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98화 (98/115)

98.

나디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벌써?’

예정일까지 사흘은 남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드윈이 없는 동안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하려 했는데. 날짜를 잘못 셌던가? 초조함과 반가움이 함께 들이닥쳤다.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 마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성에 도착한 에드윈이 그녀를 만나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나, 대답해야 할 것에 대해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영주를 맞이하는 성안이 묘하게 소란스러워진 것을 방 안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무리해서 걸으려 하지 말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도무지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이불을 걷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다. 앙상하게 마른 다리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힘을 주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침대 기둥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오른쪽 다리에서부터 올라온 통증이 척추를 울렸다. 이대로 걷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집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나디아는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채로 조심스럽게 기둥을 붙잡았던 손을 뗐지만 서 있을 수 있었던 게 무색하게도 바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몸이 덜컹 붙잡혔다.

통증을 각오하며 질끈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코앞에 다가온 가슴팍에서 차가운 바람 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기가 났다.

“에드윈?”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반갑게 여겨지는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윈이 나디아를 번쩍 들더니 침대 위에 고이 내려 주었다.

“마법사들이 주의를 했던 것 같은데.”

“미안….”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의 다리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탓하려는 게 아니라….”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의자에 구겨지듯 앉은 남자의 얼굴은 끔찍이도 피곤해 보였다.

“몸은 좀 어때.”

“괜… 찮은 것 같아요.”

나디아는 그가 괜히 어색했다. 그의 태도가 어딘지 유하게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실제로 느끼지 못했던 한 달이 넘는 부재를 은연중에 느끼고 있는 것인지.

“오던 중에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미친놈처럼 달렸어.”

나디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바로 몇십 분 전 찾아왔던 어떤 깨달음이 다시 한번 찾아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요?”

“잊었어?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기쁘거나 설렌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계속해서 가슴께를 쿡쿡 찌르며 외면하지 말라고 외치던 깨달음이 의기양양하는 게 느껴졌다.

에드윈은 그대로 앉은 채 나디아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바짝 마른 몸과 하얗게 튼 입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허리를 숙인 남자가 나디아의 까칠한 입술 위에 조심스럽게 입 맞추었다.

살짝 닿는가 싶던 입술이 그녀의 것을 가볍게 빨았다. 마른 입술이 그의 타액에 젖었다. 입맞춤은 더 깊어지지 않고 끝났다.

“난 좀 쉬어야겠으니 당신도, 약 잘 챙겨 먹고… 쉬도록 해. 혼자서 걸으려 하지 말고.”

“아, 알았어요.”

노골적으로 바뀐 태도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가 보겠다는 말에 과하다 싶을 만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대로 서서 나디아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이윽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거리며 뛰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 탓하는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가 사과하자 그런 게 아니라고까지 했다. 마냥 달콤하게 구는 건 아니었지만 변화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이상해.

***

에드윈의 당부도 있었고, 나디아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 혼자 걷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억지를 부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굳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움직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엘란츠 성을 떠나기 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했던 소소한 일들에 다시 손을 뻗었다. 수를 놓거나 책을 읽고, 서툰 솜씨로 류트를 연주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늘 무난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수를 놓다가 저답지 않게 손끝을 몇 번 찔리고는 골무를 찾아 끼웠지만 오래지 않아 흥미가 식었다. 활자가 빽빽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집중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며 졸음이 몰려왔다. 그나마 할 만한 것은 류트 연주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현이 끊어졌다.

온 세상이 그녀를 지루하게 만들려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마냥 홀가분해야 할 텐데 어째서일까.

오랜 잠 때문에 바로 얼마 전처럼 느껴지지만, 두 달 가까이 전에 겪었던 일이 남기고 간 감각들은 종종 이유도 없는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맞는 건지, 몇 번을 홀로 되묻다가도 제 방의 익숙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보다는 변하지 않는 화려한 방 안의 모습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게 낫지. 그리 생각하면 이 따분한 시간들도 제법 견딜 만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는 내내 잊을 만하면 죽은 황제에 대한 생각이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쉬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황제가 죽었다. 에드윈이 직접 목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화를 듣는 것처럼 멀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녀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들을 듣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한 번 놀라고,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에 두 번, 그 일들을 주도한 게 에드윈이라는 사실에 세 번 놀랐다.

상처가 아물 새가 없었을 것이다. 에드윈은 무리한 것이 맞았다. 말만 들어도 사람의 피를 말리는 빠듯한 일정이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엘란츠 성에 돌아온 후 그대로 앓아누워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나디아를 안심시킨 것은 타샤였다.

“몸살입니다. 푹 쉬면 저절로 나을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냉정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그리 말했다. 터무니없는 걱정이라는 듯 찬바람이 쌩 부는 어조에 나디아는 외려 안심이 되었다.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타샤의 말에 깊이 동감했다.

아무리 그녀 역시 거동이 여의치 않다고는 하지만 아내 된 도리로 남편의 간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웅얼거리는 나디아의 말을 단칼에 잘라 낸 것 역시도 타샤였다.

“환자가 환자를 돌보겠다고요? 옆에서 쓰러져서 일을 두 배로 늘리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채 손안에 쥔 둥근 돌을 매만지는 나디아를 보며 타샤가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타일렀다.

“최근 큰일이 많았지만 각하께서는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그러니 귀부인께서는 스스로의 회복에 좀 더 집중하시는 게….”

“마님, 식사하세요.”

문이 스르륵 열리는가 싶더니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던 수잔이 아차 한 얼굴로 멈춰 섰다.

“아, 마법사님…. 나중에 올까요?”

“아닙니다. 가려던 참이었어요.”

빛이 사그라든 돌을 받아 간 타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십시오. 식사 남기지 마시고요.”

방을 나서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디아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수잔의 시중을 받아 이른 점심 식사를 했다. 물에 가까울 만큼 묽은 수프였던 음식은 차근차근 바뀌어 갔다. 농도 진한 수프에서 건더기를 부드럽게 푹 익힌 스튜로 넘어간 게 어제였다.

나디아는 스푼을 들고 조심스럽게 스튜를 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팔이 부들부들 떨려서 도무지 음식을 흘리지 않고 먹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하녀들이 음식을 떠먹여 주는 것을 얌전한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어야 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식사를 끝마치고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챙기는 약을 먹었다. 그 후엔 하녀들이 들어와 나디아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처음엔 죽을 것같이 일던 근육통도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별다른 일 없이 또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타샤가 예상했던 것처럼 에드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름이 다 되어 가도록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과는 참으로 다른 속도였다.

에드윈은 피곤하고 수척한 안색으로 찾아온 게 언제였냐는 듯 멀끔한 얼굴이었다. 나디아의 방으로 침입한 그가 그녀의 낯빛을 살피며 마법사에게 물었다.

“이젠 움직여도 괜찮겠지?”

“괜찮습니다.”

나디아는 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결정된 사항에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얇은 실내복을 입고 있던 그녀의 어깨 위로 두꺼운 망토가 내려앉았다. 에드윈은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셈인 듯했다.

침대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던 날이 며칠이던가. 딱 한 번, 발을 내딛었다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고꾸라졌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녀가 걷지 못한다고 호소할 짬도 없었다. 에드윈은 앓고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단번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시야가 확 높아졌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 그의 목덜미를 답삭 끌어안았다.

“에, 에드윈….”

“식사는 온실에서 하지.”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이마에 습관처럼 입술을 꾹 누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 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착착 진행된 일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당신이 잠들어 있던 사이에 봄이 왔어.”

“뭐라고요?”

“아직은 좀 춥지만.”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남자는 순식간에 온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미지근한 열기와 함께 습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기는 에드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당장 죽어버릴까 봐 무서울 만큼의 부상을 입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나디아는 그의 뒤통수를 더듬었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한 흉터가 만져졌다. 그녀는 손을 떼고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은 손끝을 응시했다. 엉뚱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안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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