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엘란츠 성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던 온실은 여전했다. 공들여 가꾼 키 작은 나무들과 계절을 무시하는 꽃 화단, 아담한 분수대와 티 테이블과 무거운 원목 의자, 그 옆의 낮은 테이블 그리고 그녀가 몸을 쭉 펴고 누워도 남을 만큼 길쭉하고 푹신한 카우치.
아름다운 화강암 분수의 첨단에서 흘러내리는 청량한 물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나디아를 카우치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조금 후덥지근했다. 나디아는 어깨 위를 감싼 망토를 벗었다.
그녀가 반가운 냄새가 감도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동안 에드윈이 그녀가 앉은 카우치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손이 실내복으로 입던 얇은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마른 종아리가 한 손에 잡혔다.
“아….”
그가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던 그녀는 그의 손에서부터 다리를 빼내려 했지만 에드윈이 말없이 쳐다보자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맨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하녀들이 매일같이 해 주었던 별것 아닌 일과였지만 그 행동을 하는 게 에드윈이 되자 너무도 달랐다. 살갗에서부터 뜨끈한 체온과 함께 묘한 간질거림이 타고 올라왔다.
점심을 온실에서 들겠다는 그의 말에 따라 식사 준비를 위해 음식을 들고 들어오던 하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얼굴이 불에 탈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만 달싹이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에드윈은 무심한 얼굴로 한참이나 나디아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다가 나디아가 조금이라도 얼굴을 찌푸리면 손에 힘이 빠졌다.
정말로 이상했다. 원래도 행동만큼은 다정했지만, 입만 열었다 하면 두근거리던 마음도 모조리 깎아먹기 일쑤더니,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말은커녕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마음이 깎여 나가지를 않았다.
양다리가 흐물흐물해질 만큼 주무르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녀들이 식사 준비가 끝났다며 우물쭈물 말을 끄집어냈을 때였다. 에드윈이 손을 떼고 나서도 한참이나 간지러움이 잦아들지 않았다.
“나가 봐.”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던 하녀들이 그의 명령 한마디에 바로 자리를 떴다. 에드윈은 그녀를 다시 안아 올려 분수대 옆에 자리한 티 테이블 앞에 앉혔다. 무릎 위로 그가 직접 펼쳐 준 냅킨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디아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좋은 건지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그녀의 앞에 맑은 수프와 스푼이 놓였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그녀는 딱 먹기 좋을 만큼 식은 수프로 속을 채웠다.
그사이에 에드윈은 접시에 담긴 커다란 양갈비 구이를 잘랐다. 본래 하녀들이 해야 했을 일을 직접 하면서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었다. 그의 칼질을 따라 벌어진 살점 사이로 연분홍색 단면이 드러났다.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다른 접시에 옮겨 담은 에드윈이 접시를 제 앞에 두는 것을 흘끔 보던 나디아는 평온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얌전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녀의 입가로 작게 자른 고기가 들이밀어지기 전까지는.
나디아는 당황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하니까 괜찮아.”
그가 다시 한번 포크를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에드윈의 말처럼 버터와 로즈마리 향이 남은 고기는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순식간에 식욕이 돌았다. 저도 모르게 다음을 기다렸다.
정신이 든 건 이미 다섯 번쯤 얌전하게 그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고 난 이후였다. 나디아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뒤로 물렸다.
“왜?”
에드윈이 낯간지러운 짓을 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나디아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씩 있었다. 그때는 그저 변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에드윈의 다정한 행동에 자꾸만 사랑한다던 담담한 고백이 덧씌워졌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한다더니,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딱 한 번뿐인 경험이었지만, 그녀가 사랑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 어떠했던가? 나디아는 사랑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매끈한 에드윈의 얼굴에는 그 어떤 열정도 보이지 않았다.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마 사랑은 아니겠지. 썩은 통나무 안에서 느꼈던 확신은 벌써 흐려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강으로 뛰어들었나?’
머릿속 한편에서 또다시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디아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 자식에게는 절대 보내 줄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두 남자 사이에서 선택하라 종용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과연 그 질문의 유예 기간은 언제까지인 걸까? 나디아는 제게 선택권이 주어질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그만 먹어?”
“아니, 아뇨.”
느릿하게 이어진 식사가 끝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저는 바쁜 일이 있다며 쌩하니 가 버릴 것 같았던 에드윈은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하녀들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며 이르는 듯하더니 나디아의 약을 직접 챙겼다.
그녀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그와 시간을 보낼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어색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에드윈에게는 본래 함께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기보다는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디아가 굳어 있는 것을 에드윈은 어렵지 않게 눈치챈 듯 했지만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쉬이 자리를 떠나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을 들어 쫓아 보냈던 하녀를 다시 불러들였다.
“내 방에서 하얀 상자를 가져와.”
“알겠습니다, 영주님.”
하녀가 온실을 떠나고 에드윈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방만한 자세로 느긋하게 나디아를 응시했다. 잠시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시선을 돌렸다.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를 깨작거리거나 반쯤 식은 차를 마시며 딴청을 부리고 있자니 에드윈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긴장하지?”
“그, 그다지 긴장하지는… 않았어요.”
신빙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예전처럼 은연중에 에드윈에게서 느껴지곤 하던 날카로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번 몸에 밴 반응이 쉬이 사라지기는 어려웠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해?”
“그런 건 아니지만….”
에드윈이 손을 뻗었다. 뺨 위로 흘러내린 밤색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자 당황으로 붉게 달아오른 귀가 드러났다. 나디아는 망설이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간신히 용기를 냈다.
“왜 화를 안 내요?”
“화를 냈으면 좋겠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다정한 에드윈의 태도는 매우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비난을 퍼붓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이런 태도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싫증을 느끼는 순간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꿈의 일부가 떠올랐다. 다정하고 장난스럽던 꿈속의 남편의 태도가 변하는 그 공포스럽기까지 한 기억이.
그 꿈에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움츠러드는 나디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혀를 찼다.
“자업자득이군.”
불편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할 때쯤 구원처럼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이 말했던 상자를 들고 온 것이 분명했다.
“들어와.”
그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공손한 자세로 화려하고 길쭉한 상자를 받쳐 든 하녀가 들어왔다.
“여기 내려놓고 나가 봐.”
“예, 영주님.”
상자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품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녀가 혹여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테이블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하녀의 모습이 온실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에드윈이 상자를 나디아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게 뭐예요?”
“황제 폐하로부터의 선물이지.”
반사적으로 율리안을 떠올린 나디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에드윈이 황급히 정정했다.
“라슬로 황태자야. 이름은 들어 봤겠지?”
“그분은 10년 전에….”
그녀는 기억을 되짚었다. 3황자 율리안이 제 형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수도가 발칵 뒤집혔던 일은 쉬이 잊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삼 형제 중 일을 주도한 율리안을 제외한 황자는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황태자가 살아 돌아와 황제가 되었다니. 믿기 힘들었지만 에드윈은 그 이상의 설명을 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열어 봐.”
나디아는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반투명한 온실 지붕을 통해 들어온 햇빛 아래에서 월광이 빛났다. 매끄러운 월장석 상자 표면을 쓸어 보던 손끝이 은으로 만든 걸쇠에 걸렸다. 걸쇠조차도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었다.
상자만으로도 예술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그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내심 궁금하면서도 얼떨떨했다.
자그맣게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열리는 상자 안엔 짙은 보라색 벨벳 쿠션 위에 다소곳이 자리한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
나디아는 어째서 새 황제가 지팡이를 선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부드러운 장미 넝쿨 조각을 매만지던 그녀는 이윽고 손을 내렸다.
“아름답네요.”
입이 말라 찻물을 한 모금 삼킨 나디아가 무미건조한 감상을 내뱉었다.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선물이었다.
그녀가 제 생각 속으로 침잠하기 전에 건져 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에드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그가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번에는 처음만큼 당황스럽지 않았다. 에드윈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려 했던 나디아는 그가 온실 안에서 몇 걸음 이동한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긴 난간이 아무것도 없는 온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나디아를 내려 주었다.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난간을 붙잡았다. 분명 떠나기 전엔 없던 구조물이니, 지금 어떤 용도로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야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