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침착하게 홀로 남아 나름대로의 추론을 해 보려 해도 머릿속이 뒤엉키기만 하고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디아가 결국 누구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며 생각을 정리했을 때 고요를 뚫고 뛰어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몇 번쯤 겪었던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년도 안 되는 시간이 얼마나 다사다난했는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온 것은 수잔과 몇몇 하녀들 그리고 마법사였다. 낯선 마법사 셋이서 테이블 위에 가져온 것들을 늘어놓고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귀부인. 저는 카일이라고 합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그냥… 괜찮은 것 같아요.”
목이 깔깔하긴 했지만 이전만큼 소리를 내는 게 괴롭지는 않았다. 검은 머리의 남자 마법사가 나디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축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손톱을 면밀히 살폈다.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나디아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오래 누워 계셔서 그렇습니다. 일단 약을 좀 드시고….”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나디아는 군말 없이 약을 마셨다.
맛은 끔찍했다. 꾸역꾸역 약을 삼키고 눈을 질끈 감자 하녀 아이 하나가 입 안에 사탕을 넣어 주었다.
“아직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이 놀랄 수 있으니까요.”
마법사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아래쪽 이불을 걷어 올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붙잡는 감각이 느껴지고 마법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디아는 그들이 보는 다리가 율리안이 쏜 화살에 맞았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화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이 심각했던 탓에 그녀의 마음까지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마법사가 몇 번인가 손끝으로 다리를 꾹꾹 누르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마법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좀… 뜨끔, 하고….”
웅얼거리는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마법사들은 또다시 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잠자코 있던 나디아는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저기, 여기 엘란츠 성인가요?”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카일이 서둘러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귀부인께서 오래 잠들어 계셨습니다. 심한 부상을 입으셨고, 몸이 회복하기 위해….”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 얼마나 오래길래 럼코르바에서 엘하임까지 올 수 있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법사가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었지만 오래 깨어나지 않으셔서, 각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에드윈이요?”
뒤늦게 그에게 생각이 미쳤다. 잠들기 전, 그가 죽을까 봐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나디아는 그의 창백한 얼굴과 경련하던 손을 떠올렸다.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걱정했다는 걸 보면 거기서 죽어 버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어디 있어요?”
걱정했다더니 그녀가 깨어난 지금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혹여 그에게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각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착이라니…?”
“이틀 전, 수도에서 출발하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어리둥절한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타샤.”
아주,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엘란츠 성을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봤던 미소가 어찌나 위태롭던지. 도피행 내내 그녀를 걱정했었다. 성안 사람 중 누군가 죽기라도 했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창백한 타샤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냉정한 인사를 주고받은 남자 마법사들이 우르르 나가자 타샤가 흐느적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다 끝났습니다. 약 보름 전에 퀘른에서 전 황제의 처형식이 있었습니다.”
침대 옆의 간이 의자에 앉은 마법사가 나디아의 손에 동그란 돌을 쥐여 주었다. 뜨끈한 온기 같은 게 몸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디아는 입 안에서 콩알만 해진 사탕을 와작 씹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에드윈도 그녀 못지않게 다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수도까지는 또 어떻게 간 건지.
“각하께서 전 황제의 목을 벴고,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이 사흘 전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나디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율리안이 죽었다고? 그녀의 머릿속에 공포로 남아 있는 얼굴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쉬이 믿기 어려웠다.
잠든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세상이 뒤바뀐 것만 같았다.
나디아가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타샤의 앙상한 손이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눈짓하자 하녀들이 나디아의 사지에 하나씩 달라붙었다.
자그마한 손들이 팔다리를 주무를 때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괴로움에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윽…. 그럼, 그러면 에드윈은 괜찮은 건가요? 나는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지….”
“37일입니다.”
꼬박꼬박 날을 세어 왔다는 듯 타샤의 입에서 막힘없이 답이 나왔다. 나디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다면 이렇게 온몸이 쑤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군요.”
에드윈은 괜찮고 그녀도 무사히 깨어났고, 또한 복잡했던 일들이 잘 마무리되었다면 괜찮은 것 같았다. 이제 더는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겠지.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그게 다인가요? 별다른 일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을 꺼내던 나디아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하녀들의 어두운 얼굴과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는 타샤의 얼굴을 보자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귀부인.”
나디아는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왜 그래요. 불안하게….”
“잘 들으십시오. 귀부인께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마법사가 다시 한번 목울대를 울렸다.
“걷는 게 힘드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잠시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여기며 기다렸던 나디아는 정정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자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못 걷는다는 말이에요?”
“아뇨, 그게 아니라… 다리를 절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상처도 예사가 아니었는데 그 후에, 상당히 무리하셨던 것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다리를 내려다보던 나디아는 오래지 않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원인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 그때 절벽 위에서 스쳐 지나갔던 율리안의 화살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제법 깊었지만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아픈 줄도 모르고 무리를 했다. 물속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을 잃은 건장한 남자를 끌고 죽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숲 속을 헤맸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이….”
“알고 있습니다.”
타샤가 급하게 대답했다. 차가운 손이 뻗어와 나디아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항상 냉락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디아는 그것이 영구적일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마법사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차갑게 변한 동그란 돌을 회수해 간 타샤가 새로운 돌을 나디아의 손에 쥐여 준 뒤 방을 나갔다.
또 다른 하녀가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약한 음식 냄새가 났다. 아주 묽은 수프를 몇 스푼 떠먹은 뒤 그녀는 하녀들에게 떠밀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팔다리를 주무르는 손길을 받고 있자 몸이 나른해졌다.
***
에드윈이 엘하임에 도착하기까지 사흘쯤 남았다. 그동안 나디아는 꼬박꼬박 약을 먹고, 하녀들의 안마를 받고, 또 천천히 식사량을 늘려 가며 회복에 전념했다. 갓 태어난 망아지의 것처럼 후들거리던 팔에 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건 제법 큰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조만간 걷는 연습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참이었다. 누워 있는 동안 근육이 약해져서 다리가 멀쩡했더라도 걷기 힘들 거라는 이유였다.
오른쪽 다리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지만 여전히 진료를 보러 온 마법사들이 꾹 누르면 콱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그들은 치료법을 계속해서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거의 체념하고 있었던 나디아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진 대가가 다리를 좀 저는 정도라면 감내할 수 있었다. 성안에만 살았던 시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에드윈의 귀환 일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그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던 마음이 슬슬 두려움으로 변화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와 아실 중에 누구를 고르겠냐던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에드윈이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상황이 참 묘했다. 에드윈은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이었고 제국법상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끝날 일에 왜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을까?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깨달음이 그녀를 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그때였다.
뿌우우…. 길게 꼬리를 끄는 코펠 소리가 들렸다. 침략을 알리는 것도, 귀빈의 방문을 알리는 것도 아니었다.
영주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