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00화 (100/115)

100.

그날 에드윈은 바로 옆에 바짝 붙어 나디아의 허리를 안아 지탱하며 걷는 연습을 도왔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이 빠질 때마다 붙잡아 주는 힘은 매우 든든했다.

별거 아니겠거니 여겼던 나디아의 생각과 달리 난간을 붙잡아도 걷는 일은 꽤 힘들었다. 상처가 다 아문 걸 확인했는데도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고작 십여 분을 낑낑거린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렀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묵묵히 옆에 선 에드윈의 팔이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어서 그도 여의치 않았다.

“…힘들어요.”

“그러게 일찍 일어나지 그랬어.”

퉁명스러운 말투에 고개를 치켜들자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에드윈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표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그렇게 자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못 들은 걸로 해.”

에드윈이 땀에 젖은 나디아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들었는데 못 들은 거로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자꾸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는 다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제 발로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매번 이렇게 들려 다니자니 커다란 모래주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나디아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윈이 덧붙였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늘려 가면 곧 괜찮아질 거야.”

매일매일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득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의 팔 안에서 짐짝처럼 들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디아는 이를 악물고 재활을 계속했다. 그 기간 내내 에드윈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 시간 역시 빼놓지 않고 찾아왔다.

1년도 안 된 결혼 생활을 통틀어 이렇게 매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작정하고 부드럽게 굴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이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자 차차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온실 한편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요즘 왜 그러는 거예요?”

“뭐가?”

따지는 듯한 물음에도 에드윈은 네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그가 제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라 알아챘다.

그동안의 유한 태도 덕분인지 이젠 에드윈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짓궂음을 탓하듯 그의 팔뚝을 때렸다. 에드윈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지.”

그가 지레 놀라 움츠러든 나디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 맞추면서도 그의 시선은 나디아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연한 제비꽃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얼굴이 절로 달아오를 만큼 달콤하고 끈적한 시선이었다. 입 안에 꿀맛이 감도는 듯했다.

“달콤하군.”

에드윈의 말에 나디아는 제가 느낀 감각을 그가 눈치챈 줄 알고 흠칫 놀랐다.

“진작 이렇게 해 볼 걸 그랬어.”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나디아가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에드윈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도 매몰차게 손을 뿌리치고픈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포기하고 얌전히 있었다. 그는 나디아의 손끝이 분홍빛으로 물들 때가 되어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감추었다. 그러지 않으면 에드윈이 다시 끌어가기라도 할 거라는 듯. 새하얗던 살갗에 남은 자그마한 붉은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이래야 날 선택하지. 잊었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올랐다. 다른 사람 같은 에드윈의 행동에 당황하느라 미처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나디아는 뒤이어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다고 한 마당에 더는 벌벌 떨며 숨길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 가시 기사단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드윈의 얼굴 위로 빠르게 불쾌함이 스쳐 지나갔다. 불만스럽게 꿈틀거리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퀘른에 있지. 황궁 소속으로 바뀌었거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얼굴은 아주 오랜만에 목격하는 비틀림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매일같이 찾아와 안아 옮기거나 함께 식사한 보람이 있는지, 나디아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이전처럼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실을 멀리 보내 놓고 나더러 선택을 하라고요?”

“문제라도 있어?”

“뻔뻔한 남자 같으니.”

그가 이번엔 기분 좋은 웃음을 띠었다. 나디아가 밉지 않다는 듯 눈을 흘기는 모습을 기꺼워하는 게 분명했다.

“당신이 꾸민 일인가요?”

“그럴 리가.”

에드윈이 저는 결백하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노인네가 있는데, 기사단을 하나 내놓으라더군.”

나디아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자 그는 묻지도 않은 속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게 누명이라도 씌워서 찍어 낼 기세기에 마침 데리고 갔던 기사단을 내어 준 것뿐이야.”

무언가를 털어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터는 모습은 자기 것을 빼앗겨 억울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신경을 거스르던 골칫거리를 털어 내기라도 한 듯 속 시원해 보였다.

에드윈은 나디아가 무어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입 속으로 작게 자른 케이크 조각을 밀어 넣었다. 생크림 위에 듬뿍 올라 앉아 있던 체리가 입 안에서 뭉그러지며 브랜디 향이 올라왔다.

설탕 시럽에 젖어 부드러워진 제누아즈(génoise)와 생크림 그리고 절인 체리가 녹아들듯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졌다. 나디아는 귀신같이 케이크를 떠 내미는 에드윈을 흘기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가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비우고 나서야 그의 손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디아는 의자 옆에 기대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쥐었다. 이제 느린 속도로나마 홀로 걸을 수 있을 만큼 다리가 회복되었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듯 절게 된 건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한 지 오래였다.

숲 속의 저택에서 율리안을 마주쳤던 그 순간이 아실과의 마지막이었던 셈이구나.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게 걸렸지만, 괜히 또 끝을 맺겠답시고 질질 끌다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리했어야 할 관계였고, 먼 길을 돌아와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니.

당장이라도 에드윈에게 ‘선택’을 하겠다며 말을 꺼낼 수도 있겠지만 나디아는 조금 더 신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옆에서 팔을 살며시 붙잡아 주는 에드윈의 도움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던 나디아는 가쁘게 차오른 숨을 뱉어 내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새 황제 폐하는 어때요?”

“음?”

에드윈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멈춰 섰다. 그리고 짧게 생각하더니 별거 아닌 사실을 말하듯 담백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율리안과는 다르지. 정반대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

나디아는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말만으로 안도하게 되었다.

“형제라고 해도 많이 다른가 보네요.”

“율리안은 선황을 닮았고, 라슬로는 일레나 황후를 닮았지.”

나디아는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금세 숨이 찼다.

“라슬로는 공정하지. 이유 없는 분란도 싫어하고. 그러니… 그와 관련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전과 다를 거야.”

그리 말하는 에드윈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헉헉거리며 계단을 모두 올라갔을 때 나디아는 그의 걸음이 멈춰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아한 낯으로 뒤돌아보는 나디아를 올려다보는 에드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힘든가?”

항상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에드윈은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남자의 뺨 위에 닿은 손이 그의 피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에드윈은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나디아가 화를 낼 대상은 그가 아니었다. 그녀를 해치려 들거나, 인질로 삼아 겁박하려던 사람은 율리안이지 에드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했고, 점심으로 먹은 게 얹힌 것 같기도 했다.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몰랐다. 혼란스러워하던 나디아는 답답한 가슴팍을 두어 번 내리치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을 오르는 게 그만큼 힘들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는 대신 그녀보다 몇 칸 아래에 서 있는 에드윈을 응시했다.

복잡한 감정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좋았다. 마치 그녀의 입에서 나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오만한 남자를 휘두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알량한 우월감이 찾아왔다.

나디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서 뒤따라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떤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그를 용서할 수 없다든가 하는 이유 역시 아니었다.

다만 저를 선택해 달라며 약한 척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남자를 조금 휘둘러 보고 싶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장난기였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답답함도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항상 그녀가 그에게 휘둘리기만 했으니 한 번쯤은 제가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문득 떠오른 충동을 이겨 내지 못했다.

물론 에드윈이 그녀의 생각대로 순순히 휘둘려 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가 언제 죄책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했냐는 듯 저를 농락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갑옷처럼 둘렀다. 또 눈치가 빠른 남자인 만큼 그녀의 속셈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디아.”

에드윈이 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속여 넘길 만한 연기를 할 자신은 없었다. 거짓말조차도 쉽게 들키는 마당에 연기는 가당치도 않았다.

나디아는 상심한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절뚝이며 침대로 향했다. 대충 손을 놓자 새 황제에게 선물 받은 지팡이가 아무렇게나 푹신한 카펫 위로 쓰러졌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하며 들어가려는 나디아를 에드윈이 부축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두꺼운 이불 속에 폭 파묻혔다.

“쉴 거니까 나가요.”

에드윈의 당황이 느껴지자 짜릿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방을 나서는 발소리가 푹신한 카펫에 먹히더니 조금 지나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디아는 덜컥 겁이 났다. 주제넘는 짓을 저지른 게 아닌지, 제게 머물렀던 남자의 애정이 흐려질 만큼 건방졌던 건 아닌지.

나디아는 지금이라도 에드윈을 붙잡아 세우고 장난이었다고,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서둘러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려는데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럴 줄 알았지.”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에드윈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재미있었어?”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슬쩍 밀자 몸이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올려다보자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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