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92화 (92/115)

92.

에드윈은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으나 정신을 차리니 들것 위였다. 무사히 발견된 모양이었다. 의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쌉싸래한 액체를 꿀꺽 삼킨 기억과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를 닦아 내는 기억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이었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양호했다. 숨 쉴 때마다 찾아오던 날카로운 통증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근육통처럼 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느릿하게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인지, 시간은 얼마나 지났는지, 율리안은 어떻게 됐는지 따위보다 나디아의 안위에 대한 걱정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스스로 자각하기 전까지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조를 보내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방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그가 누워 있던 방으로 들어오려던 낯선 얼굴의 마법사를 맞닥뜨렸다. 그가 입고 있는 두툼한 로브 귀퉁이에 아델라의 옷에 새겨져 있던 것과 같은 문양을 발견했다. 아델라가 무사히 그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 아내는?”

“벌써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됩….”

“내 아내는?”

그는 마법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두 번째 재촉마저 모른 척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옆방으로 이끄는 마법사의 뒤를 따라가며 그는 괜히 불길한 상상을 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머리를 비웠다. 미신 같은 건 믿지도 않는 주제에 꼴사나운 짓이었다.

마법사의 조심스러운 손길을 따라 문이 열리고 매운 약 냄새가 훅 끼쳤다. 그가 율리안의 화살을 맞았던 날, 그녀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불안해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침대가 관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새하얀 얼굴의 나디아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곳곳에 칭칭 휘감긴 붕대와 방 안을 온통 채운 진한 약 냄새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침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은 에드윈을 향해 마법사가 보고하듯 나디아의 상태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늑골이 부러져서 폐에 손상이….”

마법사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율리안이 어째서 나디아를 그렇게 해치려 애썼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지금 에드윈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들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지만 무리하실 경우 호흡을 힘들어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다리가….”

“다리가 왜?”

서슬 퍼런 기세에 마법사가 흠칫 놀랐다.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를 올리더니 차분하게 대답했다.

“부상을 입은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만.”

“…후유증이 남을 것 같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에드윈은 초조하게 팔걸이 위를 두드렸다. 이 마법사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마법사가 말한 ‘무리’가 어떤 일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저조해졌다. 강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잃은 그를 끌고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맸을, 그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 자신도 놀랐던 일이 만든 결과였다.

그 규칙적인 소리가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침묵을 깨는 문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침대가에 길게 늘어진 진녹색 시트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 것에 영원히 남을지도 모를 상흔의 원인을 제공한 게 율리안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리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신에게도.

“깨어났구나.”

“어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아델라의 걸음이 그의 앞에서 멈추고 그녀가 말을 걸어온 후에야 에드윈은 알은체를 했다. 그는 이제야 진작에 떠올렸어야 했을 의문을 끄집어냈다.

“율리안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하에 처박아 뒀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아델라가 찬바람이 쌩 불 정도로 냉랭한 얼굴로 씹어뱉듯이 대답했다. 선황을 쏙 빼닮은 율리안에게 유감이 많았을 텐데 단번에 죽여 버리지 않았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것처럼 율리안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목숨은 붙여 놔야 할 것 같아서 최소한의 치료를 해 줬는데 당장 목을 뜯어 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내게 고마워하도록 해.”

그녀가 속사포처럼 쏟아 내고는 에드윈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법사를 향해 약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에드윈은 마법사가 은잔에 담아온 약을 아무 말 없이 받아 마셨다. 잠시의 침묵 후 아델라가 잠든 나디아를 지켜보다 나직하게 덧붙였다.

“네가 여자를 구하러 사지로 뛰어드는 멍청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잠든 여자의 얼굴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이불 속을 파고들어 힘없이 늘어진 손을 붙잡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델라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손을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하니?”

입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머쓱한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신기하잖니.”

아델라가 킬킬 웃었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작 그의 어린 시절에 이런 짓궂은 질문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이윽고 웃음소리가 멎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떠나거라. 럼코르바 국왕이 협상의 결렬을 불쾌해해.”

“누가 오래 머물고 싶답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앞마당이나 잘 관리하라고 하십시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날이 선 말투에 아델라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짐작했었던 것처럼 라슬로는 럼코르바 측에서 제안한 혼인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불가침조약 역시도.

럼코르바가 드넓은 대해를 사이에 둔 제국의 침략을 걱정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원래 목적은 혼인 동맹이었겠지. 주변의 강국에 치이는 소국 입장에서 제국의 황후의 고향이라는 간판은 꽤나 도움이 될 만했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컸다. 럼코르바 국왕의 소심한 복수에 에드윈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율리안의 위치를 알린 것은 어디까지나 아델라의 독단이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아델라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불편한 몸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보통 힘든 게 아닐 테지.”

에드윈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모스에서 르네일까지 바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의 단독 사용 허가를 받아 놨어. 마차를 빌려주마.”

대륙 사이의 교역을 쉽게 하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대해를 단숨에 가로지를 수 있는 만큼 막대한 마나를 필요로 하며 당연하게도 사용료 역시 어마어마했다.

크고 작은 상단들은 비용을 분담했고, 짐은 물론 사람까지도 철저한 검사 후 이용자를 모두 기록한 뒤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나디아를 도피시킬 적에는 배제했던 루트였다.

에드윈은 정신이 없어 돌아갈 일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생각할 짬조차 없었다.

바모스에서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다면 장장 보름이 넘는 항해 여정을 생략할 수 있으니 달가운 일이었다. 환자가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배 위에서는 비상사태가 생겨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는 깔끄러운 턱을 매만지며 말을 골랐다.

“어머니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뭘, 사용료는 엘란츠 후작가로 청구한다고 했으니 알아 두기나 해.”

내내 경직되어 있던 에드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는 보지 말자꾸나. 피차 떠올릴 만한 좋은 기억도 없으니.”

“제가 할 말입니다.”

모자지간에 주고받는 말이라 하기 어려울 만치 냉랭한 작별 인사였다.

이틀 후, 급하게 짐을 꾸린 일행이 바모스로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나디아는 깨어나지 못했다.

일찌감치 정신을 차렸더라도 회복을 위해 일부러 더 잘 수 있도록 약을 처방했겠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피로가 상당했는지 깊게 잠든 채 잠깐도 깨어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그저 잠들었을 뿐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에 에드윈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별다른 이변 없이 르네일에 도착한 에드윈은 라슬로에게 율리안을 붙잡았다는 서신을 띄운 뒤, 지체 없이 길을 떠나 엘란츠 성으로 향했다.

떠날 때와는 다르게,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목표하던 것들을 다 이룬 덕인지 어깨에 무겁게 올라앉아 있던 짐을 한 꺼풀 덜어 낸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루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 회복에 전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슬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에드윈이 나디아의 치료를 맡긴 마법사에게 물었다. 빌려주는 거라던 아델라의 마차 안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벌써 닷새째였다.

“주무시는 것뿐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적 있는 확답을 다시 들어도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닷새를 내리 잔다고? 도중에 한 번쯤 깰 법도 한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불편한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찔러 댔다.

에드윈은 조심스럽게 힘없이 늘어진 손을 붙잡았다.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잠든 채였지만 마법사들이 꾸준히 약을 먹였던 덕에 나디아의 회복은 순조로웠다. 창백했던 얼굴도 희미하게 혈색이 돌았고, 가슴팍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으며, 숨소리에도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손톱만 한 돌덩이가 배 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처럼 거슬렸다. 이렇게까지 깨어나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또한 마차 근처를 자꾸만 얼쩡거리는 기사가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덤이었다. 목숨 한번 질긴 놈이었다.

에드윈은 생각을 바꿨다. 기사를 죽이는 건 보류해야 할 것 같았다. 나디아가 쿠르쉬드에게 가진 감정을 모조리 털어 낸 것이 아니라면 상대의 죽음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뿐일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가슴 한구석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 내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관대하게 넘어갈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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