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그녀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아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다정하게 뺨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의 손길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조금만 참아. 동상이라서 그래.”
이내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에드윈은 젖은 옷더미 사이에서 로브를 끄집어내 물을 꾹 짰다.
“얼어 죽겠군.”
그는 맨몸에 젖은 로브를 걸치며 조금 헐떡이긴 했지만 움직일 만한 모양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마저 힘들어 보였던 조금 전보다 나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려던 나디아의 생각을 눈치챈 듯 그가 말했다.
“불을 피울 장작을 구해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금방 올게.”
“나도…!”
“착하지.”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나디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아마 그가 나와서 도우라고 말했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눈에 띄게 붓기가 가라앉은 손목을 내려다보며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에드윈은 제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금방 돌아왔다.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온 그의 팔에 한아름 안겨 있던 마른 나뭇가지들이 그리 넓지 않은 공간 한쪽에 우르르 쏟아졌다.
숨을 몰아쉬며 나디아의 곁에 주저앉은 남자가 나디아가 풀어놓았던 검대에서 단검을 뽑았다. 넓적한 검날이 흙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땅에 닿은 부분은 썩어 없어지기라도 했는지 흙 아래 나무는 없었다. 순식간에 구덩이가 하나 생겼고 주위로 파낸 흙을 쌓아 올린 에드윈이 나뭇가지를 적당한 길이로 부러트려 차곡차곡 던져 넣었다.
젖은 가죽 주머니에서 또 다른 병이 나왔다. 투명한 액체를 장작 주위에 한 바퀴 빙 둘러 뿌린 남자가 손톱만 한 푸른색 구슬을 손끝으로 부순 뒤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새파란 색의 불꽃은 느릿하게 나뭇가지들을 삼켰지만 연기는 나지 않았다.
“…마법인가요?”
“그래. 기사들에게 지급하는 거야.”
나디아는 모닥불 가까이 몸을 당겨 앉아 불을 쬐었다. 에드윈의 손 안에서 기다란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면 위치가 발각되니까.”
엘란츠 성을 떠나올 때도 이렇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입 밖으로 내어놓지도 않은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단가가 높아 당장 보급하기는 힘들다는, 몰라도 그만일 설명이 뒤를 이었다.
좁은 공간에 훈기가 퍼져 나갔고 축축하게 젖어 얼어붙었던 머리카락이 말랐다. 추위가 가시자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나디아는 무겁게 늘어지기 시작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일렁이는 불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랬어요?”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에드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날름거리며 마른 나뭇가지를 삼키는 푸른 불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왜 거기서 뛰어내린 거예요?”
“음.”
그가 목을 울렸다.
“이유가 필요해?”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던 남자가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생각 같은 거 할 겨를 없었어. 율리안을 끝장낼 수 있는 순간이 코앞이었는데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떤 전조를 느낀 것처럼 나디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께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당신이 떨어지는 걸 본 순간 눈앞이 새카매져서…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물속이었으니까.”
그의 말은 마치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정의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질문을 던질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하지만 막상 물어보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에드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막혀 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나를 사랑해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나디아는 제가 물어 놓고 에드윈이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차마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인 그녀의 귓가에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강에서 여기까지 제법 거리가 되던데.”
나디아는 그가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다. 실망감에 어깨가 축 처졌다. 그녀는 뻣뻣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적당히 대답했다.
“몰라요. 그냥….”
몸의 통증이 가라앉고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 때에 떠올리자니 자신이 한 행동이라고는 믿기지도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모른다는 말은 그저 속상함에 내뱉은 투정이 아니었다. 정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팔에 든 멍, 강에서 나를 끌어 올리다 생긴 거지?”
나디아는 제 가느다란 팔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선명한 멍 자국을 들여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국만 보고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괜히 민망했고, 또 조금쯤 자랑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며 절망하기만 하던 순간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 단 한 번일지라도 혼자 힘으로 무언가 해낸 것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결과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비로소 떠올릴 수 있는 감상이었다.
“두고 갔으면 더 편했을 텐데 왜 그랬지?”
“무슨 그런 소릴 해요?”
고작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속이 상했다. 나디아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두고 가라고… 죽게 내버려 두라고….”
그가 죽기라도 할까 봐 견딜 수 없이 두려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못 하겠다며 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에드윈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었다.
“날 사랑해?”
그의 목소리에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던 수십 가지 상념들이 단숨에 증발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에드윈이 던진 말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너무도 복잡하고도 다양해서 하나로 묶어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몇 번이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답을 구할 만한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수많은 일들이 몰아쳐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에드윈은 또 한 번 나디아를 뒤흔들 말을 던졌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우습게도, 혼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모든 조각들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한 번에 맞아 들어갔다.
“나는….”
나디아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그녀는 두려웠던 거였다. 에드윈은 나쁜 남자였다. 지금껏 그녀에게 했던 잔인한 말과 잔뜩 약해진 마음을 파고드는 다정한 행동들. 그 간극에 길들여져 가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겁이 났다.
마구 휘둘리기만 하는 나디아와 달리 에드윈은 제가 쥐고 흔들지언정 절대로 누군가에게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모른 척했던 것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두렵고 또한 너무도 아픈 일이었다. 이미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는 일에 또다시 뛰어들기엔 그녀는 너무 겁이 많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 왔던 벽이 고작 남자의 한마디에 허물어졌다.
“나도….”
“사랑해?”
그녀가 두려움을 모두 떨쳐 내지 못해 끝맺을 수 없었던 말을 에드윈이 받았다. 나디아는 그가 지금에 와서 사실 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저도 모르게 눈에 물기가 고였다. 나디아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지켜본 에드윈의 입가에 배부른 짐승과도 같은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쿠르쉬드는?”
나디아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왜 그의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지 어리둥절한 낯으로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가 돌연 입가에 띠었던 미소를 모두 지워 내고 물었다.
“쿠르쉬드도 사랑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뜻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숨이 멈췄다. 뒤늦게 놀란 티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너무 늦었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그 선명한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숙이며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저도 모르게 움직였던 팔이 깜짝 놀랄 만큼 아팠다.
에드윈의 질문에 깜짝 놀란 심장이 쿵쾅거리며 달음박질치기 시작하자 가슴팍이 둔중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 만한 질문으로도 몸의 고통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인지….”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당신, 거짓말 지독히도 못하니까.”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주워섬긴 변명이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거짓말에 끔찍하게도 소질이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제가 들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였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좁은 공간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력으로 타오르는 불이 제 수명을 늘리려 장작을 집어삼키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설마 내가 지금까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동안 항상 가능성으로만 생각했던 일이 눈앞에 닥쳤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쁨과 기대감에 두둥실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삽시간에 싸늘한 곳으로 내쳐졌다.
찔리는 게 하나도 없어 당당하게 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찬 기운이 새어 들어오던 좁은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디아는 용기를 내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에드윈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지도 않았고 비웃고 있지도 않았다. 담담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마주한 채 나디아는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불안을 감지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급하게 몰아치던 일들이 잠잠하게 가라앉자 그제야 한쪽으로 미뤄 두었던 지나간 일들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던 날들과 불안한 현실을 잊기 위해 아실과 보냈던 밤이 떠올랐다.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던 목소리 역시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혼란으로 가득한 머릿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후회해?’
나디아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마땅한 답도 찾지 못한 채 초조에 떠밀려 무작정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