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에드윈의 화를 돋우고 싶었던 거라면 성공이었다. 나디아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말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감각을 선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졌던 탓인지 감정이 뜻대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겨우 이런 도발에 화가 날 필요도 없는데. 에드윈은 사납게 웃으며 애송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아내를 버리길 바란 거라면 안됐군. 한 번도 넘어갔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잠시 그의 말을 곱씹던 쿠르쉬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에드윈은 삼류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비열하게 웃었다. 아직 모두 풀리지 않았던 피로 탓인지, 혹은 조금 전 광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에드윈은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널 왜 살려 두고 있을까? 뒷배도 없는 평민 출신 기사 하나 죽여 없애는 건 일도 아닌데. 응?”
그가 꽉 쥐고 있던 기사의 몸이 긴장으로 굳는 것이 느껴졌다.
실로 그러했다. 붉은 가시 기사단의 단장은 과연 대단한 자리였지만, 최근 몇 년간 평화로웠던 제국에서 위명을 떨칠 만한 활약을 하기도 어려웠던 탓인지 그뿐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드윈의 휘하에 있던 기사단이었으니 단장의 목을 치고 새 단장을 세운다 한들 막을 수 있는 사람도, 막을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이지 않겠다고 정했으니 무슨 말을 더 하더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내 관대함에 감사하도록 해.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에드윈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던 손을 떼어 냈다. 쿠르쉬드의 어깨 부분의 옷에 잔뜩 구김이 남았다.
“이제 슬슬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자각하도록 해.”
에드윈은 간신히 버티고 선 쿠르쉬드의 마음을 무너트릴 말을 알고 있었다.
“괜한 오기로 사랑한다던 여자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칼에 찔린 듯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뱃속을 깊게 울리는 만족감에, 그제야 에드윈은 여유를 되찾아 비웃음을 띨 수 있었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에 있어서는 감사를 표하지. 네놈이 지금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도 그 덕인 줄 알아.”
기사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등 뒤에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통이 일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렸는지 시시때때로 그를 못살게 굴었다.
에드윈은 습관처럼 품 안에 손을 넣어 약병을 꺼냈다. 쓰디쓴 약을 입에 털어 넣은 채 술을 찾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크리스털 병에 든 값비싼 브랜디를 물처럼 들이켰다. 알코올이 흘러내려가자 식도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구름처럼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은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바로 조금 전 일어난 일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느릿하게 약 기운인지 술기운인지 모를 것이 돌기 시작했다. 차라리 잠이 쏟아졌으면 했다.
홀가분해야 할 마음이 어쩌면 이리도 복잡하기 그지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괜히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쯤 엘란츠 성의 화려한 방에서 푸른색 실크에 파묻혀 자고 있을 자그마한 여자가 그리웠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으면 은은한 꽃향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계절마다 공들여 관리하는 후원과 화원에 피어난 갖가지 꽃. 때로는 백합이기도 했고 때로는 수선화, 목련, 푸른 수국, 흰 아네모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귓불과 목덜미에 입 맞추면 흠칫 놀라 움츠러들던 몸짓을 기억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고 싶어.’
에드윈은 제가 떠올린 생각이 우스워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느새 안식처가 되어 버린 여자의 환상이 그의 품 안에 깃털처럼 살며시 내려앉았다. 에드윈은 그 감각을 놓칠세라 눈을 질끈 감으며 품 안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
율리안의 처형 후 바로 엘하임으로 내려가고 싶었던 에드윈의 계획은 라슬로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을 셈이냐며 의뭉스럽게 건네 온 말에 어그러져 버렸다.
“참석하지 않으면 라펠트 후작이 시끄러울 거야.”
라슬로는 충분히 그의 편의를 봐주곤 했다.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면전에서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라슬로의 말처럼 라펠트 후작이 또다시 건방지다며 붙잡고 늘어지면 귀찮아질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고집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훌륭히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대관식을 생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드윈 또한 제국의 귀족으로서 참석하는 게 의무였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했던 일정을 최대한 당기고 당겨도 대관식 준비 기간은 보름을 넘어갔다. 초조하게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라는 동안 에드윈은 엘하임으로 똑같은 질문을 담은 서신을 세 번 보냈고, 똑같은 대답이 적힌 종이쪽지가 돌아온 것도 세 번이었다.
그가 가장 궁금해한 소식은 나디아가 무사히 깨어났는지, 그녀의 몸 상태는 어떤지였다. 그사이에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느라 귀환이 늦어질 거라는 이야기와 붉은 가시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엘하임으로의 귀환 시 그를 수행하기 위한 기사단을 보내라는 말은 매우 간략하게 전해졌다.
며칠의 간격을 두고 오고갔던 서신은 모두 나디아가 깨어나지 못했음을 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잠들었던 날로부터 지난 시간이 얼만데. 에드윈은 속으로 날짜를 셈했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깨어나지 못했다고? 순식간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내려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사이 기사단의 배속은 무사히 끝났고 붉은 가시 기사단은 엘란츠 후작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아실 쿠르쉬드가 단장직을 내려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모양이지. 에드윈은 그 소식을 마지막으로 제 손을 떠난 일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대관식 전날, 라슬로가 에드윈을 찾아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사람이 직접 행차했다는 사실에 에드윈은 의아했다.
“바쁘신 줄 알았습니다.”
“바빠.”
실로 그러했다. 내내 서두르는 기색이다 싶더니, 손님 대접을 위해 차를 내어오라 하려던 에드윈의 모습에 라슬로가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차 마실 시간 없네. 오늘 온 건 전해 줄 게 있어서야.”
라슬로의 뒤를 따라온 시종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길쭉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라슬로가 찾아온 용건을 알 수 있었다. 저게 전해 준다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사람을 시켜 보내도 됐을 텐데 직접 오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이 머무는 것을 흡족한 낯으로 보던 라슬로가 제법 설레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손짓했다. 불혹을 앞에 둔 남자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게 우스웠다. 우윳빛 상자를 든 시종이 에드윈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열어 보게.”
“이게 그겁니까?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선물.”
“그래. 얼른 열어 보래도.”
그는 황제의 재촉에 못 이겨 손을 뻗었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은제 걸쇠를 잡아당겨 푼 손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젖혔다.
에드윈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새하얀 지팡이가 빛을 반사했다.
“어때?”
에드윈은 대답 대신 짙은 보라색 벨벳 쿠션 위에 놓인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상아로 만든 지팡이의 손잡이인 부드러운 곡선 부분부터 시작된 장미 넝쿨 조각이 길게 쭉 뻗은 몸체를 따라 빙글빙글 감으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에드윈이 지팡이를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곳곳에 박혀 있는 자수정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아름답군요.”
“다행이군. 엘란츠 부인의 일은 다시 한번 유감일세. 다리에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지. 혹시 몰라 준비해 봤는데 그녀의 마음에 든다면 좋겠군.”
흡족한 얼굴을 한 라슬로가 점잖은 체하며 말을 이었다. 에드윈은 그 말을 들으며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떠올렸다. 요즘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의 범위가 얕았다.
에드윈은 굳은 표정으로 라슬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에드윈의 얼굴이 딱딱해진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 관대하게 넘어갔다. 에드윈은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아름다운 지팡이가 다시 화려한 상자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내일 대관식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 생각인가?”
“네.”
“그럴 것 같았어. 알겠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서신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은 깨어났느냐고. 엘란츠 성에 기거하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끌고 와 다그치고 싶기도 했다.
왜 깨지 못하는지 묻고 어떻게 해서든 다리를 고칠 방법을 찾아내라고 닦달하고 싶었다. 수도에 발이 묶이지만 않았어도 진작 그리했을 일이었다.
에드윈의 대답에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던 라슬로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자네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모습, 낯설군.”
“그렇습니까.”
“나쁘진 않아.”
짧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황제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바쁘다던 말이 엄살이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달라붙은 시종이 다음 일정을 읊고 라슬로가 엄살을 부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에드윈을 수행하기 위해 엘하임에서 올라온 기사들은 수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다시 엘하임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들은 익숙한 듯 짐을 꾸리는 것을 도왔고 수도를 떠날 준비는 순조롭게 끝났다.
대관식은 사흘 동안 이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행사는 첫날 모두 끝날 것이다. 그가 빨리 내려가고 싶어 한다는 걸 라슬로도 이해해 주고 있었으니 에드윈을 막을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