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93화 (93/115)

93.

그들이 엘하임에 가까워졌을 무렵,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예상대로 르네일에서 보냈던 서신에 대한 라슬로의 답이었다. 율리안을 살려서 수도로 데려오라는 말에 잠시 곤란한 얼굴로 마차를 돌아보던 에드윈은 이윽고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처음부터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율리안을 살려서 데려올 것을 강조하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약속을 쉬이 어길 만한 사람은 아니니 무언가 뜻이 있겠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나디아를 두고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상태가 호전 중이라고는 해도 엘란츠 성을 코앞에 두고 굳이 수도로 가는 여정에 환자를 끼워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느릿하게 성문이 열렸다. 알키드의 습격이 있은 후, 일부러 보수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성벽의 모습은 영민(領民)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딱 좋았다. 어쩌면 라슬로 황자가 이용하려는 게 이것일 수도 있겠군.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느긋하게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저분한 일들을 하루빨리 매듭지어 털어 내고 싶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드윈은 수행 기사단을 쿠르쉬드를 필두로 한 붉은 가시 기사단으로 교체한 후 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내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이번 일만 처리하고 나면 한가함에 몸부림칠 일만 남게 될 것이다. 한 달, 어쩌면 그 이상. 에드윈은 수도행에 걸릴 시간을 가늠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달이나….”

그는 제가 무엇을 아쉬워하는 건지 깨닫고 혀를 찼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

퀘른을 향할수록 기온은 더 떨어졌다. 칼바람이 두툼한 망토 사이의 틈을 호시탐탐 노려 댔고 때때로 진눈깨비가 비와 섞여 흩날렸다. 하지만 에드윈은 행군을 늦추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던 탓이었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불의 마석이 배급되자 강행군에도 불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절벽에서의 일 이후로 에드윈은 한 번도 율리안과 대면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율리안은 그의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 내내 심각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던 율리안이 쇼크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과 진통제를 구해 줘야 했다.

그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보고받으면서 에드윈은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우 이 정도였다니. 그의 인생을 통째로 쥐고 흔들던 자의 말로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고통받던 시간들을 우습게 만드는 일이었다. 에드윈의 기나긴 고민은 황가의 깃발이 휘날리는 퀘른 성의 입구를 통과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몹시도 추운 날이었건만 행렬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선두에 선 에드윈과 기사단의 문양을 알아보고는 환호했다. 어리둥절한 일행의 귓가에 환호 속에서도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에드윈은 피식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현재 알키드 국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 잔당들에게 바람을 넣어 엘하임을 습격하게 만들고 혼란한 틈을 타 나디아를 납치하려 했던 율리안의 계책이, 심지어 심증만 있을 뿐 율리안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실질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건만 라슬로의 입을 통해 제국의 몰락을 꾀한 일로 탈바꿈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겠지만 자극적인 소문은 날개가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거리낌 없이 욕하고 화를 쏟아 낼 대상이 필요할 뿐이었다. 여흥의 일종이었고, 이미 여론은 한 방향이었다.

“어서 오게, 엘란츠 후작.”

“폐하.”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황제는 라슬로였다. 그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도 당연했다. 이제 황제가 될 남자의 곁을 보필하기 위해 버티고 선 인물들과도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라슬로는 막 퀘른에 입성했을 때보다 조금 더 여위고 피로해 보였지만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황제의 관은 원래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에드윈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생략한 채 오는 내내 짐작했던 것을 확인받고자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공개 처형을 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네.”

라슬로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마치 그가 그리 물어 올 것을 짐작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저와의 약속은….”

라슬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에드윈은 입을 딱 다물었다.

“일단, 후작 부인에게 일어난 일은 유감일세. 황가의 일에 휘말린 셈이니 내가 사과와 위로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직 완성이 안 됐지만 자네가 돌아갈 때쯤엔 완성될 테니 부디 전해 주게.”

에드윈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라슬로의 뒤를 따랐다. 넓은 회랑에 다수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의 노고에도 감사하는 마음일세.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 회복할 시간도 없게 재촉해 미안하네. 알다시피, 황좌를 오래 비워 두어 좋을 것이 없지 않겠나. 대관식을 하기 전에 일을 빨리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지.”

라슬로의 손짓에 커다란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회의실의 내부가 드러났다. 가장 상석에 라슬로가 앉고 에드윈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반대편에 자리한 라펠트 후작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에드윈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대하듯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시종들이 차를 내어 왔다. 일부 귀족들이 간지럽게 무슨 차냐며 술을 내어 오라고 지껄이는 둥, 짧은 소요가 지나가고 상쾌한 향이 올라오는 뜨거운 박하차를 한 모금 마신 라슬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짐작했듯이 공개 처형을 집행할 생각일세. 그런 화끈한 이벤트가 인기거든. 명분은 충분하고, 내 권위를 세우기에도 좋지.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는 법이니. 물론 약속은 지킬 거야. 그러니….”

“처형인을 맡으란 말입니까?”

“이해가 빠르군.”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에드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그는 율리안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신하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연히 제 것이라 여겼던 자리를 빼앗긴 전적이 있는 라슬로는 전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약삭빠르게 굴었다.

엘란츠 후작이 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 역시 그에겐 흔들리지 않는 황권을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에드윈으로서는 딱히 이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해를 볼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좋습니다.”

짧은 고민 후에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새로이 황제가 된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처형 날짜와 사람을 보내겠다는 이야기 따위를 모두 들은 뒤,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한 에드윈이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폐하.”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조용하다고 여기던 참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라펠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죽치고 있던 남자에게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에드윈은 다시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라슬로에 대한 충심이 대단한 남자가 당장이라도 그의 태도를 건방지다고 소리를 지를 것처럼 입을 움찔거렸지만 가까스로 참았는지 노성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라펠트의 태도를 보면 아직도 에드윈을 제가 대놓고 면박을 주어도 담담히 웃는 얼굴로 넘겨야 했던 시절의 엘란츠 공자인 줄로 아는 것 같았다.

“저는 저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새로울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는 말이라 에드윈은 태연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한 박하 향과 꿀의 단맛이 입 안에 진득하게 남았다.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왔다.

그가 천천히 찻잔의 반을 비우는 동안 라펠트 후작은 라슬로에게 엘란츠 후작을 신뢰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 배신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뻔한 레퍼토리였다. 에드윈은 멍하니 천장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의 꽃잎을 세었다. 슬슬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하는지 상처가 있던 곳곳에서 저리는 듯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품 안을 뒤져 조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동그란 알약 몇 알을 씹어 삼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나른해지며 감각이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짖을 겁니까?”

에드윈의 말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탓인지 인내심이 빠르게 닳았다. 여태 조용히 참은 보람도 없이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늙으면 눈치도 없어지나….”

그동안 어떻게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삐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폭언이 쏟아졌다.

“간략히 합시다. 사람 피곤하게 왈왈거리지 말고.”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하자 이번만큼은 분을 참아 내지 못했는지 라펠트 후작이 탁상을 탕탕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뒷골을 잡고 넘어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건방진 자식. 언제까지 그렇게 마음대로 굴 수 있을 것 같나?”

“흠.”

에드윈은 오래전부터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늙은 귀족의 꼭지를 돌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동은 이런 때에 빛을 발했다.

“적어도 당신이 죽을 때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듯 두고 보던 라슬로가 뒤늦게 중재에 나섰다.

“…라펠트 후작, 결론만 말하게.”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라펠트가 에드윈을 맹렬히 노려보며 못다 한 말을 쏟아 냈다. 에드윈은 잔을 마저 비우며 약 기운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졸음을 견뎠다. 라펠트 후작의 기나긴 서두가 이끌어 낸 말은 결국 엘란츠가의 무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력한 기사단을 셋이나 차지하고 있는 건 지나친 불균형입니다.”

“그래서?”

라슬로가 규칙적으로 톡톡 탁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 황제의 얼굴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 보였다.

에드윈은 라펠트 후작이 어떤 말을 꺼낼지 알 수 있었다. 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이 든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최소 하나 이상의 기사단을 내놓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내가 변경백이라는 걸 잊었습니까?”

날카로운 말에 라펠트 역시 반응했다.

“나 역시도 그렇지.”

하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라슬로의 얼굴을 보며 에드윈은 새 황제 역시 라펠트의 생각에 동조할 것이라 짐작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영 터무니없는 요구는 아니었다. 황궁 소속이었던 기사단 하나가 율리안의 짓으로 반파되다시피 했으니.

에드윈은 공식적으로는 왕위 계승 서열 4위, 비공식적으로는 2위로 올랐다. 라슬로를 비롯하여 그의 측근들이 에드윈을 견제하려 드는 것도 납득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변경백이라는 위치인 만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보유한 것 역시 적지 않은 위협이 될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좋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황실 기사단을 늘리려던 참이었어.”

라슬로가 에드윈의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답을 내어놓았다. 잠기운을 털어 낸 에드윈이 둔하게 가라앉으려는 머리를 굴렸다. 라펠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미 보유한 세 기사단의 중요도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