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이해해. 어차피 그럴 거 알고 있었어.”
힘겹게 입을 연 나디아의 말을 낚아챈 에드윈이 애당초 그녀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제 할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고? 나디아는 그의 말에 담기 이면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분명 도피 중의 일만을 일컫는 게 아니었다.
“그놈에겐 좋은 기회였겠지. 단둘이 여행을 하면서, 의지가 되는 상대에게 끌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가 답지 않게 관대한 말을 하는 게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원해서 그런 일이 아니었다며, 나는 나쁘지 않다며 합리화하던 말들을 이제는 더 쓸 수 없게 되었다.
아실과 밤을 보냈던 날, 먼저 손을 뻗은 건 명백하게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에드윈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다. 사람은 금방 변하지 않는다.
“나는 욕심이 많아. 당신을 나눠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러니…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
나디아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죄책감과 두려움 따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한 에드윈이 손을 뻗었다. 엉킨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는 손길만큼은 여전히 다정했다.
나디아는 이 모든 게 그의 진심일지 아닐지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같기만 했다.
“아내의 부정을 고발하고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는 대신….”
에드윈의 말은 두려운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디아가 불안에 떨며 몇 번이고 상상했던 적이 있어서인지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는 건 더욱 쉬웠다.
발가벗겨진 채 재판장에 설 모습이 실제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구명줄처럼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에게만큼은 관대한 사람이니, 선택지를 주지. 나인지 그놈인지.”
그의 목소리가 독처럼 귓가로 스며들었다. 섬찟 소름이 돋았다. 에드윈은 아실과 자신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그가 나디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입에 담은 뒤에 제안할 것은 무어란 말인가? 또 바로 조금 전에는 사랑한다더니 이제는 두 남자 사이에 선택을 하란다. 그게 그를 고르라는 말이 아닐 수 있을까?
멍청하게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싶었던 나디아는 에드윈에게 물었다.
“선택지를 준다는 건… 내가 만일, 당신을 택하지 않으면 순순히 놓아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불신으로 가득한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그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자신을 감추는 것에 능숙한 남자에게서 감정을 읽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윈은 어떤 동요도 내비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
그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디아는 그의 확답에도 덥석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에드윈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없기도 했다.
정말로 놓아주겠다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지 고민하는 건 온전히 그녀의 몫이라 버겁기만 했다.
이 관계가 시작된 순간 끝냈어야 했을 선택지가 더는 미룰 수 없다며 그녀를 재촉해 댔다. 도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디아는 입술을 씹으며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나디아는 지금 이런 고민을 할 때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구슬 하나를 더 부스러뜨리던 에드윈이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입 밖으로 말을 내어놓기도 전에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몸이 괜찮아진 것 같겠지만 회복 속도가 빨라진 것뿐이니까.”
그의 손이 옷더미를 뒤졌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바싹 마른 옷을 건네받은 나디아는 얼굴을 붉힌 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뼛속까지 서렸던 한기 탓인지 아직 간헐적으로 몸이 떨렸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일단 한숨 자.”
에드윈이 두툼한 로브를 바닥에 깔고 나디아를 그 위에 눕혔다. 눕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제야 축적된 피로를 인식한 듯 몸이 축축 늘어졌다. 등이 바닥에 닿자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이미 성큼 다가온 잠을 코앞에 둔 채로 웅얼거리며 물었다.
“율… 리안은….”
“그놈들이 병신이 아닌 이상 붙잡았겠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몰라도.”
절벽 위에서의 삼자대면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디아 역시 그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잠시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던 나디아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
고른 호흡이 흘러나오는 나디아의 감은 눈을 내려다보던 에드윈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몇 번인가 숨죽여 기침했다. 숨을 쉬느라 가슴이 들썩일 때마다 강렬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가벼운 부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엘란츠 성을 떠날 때부터 착용하고 있었던 방어 마법이 깃든 펜던트는 영광의 홀이 무너졌을때와 조금 전 물속에서 그의 목숨을 구했을 때로 효력을 다했다. 그 이후 몇 번쯤 충돌이 더 있었지만 물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방어 마법 덕이었다.
강은 유속이 빠르고 커브가 심했고 곳곳에 커다란 암초가 버티고 있었다. 실수로 빠지기라도 하면 자력으로는 살아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에드윈이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강 하류에서 나디아의 시체를 건져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윈 역시 펜던트가 없었더라면 나디아가 물속에서 그를 건져 냈더라도 여기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죽었을 테니까.
‘이만하길 다행이지.’
아니, 기적이었다. 그는 삭아 가는 나무속의 한쪽 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분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디아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말했던 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게 아니었다. 미리 지형을 조사해 뒀던 터라 강이 위험하다는 것도, 살아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디아의 몸이 기우뚱하며 추락하는 순간 그의 심장 또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건 차디찬 강물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어드는 것보다 더 끔찍한 감각이었다.
율리안이 활시위를 놓는 순간 급한 마음에 들고 있던 검을 창처럼 내던졌지만, 그것이 목표했던 자에게 제대로 적중하긴 했는지 살필 틈은 없었다. 결국 죽는 사람이 둘이 될 뿐이라는 이성적인 생각 역시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에드윈!”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다급한 아델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나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본 순간, 그 손을 잡을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히 메웠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진 에드윈은 무작정 손을 뻗었다. 감질나게도 몇 번이나 손끝이 스쳤다. 찰나 같기도 했고, 영원 같기도 했던 추락이 끝나기 전, 에드윈은 간신히 부서질 듯 마른 손을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차가운 강물이 그녀에게만큼은 스미지 않길 바라며 꽉 끌어안았다. 그때 그가 느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안도는 그동안 내내 부정해 오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떤 미친 자식이 그저 조금 흥미가 있는 상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짓을 불사한단 말인가? 턱 밑까지 차오른 감정이 이제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며 그를 비웃었다.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해도 벗어날 수 없다면 멍청하게 가만히 있을 생각 없었다. 이제 와서 붉은 머리의 기사와 단둘이 여정을 떠나게 한 것까지도 후회가 되는데, 아닐 거라며 부정만하다 눈 뜨고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그저 이름뿐인 아내가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몸,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그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이라….”
급류가 휘몰아치는 강 속에서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강변에서 저체온증으로 죽는 대신 엉망진창인 상태로라도 살아서 눈을 뜰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조그만 여자가 한 일이었다.
제법 놀라웠다.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더라도 사는 건 그녀뿐일 거라 생각했다. 평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했을 나디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꽤나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죽게 내버려 둘 만큼 미움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로 안심하려던 마음이 한차례 더 일렁거렸다.
그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쿠르쉬드에게로 완전히 기울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관대한 척 그녀에게 선택지를 주었지만 쿠르쉬드를 선택한다고 해서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뒷배도 없는 기사 하나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그를 선택해도 쿠르쉬드는 더 이상 나디아에게 집적거릴 수 없게 만들어야겠지.
그의 아내는 천성이 그런 건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건지 조그만 호의에도 쉽게 흔들렸다.
에드윈은 나디아의 비쩍 마른 창백한 몸에 새겨져 있던 흉측한 멍을 떠올렸다. 팔은 물론이고 율리안의 화살이 스쳤던 다리의 상처와 가슴 아래의 커다란 멍,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던 기침과 새파란 입술을 적시던 핏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둘러업고 뛰쳐나가 치료해 줄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의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몸이 차게 식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정신을 잃을 것처럼 자꾸만 눈앞이 아득해지는 게 문제였다. 마른 옷을 다시 챙겨 입으며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흔들고 뺨을 쳐도 큰 효과는 없었다.
그가 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아델라가 목격했으니 바로 수색이 시작됐을 것이 분명했다.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시체라도 건져야 할 테니.
해가 완전히 떠올랐는지 걸어 둔 망토 사이로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현실인지 환청인지 모를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머리가 몽롱한 탓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에드윈은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착각이 아니기를 바랐다. 율리안 휘하의 기사들은 모두 흩어 놓았으니 아델라의 명령으로 나온 수색조일 확률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