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내부는 흙이 쌓여 있었지만 생각보다 아늑했다. 평평한 바닥에 에드윈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녀는 절뚝거리며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든 손끝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다 간신히 젖은 망토를 벗어 냈다. 그녀는 망토를 펼쳐 나무 터널의 한쪽을 막았다. 이렇게 하면 바람이 들지 않겠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통나무 안으로 들어온 나디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누군가가 관절을 모두 뽑았다가 대충 꽂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무슨 힘으로 커다란 남자를 끌고 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쿨럭거리는 기침이 몇 번이나 터져 나왔다. 속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죽을 것 같았지만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제가 호수에 빠졌다 건져졌을 때와 겨울비를 잔뜩 맞았던 때를 생각했다.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실이 불을 피울 때 조금 더 눈여겨볼 것을 그랬다. 후회했지만 늦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에드윈이 숨을 쉬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치마를 걷어 올리던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치맛자락은 흐릿해진 핏자국투성이였고 오른쪽 종아리에 살점이 너덜거릴 정도로 깊게 파인 상처가 나 있었다.
새파란 종아리를 타고 물에 섞인 피가 느리게 흘러내렸다. 그제야 율리안이 쏜 화살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 생각났다. 겨우 스친 것으로 이 정도인데 제대로 맞았다면 다리가 떨어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상처를 인식하고 나서야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얇은 속치마를 길게 찢은 뒤 상처를 둘둘 감고 어설픈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찢어 낸 천을 들어 올리다가 아르카나에게 받았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나디아는 품 안을 뒤졌다. 혹여나 정신없었던 물속에서 잃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손수건은 무사했다. 물에 푹 젖어 있었지만.
그녀는 손수건의 물기를 꼭 짰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젖었지만 그래도 깔끔한 푸른 손수건을 상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드윈의 뒤통수에 받쳤다.
제가 흘린 피보다 색이 옅은 금발이 피로 젖어 있는 모습에 선뜩하게 가슴이 차가워졌다. 다행히 피가 멎어 가던 중이었는지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가늘었다.
“콜록, 콜록, 우으….”
다시 격렬한 기침이 튀어나오며 온몸이 들썩거렸다. 구역질까지 나왔다. 피 맛이 도는 침을 대충 뱉어 낸 나디아는 머리카락 끝을 주욱, 하고 짰다. 물이 쪼르르 떨어져 흙을 적셨다.
알게 모르게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어지러웠다. 그녀는 꽁꽁 얼어 잘 움직이지 않는 손끝에 반복해서 입김을 불어 녹이며 에드윈의 망토를 벗겼다.
그 망토를 들고 밖으로 나가 반대편 통로를 막은 뒤 남자의 남은 옷을 모두 벗겼다. 그녀는 에드윈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는 내버려 두었다. 가운데 박힌 새파란 보석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보자 마법 아티팩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컴컴한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의 흰 피부 곳곳에 얼룩덜룩한 멍이 들어 있었다. 가슴과 옆구리, 어깨 뒤편과 견갑골 근처 등 온몸이 멍투성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그 멍을 바라보며 옷을 벗던 나디아는 제 모습도 크게 다를 것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팔에 길게 남은 검붉은 멍은 물속에서 에드윈을 끌어당기다 생긴 것일 테고, 허리에 남은 넓은 멍은 강을 떠내려오다 나무에 부딪혔을 때 생긴 거겠지.
숲에서 넘어졌을 때 접질렸던 손목은 아픈 것도 참고 억지로 혹사 시켰더니 지금은 퉁퉁 부어 건드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나마 멀쩡한 손으로 젖은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에드윈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휘이잉…. 거세게 부는 바람이 입구에 걸린 무거운 망토를 흔들었다.
마른 천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알몸이었다. 부끄러움 따위를 느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온기를 얻을 수단이 서로의 체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도 에드윈의 몸은 지금껏 그의 품 안에서 느꼈던 열기가 착각이라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체온이 돌기 시작해 미지근해진 손바닥을 그의 뺨에 대고 문질렀다. 감각이 돌아오자 망각했던 통증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으….”
너무도 희미해 바람 소리라 여길 뻔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던 나디아는 에드윈의 입술 사이로 길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금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몇 번이나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올라가며 초점을 잡지 못한 듯 멍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디아는 숨을 죽인 채 그가 의식을 되찾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의 대리석처럼 매끄럽던 살갗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숨이 뿌옇게 부서졌다. 체온이 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
눈이 마주쳤다. 그가 힘겨운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고개를 약간 기울여 여전히 뺨에 붙어 있던 나디아의 손바닥에 문지른 그가 무어라 말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 외에는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온 신경을 에드윈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나디아는 그의 말을 무리 없이 이해했다.
‘괜찮나?’
몇 번이고 억지로 목구멍 아래로 구겨 넣었던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강을 막 빠져나왔을 때처럼 마구 욕을 하고 싶기도 했다.
“지,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거기서 뛰어내리기는 왜! 콜록, 흐, 콜록, 콜록!”
“떠… 드는, 보니… 괜찮….”
몇 번인가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토할 것처럼 기침을 쏟아 냈다. 미처 토해 내지 못했던 멀건 물과 함께 피가 섞여 올라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마음이 다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놀란 사이에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아, 어디지?”
“어, 어딘지 몰라요. 강을 꽤 많이 흘러 내려온 것 같은데…. 근데 왜 피가… 괜찮아요?”
“괜찮아. 호들갑 떨지 마.”
그는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나디아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리는 좀 어때?”
에드윈이 천으로 엉성하게 감아 둔 나디아의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디아는 서둘러 무릎을 당겨 앉으며 몸을 가렸다. 무리했던 결과가 뒤늦게 나타나는 듯 몸이 미친 듯이 저리고 떨렸고 목구멍에서 자꾸만 핏물이 올라왔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괜찮아요.”
얼버무리는 나디아의 몸을 집요한 시선이 꼼꼼하게 훑고 지나갔다. 거짓말인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만 그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나무랄 생각은 없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가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어 벗어 둔 옷가지를 뒤졌다. 에드윈은 이내 여행용 로브 안쪽에서 두툼한 가죽 주머니를 끄집어내더니 꽉 묶여 있던 끈을 풀고 안을 헤집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이었다.
용케도 깨지지 않은 병의 내부에 한 모금은 될까 싶은 진한 초록색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가 내미는 병을 얼떨결에 받아 든 나디아는 그 안을 살피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회복초 농축액. 마셔.”
나디아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병을 도로 내밀었다. 새파란 입술을 한 에드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이 마셔요. 머리도 다쳤고, 피도…. 혹시 한 병 더 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에드윈은 병을 도로 받아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디아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가 평소 그가 제게 하던 것과 같은 폭언을 흉내 내기로 했다.
“에, 에드윈이 마시는 게 나아요. 기절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무겁기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당신이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하는데….”
“그러니 내가 마시고 네 뒤치다꺼리를 해라?”
패기롭게 입을 연 것과는 달리 그가 받아치자 나불거리던 입이 딱 다물렸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입으로 듣자니 얼마나 뻔뻔하게 느껴지는지. 하지만 민망하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녀 역시 몸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저보다 에드윈이 더 걱정이었다. 그가 죽어 버릴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다. 에드윈이 눈을 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느꼈던 절망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식은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과 잘게 경련하는 손, 피를 토하는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그마한 약병이 다시 에드윈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는 거침없이 병의 마개를 열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한 모금도 안 될 것 같다는 나디아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나디아는 몸속을 헤집는 것 같은 통증에 덜덜 떨면서도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가 먹지 않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더라면 강제할 방법도 없는 그녀는 내내 그가 픽 쓰러질까 봐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이다.
또다시 기침이 나왔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가슴팍이 불에 타는 듯 아팠다. 입가로 흐르는 액체를 손등으로 슥 닦아 내던 나디아는 창백한 손등에 묻어난 피에 당황했다. 그녀는 모른 척 손을 숨기며 에드윈의 눈치를 살폈다.
갑작스럽게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나디아는 무슨 일인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의문을 가진 순간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 잠….”
입술이 닿고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힘에 고개가 뒤로 기울어졌다. 큰 손이 턱을 눌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온 한 모금도 안 되는 액체를 저도 모르게 꿀꺽 삼킨 다음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황을 깨달은 나디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따지고 들 것을 막는 것처럼 혀가 밀고 들어왔다. 나디아는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다친 곳을 아프게 하기라도 할까 봐 꼼짝도 못한 채 입맞춤을 받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진득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잠시 몽롱한 눈으로 에드윈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기 무섭게 눈을 떴다.
“이런.”
나디아는 다시 그녀의 혼을 빼놓으려는 목적인 듯 급하게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당신이 먹으라고 했잖아요!”
“나도 먹었어.”
미심쩍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나디아는 느릿하게 떨어져 나가는 손을 붙잡았다. 해가 뜨고 있는지 입구에 걸어 둔 망토 사이로 빛이 비쳐 들어왔다.
약을 먹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인지 에드윈의 손은 막 깨어났을 때처럼 떨리고 있지는 않았다. 얼굴이 여전히 창백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편해 보였다.
“엄청 조금이었는데….”
“농축액이라고 했잖아.”
나디아는 한발 늦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화끈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이 느린 속도로 몸 안으로 번져 가는 느낌이 들고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던 가슴의 통증이 덜해졌다. 그리고 빠르게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에 감각이 돌아오며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이 아팠다. 에드윈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새빨간 손가락을 주물주물 문질러 주는 그의 손 역시 온기가 돌아 따뜻했다. 왜인지 눈물이 찔끔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