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88화 (88/115)

88.

이번에는 그녀가 다치지 않게 감싸 주는 손길이 없었다. 나디아는 배 부근이 강하게 짓눌리자 폐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숨마저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나디아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몸이 걸린 곳이 어딘지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이 만져졌다.

그녀가 두 팔을 있는 힘껏 벌리고 끌어안아도 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굵은 나무가 강 속으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그제야 방도가 떠올랐다. 이 나무의 한쪽 끝은 뭍과 이어져 있겠지.

그녀는 한쪽 팔을 검대에 끼운 채 손으로 에드윈의 셔츠 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튀어나온 나뭇가지 따위를 움켜쥐고 몸을 끌어 올렸다.

나무 덕분에 강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속도가 빠른 강물이 그녀의 몸을 있는 힘껏 밀어붙이고 있는 건 똑같았다. 몸이 자꾸만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머리가 몽롱해지고 자꾸만 몸에 힘이 빠졌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모른다.

수 분, 수 시간처럼 느껴졌던 몇 초가 지나고 그녀는 간신히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물속에 있을 땐 멀게만 느껴졌던 수면이 생각보다 가까운 게 다행이었다. 빙글빙글 돌면서도 강바닥까지 가라앉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허억, 컥, 우욱….”

입 밖으로 물이 역류했다. 폐를 채운 물을 한 모금 뱉어 내고 겨우 숨을 한 번 들이쉰 나디아는 서둘렀다. 느긋하게 숨이나 쉬고 있을 짬이 없었다. 에드윈은 여전히 강물 안에 잠겨 있었다.

나디아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검대에 건 팔을 끌어 올리며 부지런히 이동했다. 물속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부력이 없었다면 그녀가 에드윈을 끌어 올리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곳곳에 부러진 가지들이 매달린 나무는 좋은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간신히 얕은 곳에 다다라 시체처럼 창백해진 에드윈을 끌어 올렸을 때 나디아는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이제야 슬그머니 느껴지기 시작하는 통증을 참으며 얕은 물이 흐르는 모래 바닥을 짚은 채로 죽을 것처럼 기침하며 구역질을 쏟아 냈다. 두 팔이 갓 태어난 망아지의 다리처럼 볼품없이 휘청거렸다. 비릿한 강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욱, 콜록, 흐….”

목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지끈지끈 울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짚으며 나디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가늠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시야로 울창한 숲과 등 뒤로 흐르는 거센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 물속에서 살아 나온 건 기적이었다. 바람이 한차례 휘잉 불어오고 그녀는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았다는 걸 깨닫기 무섭게 그녀가 발버둥 치며 끌어 올렸던 상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녀를 그럴 수 없게 했다.

나디아는 물에 반쯤 잠긴 채 누워 있는 에드윈을 살폈다.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나디아는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창백한 뺨을 두드렸다.

“에드윈…? 에드윈!”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그의 코 밑에 손을 대 봤지만 숨을 쉬는 건지 아닌지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언 손의 감각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녀는 손을 쥐었다 펴고 입김을 불며 손을 녹이려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조차 온기가 없었다.

나디아는 서둘러 남자의 가슴팍에 귀를 붙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목구멍을 넘어올 것처럼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머리가 온통 울려서 다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보, 얼간이! 멍청이!”

그녀는 제가 아는 비속어를 죄다 끄집어냈다. 똑똑한 척은 저 혼자 다 하더니 거기서 뛰어내리기는 왜 뛰어내린단 말인가? 그가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나디아는 죽었을 테지만 그녀는 멋대로 비난했다. 속이 상했다. 아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던 나디아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그의 몸을 눌렀다. 물을 마셨으니 토하게 해야 했다. 분명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온몸이 물로 가득 차 괴로울 테니까.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영 틀린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의식이 있다면 스스로 토해 냈겠지만 그가 정신을 잃었으니 나디아가 도와야 했다. 손목이 끔찍하게 아팠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팔은 물론 온몸이 기진맥진해 부들부들 떨렸지만 나디아는 과연 통하기는 하는 건지 알 수도 없는 행위를 반복해야 했다. 한껏 체중을 실어 배를 눌러도 그녀처럼 울컥거리며 물을 토해 내기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자꾸만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눈을 뜨는 거야….”

이젠 차가움을 느낄 수도 없는 물이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숙여 남자의 새파란 입술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검푸른 급류 속에서,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숨을 건네주었던 남자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숨을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남자의 몸이 경련했다. 나디아는 어떤 식이든 그의 몸이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기꺼웠다. 마음속으로 강렬한 안도가 퍼져 나갔다.

안 죽었어. 그녀는 울먹이면서 에드윈의 배를 짓눌렀다. 그의 입술 사이로 물이 줄줄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숨이 트이며 얕은 기침과 함께 몸이 들썩였다.

나디아는 서둘러 그의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정신이 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반응이 얼마나 눈물 나도록 반가운지.

그러는 사이 희미하게 하늘이 밝아졌다. 곧 날이 밝을 모양이었다. 남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잠시 응시하던 나디아는 다시 에드윈을 살폈다. 한시름 돌렸다. 작게 들썩이는 가슴팍을 보던 그녀는 그를 다시 눕히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쓸어내리려 손을 들어 올렸던 그녀는 멈칫했다. 에드윈의 머리를 받쳤던 손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아….”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었다. 나디아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다시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젖은 옷이 다리에 휘감기며 걸음을 방해했다.

그녀는 그의 팔 아래로 손을 끼워 넣었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온 듯 턱이 덜덜 떨렸다. 한껏 거칠어진 숨이 뿌옇게 흩어졌고 상한 목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가 필사적으로 돌아갔다. 숨을 쉬게 되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출처가 머리인 것이 분명한 출혈은 물론이고 그의 젖은 몸과 자꾸만 떨어지는 체온 역시 문제였다.

떨어지면서 들었던 목소리가 착각이 아니라면 에드윈이 뛰어내리는 걸 본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 누군가 그들을 찾으러 올 것이다. 그 목소리는 낯선 것이었지만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믿어야 했다. 나디아가 할 일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게 움직일 것.

바짝 마른 땅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마땅한 방도는 없었다. 적어도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에드윈이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겠지만 그가 깨어날 일은 요원해 보였다.

그녀를 꽉 끌어안았던 품을 통해 전해졌던 충돌의 감각을 기억했다. 그 충격은 몇 번이나 있었다. 나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감싸느라 이런 꼴이 된 남자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죽게 내버려 둘 생각 역시 없었다.

숲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왔지만 헐벗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했다. 죽을 것처럼 아리던 손과 발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지금만큼은 이 상황을 반기고 싶었다.

앞일이 막막했지만 나디아는 계속해서 에드윈을 끌고 뒷걸음질로 걸었다. 그를 등에 업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낙엽이 가득 깔려 있는 바닥은 푹신했다.

“허억, 콜록, 콜록, 후욱….”

그녀는 폐병 환자처럼 기침을 하면서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버려진 오두막이나 폐가 따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동굴이어도 좋았다.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 모조리 나무뿐이었다.

날이 점점 밝아졌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몸의 통증으로부터 정신을 돌리기 위해 쉼 없이 생각을 이어 갔다.

율리안은 어떻게 됐을까? 에드윈의 검에 맞았던 것 같은데. 혹시나 수색대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들을 발견한 것이 율리안 측의 병력이라면 어떻게 하지?

그사이 여명이 밝아 오자 시야가 넓어졌다. 다급하게 주위를 살피던 나디아는 저만치 떨어진 숲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통나무를 발견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다못해 한 방향의 바람막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모조리 견뎌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울퉁불퉁한 나무뿌리 따위와 씨름하며 다섯 번쯤 넘어진 후에야 나디아는 목표로 삼았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는 멀리서 봤던 것보다 더욱 거대했다. 누운 단면의 지름이 그녀의 키를 한 뼘은 더 넘을 만큼 굵었다.

하늘이 돕기라도 했는지 쓰러진 통나무의 속은 터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나디아는 허리를 숙이고 에드윈의 몸을 그 안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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