흐….”
눈이 감겼다. 나디아는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은 채 바들바들 떨며 짜릿한 감각을 견뎌 냈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핥고 입 안의 여린 점막을 문지를 때마다 뇌 속을 뒤섞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턱을 잡고 있다 떨어져 나간 손이 감질날 만큼 느릿하게 몸 위를 스쳐 내려갔다. 나디아는 그것을 붙잡을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막힘없이 얇은 옷 위를 미끄러진 손이 엉거주춤 벌린 다리에 닿았다.
가느다란 발목이 뜨거운 손아귀에 잡히는가 싶더니 그 열기는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가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운 종아리를 지나 무릎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윽고 얇은 드레스를 밀어 올리며 안으로 침입한 손이 말랑한 허벅지 살을 꽉 움켜쥐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의 힘에 이끌려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부끄러움인지 흥분인지 모를 것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에드윈의 가슴팍을 더듬어 올라간 손이 그의 목덜미와 귓가를 매만졌다. 땀이 맺혀 촉촉한 피부 아래로 빠른 속도로 펄떡거리는 맥동이 느껴졌다.
입술이 민망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껏 거칠어진 숨이 오갔다. 뒤집힌 치마 속에서 그녀의 허벅지에 희미한 손자국이 남을 만큼 살결을 주무르던 손이 약간의 망설임을 남기고 스르르 빠져나갔다. 몸 위를 짓누르던 무게 역시 사라졌다.
에드윈은 속옷이 드러날 만큼 올라간 나디아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 내렸다. 그녀는 몽롱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매무새를 정리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멍하니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에드윈이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냉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자제할 자신이 없어.”
쑥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흥분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디아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나며 딴청을 부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그가 마구 주물러 댄 탓에 주름이 진 드레스를 폈다.
“계단 오르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상대로 그럴 순 없지.”
“환자 취급….”
“환자니까.”
혼자 불만스럽게 중얼거려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에드윈은 정말로 짙은 입맞춤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났다. 나디아는 그걸 아쉽게 느끼는 자신도, 흠뻑 젖은 속옷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신경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나디아는 본래 하녀들이 매일같이 바꾸던 화병의 꽃을 직접 채우겠다며 온실로 내려가 달리아 밭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겨울옷을 정리하고 봄옷을 꺼내려 옷장을 정리하는 하녀들 틈에 끼어들어 훈수를 놓았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게 만들려던 정신 사나운 짓들은 체력에 한계를 느끼고 이틀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에게 환자 취급을 한다며 구시렁거렸지만 제 몸인 만큼 그녀도 확실히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활동량이 많은 일과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지루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나디아는 가지고 있는 천이란 천마다 수를 놓거나, 책을 읽고, 유리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며 안락의자에 파묻혀 졸기도 했다.
몇 번인가 그 모습을 목격한 에드윈은 어느 날 문득 제법 큰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그는 말없이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디아는 그의 맞은편에 앉은 채 상자를 열기 시작하는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체스. 둘 줄 알아?”
대답과 함께 체스판과 체스말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두는 걸 구경하거나 각 말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둘 줄은 모른다.
에드윈은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나디아는 뜬금없게까지 느껴지는 이 일이 그녀가 심심해할지도 모른다 여긴 그의 배려라는 걸 알아차렸다. 체스에는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았지만 그녀는 에드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고 어설픈 두 번째 체스가 끝났을 무렵, 먼 곳에서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코펠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수도에서 황제의 사절이 오기로 했어. 가 봐야겠군.”
그는 가져왔던 체스판과 말을 가져가는 대신 테이블 아래에 수납했다.
“당신은 신경 안 써도 돼.”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에 나디아는 의문이 커지기 전에 접었다. 에드윈이 굳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기도 했으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 맞겠지.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상상으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 역시 싫었다.
에드윈이 방 밖으로 나섰고 나디아는 텅 빈 방 안을 서성이다가 발코니 근처로 다가갔다. 찬바람을 쐬지 말라고 하녀들이 돌아가며 당부하는 탓에 이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쐰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꽉 닫힌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줄지어 들어오는 사절단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디아는 그들의 갑옷 위로 두른 붉은 서코트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보았다. 사절단의 선두에 선 기사의 붉은 머리카락 역시.
“황제의 사절이라더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복잡한 감상들이 자욱하게 차올랐다.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한 만남을 떠올리며 뒤엉킨 실타래 같은 일들을 풀기보다는 어딘가 쑤셔 넣고 숨기는 것을 택했는데, 다시 그것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따지는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진작 버렸어야 했을 비약과 고집을 이제야 떨쳐 낼 마음이 들었다.
나디아는 하늘거리는 흰 레이스 커튼을 쳤다. 그녀는 느릿하게 서너 걸음 물러서다 이윽고 아예 몸을 돌렸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하고 몇 번이나 되뇌며.
이미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으니, 그 결정에 따라 아실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으면 했다. 스스로가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이 샘솟았다. 그럴 때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비우기 위해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조금 전 에드윈이 알려 주었던 체스에 관한 것들.
그의 성의를 생각해 어울렸지만 이기고픈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탓인지 에드윈이 눈에 띌 만큼 봐주고 있었지만 두 판을 내리 졌다.
아무리 재미없어도 몇 판쯤 이길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남자가 그녀를 생각해 준비한 게 가상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으니. 이기면 재미있어질지도 모르지. 그녀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던 생각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리가 불편해진 이후로 하루 종일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일은 흔했다. 절뚝거리며 온 성안을 싸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엘란츠 성의 소속이 아니게 된 기사단원이나, 마주해 봤자 죄책감만 불러일으키는 남자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녀는 온실로 향하는 계단을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단순한 운동을 끝낸 뒤 욕조 가득히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새하얀 욕조 가득히 차오른 물 위로 하녀들이 몇 가지 향유를 쏟아부었다.
미끈미끈한 피부 위를 매만지는 손길에 잠이 솔솔 쏟아졌다. 해가 지기는커녕 아직 한낮이었지만 나디아는 목욕을 끝내기가 무섭게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태만하기 짝이 없다며 손가락질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탓인지 사흘이란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어느덧 사절로 왔던 기사들이 돌아가기로 한 날이 내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도 초조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대로 아실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보내기는 석연찮았다.
고집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사과를 받을 일도 있었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실을 만날 수 있을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혹시라도 에드윈이 오해할 만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는 도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누구나며 문 밖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실 쿠르쉬드입니다, 귀부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