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뭐라고 대답해도 율리안을 즐겁게 만들 뿐이었다.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율리안이었고, 그는 쉽게 설득할 수도,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나디아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신경전에 쏟을 정신이 없었다. 저를 향해 있는 화살촉의 흉악함을 확인할 때마다 현기증이 나서 정신이 아찔했다.
등 뒤는 절벽이었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율리안이 시위를 당긴 손을 놓아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움직이지 않아도 쏠 것 같아 겁이 나는 건 똑같았지만.
“검을 버려. 그리고 개처럼 바닥을 구르며 빌어 봐. 네 사랑을 살려 달라고. 그러면 대신 널 쏴 줄 수도 있어.”
미친 소리였다. 율리안은 에드윈이 뭘 하든 결국 저 하고 싶은 대로 할 인간이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에드윈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한 번 맞아 봐서 익숙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디아는 알 수 없었다. 에드윈과 율리안 사이에 대체 무엇이 더 있기에 이렇게까지 상황이 치닫게 된 건지.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가져다 대려고 해도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기에 불가능했다.
첨예한 긴장이 두 남자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나디아는 그 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소외되고 있었다. 이 갈등 구조를 이루는 축은 에드윈과 율리안이었고 나디아는 에드윈을 불리하게 만들기 딱 좋은 수단이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나 되고 싶지 않았던 역할이었다.
그녀는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고, 누구의 발목도 붙잡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한계에 한계까지 몰린 머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내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그녀가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더라면 에드윈은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뤘을 텐데. 극단적으로 치달은 생각은 그녀에게 행동력을 부여했다. 나디아는 느리게 뒤로 한 걸음 옮겼다. 낭떠러지가 가까워졌다.
“가만히.”
그녀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는지 에드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정확히 나디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에드윈.”
입술 사이로 짠기가 흘러 들어왔다. 깨닫지도 못한 사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발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작은 돌멩이들이 발아래서 잘그락 소리를 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내 말 들어. 내가 뭐 때문에 당신을 빼돌렸다고 생각해?”
에드윈이 헐떡이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몸과 함께 낭떠러지를 향해 가까워지던 마음까지도 덜컥 멈추었다. 나디아는 망연히 남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늘지게 하는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절박함이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정처 없이 휘청거리던 마음을 붙잡는 말이었다.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나디아는 한결 명료해진 정신으로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인식했다. 그녀는 침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살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재미없네.”
율리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그의 흥미는 바람 앞의 촛불보다도 부질없게 금방 사그라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너무도 쉽게 그의 손을 떠났다.
에드윈이 급하게 율리안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창처럼 던졌지만 이미 쏘아진 화살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디아!”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흠칫 놀란 나디아가 숨을 들이켰다. 다행스럽게도 율리안이 대충 쏘아 보낸 화살은 그녀의 가슴팍을 부수는 대신 궤도를 달리 해 다리를 스쳐 지나가며 살점을 갈기갈기 찢었다.
고통은 한발 늦게 찾아왔다. 나디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거세게 할퀴고 간 화살의 추진력과 난도질당한 것처럼 끔찍한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그녀를 멀쩡하게 버티고 설 수 없게 했다.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하필 그 방향이 낭떠러지였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거센 바람이 절벽 쪽으로 불어왔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텼을 만한 바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떠미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어…?”
얼이 나간 듯한 멍청한 소리와 함께 몸이 추락했다. 그 찰나의 모든 광경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복부를 꿰뚫은 검을 움켜쥔 채 무너진 율리안의 모습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오는 에드윈의 모습이. 그가 내민 손은 나디아가 잡기에 너무도 멀었다.
이윽고 낙하감이 찾아왔다. 일순 다리의 통증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로 몇 분 전, 스스로 뛰어내릴 생각을 했었는데도 막상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의 기운은 몸서리가 날 만큼 두려웠다.
이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윈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니, 율리안이 떠들어 대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윈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말이….
착각인지, 드넓은 계곡에 에드윈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멀어지는 밤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게 조금 전 그녀가 떠올렸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나디아는 분명 그것이 제 상상에 불과할 것이라 여겼다. 율리안의 말과 그녀의 바람이 맞물려 만들어 낸 환상.
그 환상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 두려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뻗어온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끝을 몇 번이나 스쳐 가더니 이윽고 강하게 낚아채는 것을 느끼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나디아가 바람 냄새가 나는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 안긴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검은 수면과 충돌했다. 커다랗게 물보라가 일고 두 인영이 거센 물살에 휩쓸려, 곧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잠깐의 소요가 지나가고 격류가 이는 강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
아무리 에드윈의 품이라고 해도 거센 물살이 옷을 흠뻑 적시며 스며드는 것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겹겹이 껴입은 옷 사이를 순식간에 파고든 차가운 물에 숨이 턱 막혔다.
강물은 지금 당장 심장이 멎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차가웠고 거센 물살은 눈을 뜨기는커녕 몸을 가눌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숨을 참고 버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얼음장 같은 물이 전신을 후려치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숨이 막혀 벌린 입 안으로 공기 대신 시린 강물만 들이쳤다. 아무리 입을 벌려도 숨은 쉴 수 없었고 물을 계속 삼켜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나디아는 산소가 부족해 멍해지기 시작한 머리로 기억을 되짚었다.
지나간 경험을 떠올려 봤자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나디아는 수영을 못 했다. 배울 기회도 없었고, 설사 배웠다고 해도 이런 격류에 휩쓸린 상태에서 헤엄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드윈 역시 속수무책인 것만 봐도 알 일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허우적거리며 쓸려 내려가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기는 한 건지. 무엇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는 에드윈의 팔뿐이었다.
물살에 떠밀린 두 사람의 몸이 규칙 없이 빙글빙글 돌며 빠른 속도로 강을 떠내려갔다. 그녀를 품 안 깊숙이 끌어안은 몸이 자꾸만 어딘가 부딪치는 충격이 전해져 왔다.
뺨에 그의 손이 닿는가 싶더니 입술 위로 말캉한 것이 부딪혔다. 나디아는 가늘게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물속으로 뿌연 기포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코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만큼은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멍한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맞붙은 입술 사이로 에드윈이 숨을 불어넣었다. 나디아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두 사람의 얼굴 옆으로 새어 나간 작은 공기 방울 몇 개가 수면으로 떠오르다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가늘게 뜬 시야로 남자가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일순인 것 같기도 했다.
의식이 조금쯤 명료해지자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그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 나디아는 허겁지겁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의 허리에 매인 검대 틈으로 팔을 끼워 넣었다.
아무리 그가 남은 숨을 모조리 전해 주었다고 해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추위에 겹겹이 껴입은 옷들이 물을 먹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있는 힘껏 다리를 마구 휘저었지만 수면 위로 올라가기는커녕 힘만 빠졌다.
정신을 잃은 듯한 에드윈의 몸 또한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면이 그리 멀지 않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빠른 속도로 쉼 없이 강을 떠내려가던 두 사람의 몸이 어딘가 턱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