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의 신경을 거스르곤 하던 골칫덩이를 이 기회에 털어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사단을 내어놔야 한다는 사실도 마냥 손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버티다가 라슬로의 머릿속에 위협을 심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일을 끝으로 황가와 엮이는 일이 없길 바라는 입장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죠.”
에드윈이 생각하는 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죽어도 내어놓지 않겠다고 버텨 엘란츠 후작을 안일하게 대하고 있는 라슬로가 경각심을 가지길 바랐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 가시 기사단을 내어 드리죠.”
라슬로 역시 꽤나 놀란 듯 보였다. 눈을 크게 뜬 채 에드윈을 바라보던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 한 번에 경직된 회장의 분위기가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큰 걸 내놓으라고 할 걸 그랬군.”
“이제 가도 됩니까?”
에드윈이 뻐근한 눈두덩을 손끝으로 누르며 말했다. 눈에 띄게 피곤해하는 모습을 본 라슬로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군. 방을 준비해 뒀으니 가서 쉬게.”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는 에드윈의 몸짓을 따라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그는 귀족들을 뒤로한 채 회의장을 나섰다. 예상보다 큰 충돌 없이 끝났지만 그럼에도 피로감은 여전했다. 처형이 끝나면 바로 엘하임으로 돌아가야지.
가능하다면 퀘른에는 다시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북부 귀족들의 경계도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다. 황좌는커녕 황궁까지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그 자리를 노려서 뭐한단 말인가? 그는 비웃음을 숨기지도 않은 채 텅 빈 복도를 걸었다.
***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별다른 할 일도 없었던 에드윈은 부상을 입은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대륙을 가로질러야 했던 몸을 쉬게 하는 데에 집중했다. 당장 몸살로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운 좋게도 억지로 버티다 앓아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형 당일 황궁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처형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 며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것이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드넓은 광장이 전 황제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에드윈이 도착하자 그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미 율리안을 추적해 생포한 엘란츠 후작의 공로에 대한 소문이 수도를 한 바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어쩌면 라슬로는 황제보다 이야기꾼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펠트 후작이 들었다면 뒷골을 잡고 쓰러질 만한 생각을 하며 에드윈은 차분히 걸었다.
영광의 홀이 무너진 일로 신이 노하셨다든가, 황권에 도전하려 드니 그런 꼴이 나는 거라며 비웃던 여론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방금 한 말을 기억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쉬이 뒤바뀌는 면면이 우스웠다.
에드윈을 본 라슬로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늦지 않게 도착했으나 황제는 그보다도 일찍 도착해 있었다. 어쩌면 조급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인지도. 형제의 죽음을 관전하러 온 남자의 얼굴은 묘한 희열로 번들거렸다.
“시작하지.”
그 명령을 기다렸던 것처럼 병사들이 죄인을 수송해 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몰골을 한 율리안이 비척거리며 끌려오고 있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죽지 않을 만큼만 주어지는 약으로 연명하며 금단 증상을 겪었던 그의 모습은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초라했다. 에드윈은 침음을 삼켰다.
누군가 돌을 던졌다. 율리안의 지저분한 금발을 치고 떨어진 돌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시체처럼 끌려오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핼쑥한 얼굴에 박힌 새파란 눈만이 소름 끼치도록 희번덕거렸다. 그를 향해 야유를 퍼붓던 군중이 일순 침묵했다.
병사들이 율리안을 재촉했다.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비척거리며 움직였다. 저리 초라한 몰골을 한 자에게 압도되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기라도 한 듯 잦아들었던 야유와 욕설이 이전보다 더 거세게 들끓으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올라온 몸이 거침없는 병사들의 손길에 못 이겨 무릎을 꿇었다.
에드윈은 이제야 한 번쯤 율리안을 만나러 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가 사과를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사 사죄한다 해도 마음이 풀릴 일은 없었다. 아마 더 화가 나면 났겠지.
하지만 가슴을 들끓게 하는 강렬한 분노의 이면에 가려진 감정의 찌꺼기를 어떻게든 털어 낼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늦어 버렸지만.
시종 하나가 길게 늘어진 양피지에 적힌 죄목을 끝도 없이 읊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죄명이 길어질수록 성난 군중의 고함 소리도 커지기만 했다. 죽여라! 죽여! 죄를 읊는 목소리가 길어질수록 누구도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에드윈은 긴 숨을 뱉어 내며 황가에서 준비한 검을 받아 들었다. 바닥에 못 박혀 있던 율리안의 시선이 에드윈의 발치에 닿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홀쭉한 볼과 지저분한 금발, 탁하게 흐려진 푸른 눈이 에드윈의 얼굴 위를 정처 없이 헤맸다. 조금 전 목도했던 소름 끼치는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에드윈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성난 군중들의 고함 소리 탓에 제대로 율리안에게 닿기는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되풀이할 정도의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해.”
“뭐라고?”
율리안의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었다. 믿을 수 없어서 되물은 것이었다. 에드윈의 눈이 흔들렸다.
“…미안해.”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황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바짝 굳은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보던 율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발작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드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까지 그를 농락하는 모습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에게 죽음이 안식이 되리라는 것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틈이 없었다.
에드윈은 고개를 들어 라슬로를 바라봤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신호로 단단히 움켜쥔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날을 위해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단번에 사람의 목을 쳐 냈다. 웃음소리가 뚝 끊어지고 피가 솟구쳤다. 한순간이었다. 고작 몇 초. 그 짧은 시간이면 빼앗을 수 있는 목숨이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몸과 분리된 율리안의 머리가 단상 위에 피를 흩뿌리며 굴러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이 허물어지고,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며 흩어진 금발에 피가 엉겨 붙기 시작했다.
그 모든 광경이 제 손으로 행한 일로 벌어졌음에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눈앞에 섬세한 유화가 펼쳐진 것 같았다. 에드윈은 숨을 몰아쉬며 빛을 잃고 흐리멍덩해진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검날로 옮겨 갔다.
마냥 통쾌하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그가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동안 침묵에 잠겼던 광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식어 가는 율리안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사실 율리안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그와 닮은 남자로 바꿔치기한 게 아닌가? 기대했던 만큼의 감흥이 없자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달려들어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잡아챘다.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이 몰려 있다든가 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를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그의 손이 피로 젖은 지저분한 머리를 더듬으며 정말 이게 율리안이 맞는지를 재확인했다.
손이 끈적하게 젖어 들었다.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얼굴이 손 아래에 만져졌다.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의 최후가 이렇게도 허무하다니. 에드윈은 몇 번이나 대상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게 다였나?
율리안이 아무리 끔찍했더라도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그는 허무함을 감추지 못한 채 머리를 대충 집어 던지고 단상을 내려왔다.
시종이 피 묻은 검을 받아 들고 물에 적신 수건을 내밀었다. 손을 닦아도 피비린내는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간 채 돌아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두통이 일었다.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가로지르던 에드윈은 입고 있던 망토 자락에 핏자국이 점점이 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코끝을 맴도는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는 게 이것 때문인가. 그는 망토를 벗어 지나가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버려.”
그에게 감도는 피 냄새를 맡은 시종은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거침없던 에드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배짱 좋게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붉은 가시 기사단 단장을 맡은 애송이, 아실 쿠르쉬드였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 술을 들이붓고 싶었지만 에드윈은 멈춰 선 채 관대하게도 기사가 용건을 말하길 기다렸다.
그가 계획했던 가장 큰일을 하나 매듭지은 지금, 이 주제조차 모르는 애송이와의 우습기 짝이 없는 신경전마저도 끝낼 때가 도래한 것이었다. 에드윈은 피 냄새가 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쿠르쉬드가 제 앞을 막아서고 할 만한 말은 뻔했다. 기사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의 녹색 눈은 들끓는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계획하신 겁니까?”
“겨우 생각한 게 그런 건가?”
에드윈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기사단의 거취를 넘긴 이유를 따지러 온 모양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주제 파악을 하라고 말했지만 쿠르쉬드는 여전히 환상 속을 헤매는 중인 듯했다. 나디아와 쿠르쉬드 사이에 모종의 진전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단둘이 도피행을 보낸 탓인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쿠르쉬드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디아를 지켰다. 에드윈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그리했을 거라는 사실은 신경에 거슬렸지만.
“영광이라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닌가?”
에드윈은 멈췄던 걸음을 옮겨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널 내 여자에게서 떼어 놓기 좋은 기회였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지.”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그를 꽉 붙잡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 몸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었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 놈이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니, 지켜야겠지.
“언제까지 기어오를 셈이야? 내가 봐주고 있는 거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 테고.”
쿠르쉬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쯤에서 주제 파악을 하고 물러났다면 좋았을 것을. 그동안 제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더니, 무슨 생각인 것인지.
어쩌면 나디아와의 마지막을 예감했는지도 모르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부인과 밤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