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나디아는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만큼 생생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현실이길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에서 그녀는 범부의 아내였다. 누군가의 아내라는 처지는 지금과 다를 바 없었지만 꿈이라서인지 나디아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를 탓하는 말도, 가슴을 아프게 옥죄는 걱정거리도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게 너무도 달콤했다.
텃밭이 딸린 아담한 오두막에서 일과를 시작한 그녀는 언젠가 상상했던 것처럼 밭의 채소를 돌보고 닭 모이를 줬다. 그리고 햇볕이 잘 드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바느질거리를 한줌 끌어안았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그녀의 금발을 흔들었다. 늦봄의 바람은 따뜻해서 자꾸만 하품이 나왔다. 해가 기울어 산머리에 걸릴 때쯤이면 얼굴을 알 수 없는 남편이 돌아왔다.
“마리아, 별일 없었지?”
“응, 별일 없었어.”
나디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남편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고, 그녀는 바느질거리를 정리해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다 눈에 들어온 굴뚝이 잠잠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녁 준비를 해야지.”
나디아는 호들갑을 떨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나디아가 간단한 스튜를 만들기 시작하면 남편은 그 옆에서 빵을 구웠다.
비슷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일찍 일어나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면 남편은 일을 떠났고, 나디아는 홀로 집에 남아 일거리를 찾았다. 충실하고도 평화로운 하루하루였다. 단조로운 행복이란 이런 거겠지.
뜨개질을 하던 그녀의 머릿속으로 슬슬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 소름이 등줄기를 내달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낯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아직 바람이 차가운가 보다 여기며 겉옷을 하나 더 걸쳤다.
남편은 다정했고 힘든 일도 없었다. 오래전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에 등장하던 전원생활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와 이런 삶을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나디아가 희미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어째서 남편의 얼굴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늘 무심코 지나쳤던 거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때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매만졌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선 채로 낯선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남편이 다가왔다.
“마리아, 왜 그래?”
마리아? 그게 누구지?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아가 누구야?”
남자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치는 거지? 이번엔 재미있었어.”
그녀는 웃으며 멀어지는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또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멍하니 입을 벌린 그녀는 뒤이어 떠오른 의문에 충격으로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이름이 뭐였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게 되어 버리자 일상은 혼란에 휩싸였다. 밭을 돌보거나 빨래를 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등,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해 왔던 모든 일들이 낯설었다.
‘내가 이런 걸 할 줄 알았던가?’
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면 그동안은 어떻게 했던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규칙적이었던 일상이 어그러지기 시작하자 계절도 변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늦봄의 햇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고 거센 바람이 자그마한 오두막을 뒤흔들었다.
유쾌하고 다정했던 남자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변하기 시작했다. 집안일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탓에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엉망진창인 식사를 해야 할 때, 텃밭의 잡초가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모습 따위를 볼 때마다 폭언이 쏟아졌다.
“게으르긴. 대체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오늘도 엉망진창이군.”
“닭이 너보다 더 부지런하겠어.”
“계속 이따위로 굴면 쫓아내겠어.”
다정했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를 다시없을 천덕꾸러기로 매도하곤 했다. 나디아가 이 삶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변한 남자의 태도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남편으로부터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알 듯 모를 듯 익숙한 무언가가 나디아의 추격을 피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빨갛게 언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얼음장 같은 물에 어설프게 빨래를 하던 나디아는 무심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에드윈. 그래, 그녀의 남편 이름은 에드윈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잊고 있던 사실들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배회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자각은 아주 뒤늦게야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녀가 자각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온한 전조가 몰려왔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 번개가 몇 번이나 번쩍거리고 세상을 뒤흔드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그 광경을 올려다보던 나디아의 몸이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나고, 익숙하다 생각했던 낯선 풍경들이 흐릿해졌다.
눈꺼풀 사이를 파고드는 빛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아주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며칠인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몇 년, 몇십 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눈을 몇 번 깜빡여 뿌옇던 시야를 맑게 한 그녀는 눈물 나게 그리운 곳의 모습을 한 천장을 노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낯익은 천장화와 침대 기둥에 새겨진 꽃 넝쿨 조각, 길게 드리운 휘장은 물론이고 광택이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실크로 뒤덮인 침대까지. 착각이 아니라면 여기는 엘란츠 성에 위치한 그녀의 방이었다.
제대로 일어나 주위를 살피고 싶었지만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철제 도구처럼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으….”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대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버린 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바짝 말라 있던 목구멍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녀는 이 이상의 소리를 흘리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눈만 데굴 굴려 목격했던 풍경을 다시 눈에 담았다.
창밖으로 석양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참이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게 또 다른 꿈이라 판단했다. 몸이 고된 생활에 지쳐 이 안락함이 너무도 그리웠던 탓이겠지.
분명히 럼코르바 외곽의 숲 속에서 에드윈과 함께 있다가 그의 설득에 못 이겨 눈을 붙이려 했었는데. 그런데 잠을 좀 자고 일어났다고 해서 엘란츠 성에 있을 그녀의 방에서 깨어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곳을 떠나 럼코르바 깊은 숲 속의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걸렸던 시간을 생각해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긴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쉽지만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에드윈도 걱정이었고, 아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일들이 마무리되었는지, 모두가 무사한지.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던 나디아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설마 내가 죽은 건 아니겠지?’
사후세계 같은 건 믿지도 않으면서 우스운 추측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냈다. 얌전히 눈을 감고 있기를 수 분, 곧 잠에서 깨어나 피곤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마주할 각오를 했던 게 무색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희미해진 괴상한 꿈에서 깰 때처럼 몸이 쑥 꺼지는 듯한 감각도 들지 않았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날씨가 변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밝아지는 게, 석양이 아니라 아침 해가 떠오르던 중인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끙끙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으, 아파….”
약을 먹기 전 그리고 잠들기 전 느꼈던 것 같은 고통은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누워 있었던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과 저릿함이었다. 왜 이렇게 아프지? 왜 통증이 느껴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의 꿈속에서는 감각이 이렇게까지 선명하지 않았는데.
꿈속에서는 모든 감각이 마치 옷 위를 스쳐 지나가는 강아지풀처럼 어딘가 멀게 느껴지곤 했었다. 사실 지금은 꿈이 아닌 거 아닐까?
당장 침대를 박차고 나가 성을 돌아다니며 하녀건, 기사건, 에드윈이건 모든 게 제가 기억하던 그대로인지,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운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들어오지 않으려나, 막연히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방 안에 깔려 있는 두툼한 양탄자가 발소리를 모두 흡수했다. 탁, 하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와 출렁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이제 휘장 밖에 선 인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 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자 휘장을 걷던 손이 멈칫했다. 커다랗게 뜨인 암갈색 눈이 나디아를 응시했다. 하녀의 숨이 거칠어지더니 눈동자 위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호들갑을 떠는 대신 서두르기 시작했다.
“마, 마님. 몸은 좀, 아니 기분은… 물을 드릴까요?”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이 침착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물을 따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넓은 침대 한편에 앉은 하녀가 나디아의 어깨를 끌어안아 몸을 일으킨 뒤 입가에 잔을 대어 주었다. 감질날 만큼 찔끔찔끔 들어온 미지근한 물이 바짝 마른 혀를 적시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반쯤 채운 물 한 잔을 다 비운 나디아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다시 누웠다. 어차피 몸을 움직일 기운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오래 자고 일어난 탓인지 더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저,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후다닥 뛰어나가는 하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디아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지긴 했지만, 왜 그녀가 엘란츠 성에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잔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그녀의 당황에 나디아도 휩쓸려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