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86화 (86/115)

86.

아르카나의 왜소한 등이 꿈틀거렸다. 간신히 고개를 든 그의 손이 앞을 가리켰다.

“…….”

무언가 말하려던 것처럼 뻐끔거리는 입 밖으로는 바람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과 충격으로 머뭇거리는 사이에 멀찍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미쳤나? 여자는 죽이지 말라….”

“…경은 징계….”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어 가는 남자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망설일 시간조차도 없었다. 나디아는 미련을 끊어 내고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들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그녀가 그들을 따돌릴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건 은신 마법이었다. 하지만 헐떡이며 정신없이 숲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녀는 굴절된 시야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마법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죽거나, 직접 풀어 드리기 전엔 풀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죽음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지만 나디아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폐가 칼로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그럴 수 없었다.

마법사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무작정 뛰고 있었지만 맞는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두운 숲은 낯설고 두려웠다. 아가리를 쩍 벌린 괴수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기도 했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저 길이 이 길 같았다.

하늘을 덮은 희멀건 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지만 별을 읽을 줄 모르는 그녀에게는 아름답다는 감상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녀는 흐려지는 눈을 마구 문지르며 암시를 걸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울면 안 돼. 울면 힘이 빠지니까….’

늘어진 나뭇가지나 말라붙은 덩굴 따위가 마구 스쳐 지나가며 드러난 살갗에 생채기를 남겼지만 그녀는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두운 숲 속을 정신없이 달리던 나디아는 어느 순간 무언가에 발이 걸려 그대로 나뒹굴었다. 달리던 속도의 영향으로 낙엽이 푹신하게 쌓인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던 마른 몸이 굵직한 나무에 부딪힌 다음에야 멈췄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충격에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말을 건 후에야 몸이 움직였다. 힘겹게 바닥을 짚은 손목에서 끔찍한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나디아는 캄캄하고 고요한 숲 속을 응시했다. 귀를 기울이기 위해 숨소리를 죽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녀의 어깨가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쫓아오는 발소리도, 낯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따돌린 걸까? 당연히 붙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안도했다.

그녀는 통증이 멎지 않는 손목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격자를 따돌렸다고 해도 언제 다시 따라잡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르카나가 말했듯이 북쪽으로 향해야 했다.

“…북쪽이 어디지.”

온몸의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지쳤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걸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나 낙엽 사이에 숨어 있던 마른 가지가 그녀의 발밑에서 뚝 소리를 내리며 부러지는 것에도 흠칫흠칫 놀라며 걷기를 한참, 그녀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숲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공터에 발을 내디뎠다. 아니, 공터가 아니었다.

나무가 없는 곳으로부터 그녀의 걸음으로 열 걸음쯤 걸으면 가파르게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쏴아아, 하고 요란스러운 물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혹시나 내려가는 길 따위가 있지 않을까 살피기 위해 절벽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깎아지른 절벽만이 보였다. 족히 20미터는 넘을 것 같은 절벽 아래로 유속이 빠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물러섰다. 이대로 여기 숨어 있을지,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더라도 어디든 이동해야 할지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으로 바짝 굳은 어깨가 움찔 놀라며 튀어 올랐다. 나디아는 위험을 경계하는 초식 동물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소리가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착각한 건지, 누군가 다가오는 중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을 대비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나디아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누렇게 마른 수풀 사이로 누군가 튀어나왔다.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발견한 것처럼 상대도 그녀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다.

“이거, 우리 엘란츠 부인 아니야?”

하필, 하필 마주친 것이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라니.

“횡재했네.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숲 속을 질주하기라도 했는지 잔뜩 흐트러진 차림의 율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더니 초승달이 드러났다.

나디아는 희미한 달빛이 비치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율리안은 저택의 응접실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더 초췌해져 있었다. 움푹 들어간 뺨과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늘은 마치 병자의 모습 같았다.

나디아는 천적을 마주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찬바람에 몸이 꽁꽁 얼어 버린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으로 덜덜 떨며 율리안을 바라보기만 하던 나디아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활의 시위에 화살을 메기는 것마저도 멍청하게 서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익은 화살이었다. 화려한 화살 깃과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갈고리 같은 흉악한 화살촉.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며 활을 들어 올린 황제는 찰나, 나디아를 겨누는 듯하더니 그 자세 그대로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풀숲 안에서 한 사람이 더 튀어나왔다.

창백한 달빛에 바랜 듯한 금발이 드러났다.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숨을 연이어 뱉어 내는 입술과 찡그린 눈매 그리고 이런 추위에도 땀에 젖어 있는 반듯한 이마가 더없이 눈에 익은 것이었다.

“에드윈!”

나디아의 입술 사이로 비명과 닮은 부름이 흘러나왔다. 둘만이었다면 기뻤을 재회였지만, 에드윈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나디아를 만날 거라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에드윈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번쩍거렸다.

“당신이 왜….”

그는 율리안을 경계하면서도 나디아를 흘끔거리느라 바빴다. 그의 미끈한 얼굴 위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에드윈을 오래 보아 왔던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인 게 분명했다. 마법사까지 붙여 주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여겼을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르카나는?”

“주, 죽었….”

에드윈은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억지로 버티던 마음이 자꾸만 허물어지려 들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디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울음도 함께 삼키려 노력했다. 지금은 한가하게 울기나 할 때가 아니었다. 재회의 반가움을 표시할 자리 역시 아니었다.

율리안의 활이 겨누고 있는 건 에드윈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저 남자가 손을 놓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가을의 일이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피에 젖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에드윈의 모습을 지금도 바로 조금 전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눈물겹군.”

율리안이 빈정거렸다. 에드윈이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 위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거기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러지 않으면….”

에드윈을 향하던 화살촉의 끝이 다시 나디아를 향했다. 하지만 율리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시선이 에드윈을 핥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디아와 율리안 그리고 날카롭게 번쩍이는 화살촉의 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에드윈의 얼굴에 갈무리하지 못한 초조가 드러났다. 몇 번인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율리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만둬.”

이윽고 흘러나온 에드윈의 목소리는 애쓴 보람도 없이 볼품없게 떨리고 있었다. 율리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가 바라던 것이 정확히 이것이라는 듯, 얼핏 희열마저 느껴졌다. 율리안의 몸이 전율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다고.”

그의 손이 활시위를 더욱 바짝 당겼다. 나디아는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흉악한 화살이 에드윈을 향하는 걸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날 만큼 두려웠는데, 그게 저를 노린다는 지금은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마저 없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누군가가 모든 게 그녀의 상상이었다고 말해 주었으면 싶었다.

지금은 위협뿐이지만 황제가 가볍게 손을 놓는 것만으로도 저 화살은 나디아의 가슴팍을 부수고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가리라.

에드윈이 화살 두 대를 맞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긴 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과 달리 그녀는 저 화살 한 대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굳이 겪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쌀 것 같아.”

입술을 핥는 율리안의 얼굴이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의식하기도 전에 나디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두둑하게 부푼 율리안의 바지 앞섶에 닿았던 눈길이 불에 덴 것처럼 떨어져 나갔다.

끔찍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자에게는 한낱 유희 거리라는 사실이. 나디아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못 박힌 듯 선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일견 평온해 보이는 두 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 여자를 신경 쓸 시간에 날 경계하는 게 좋을 텐데.”

“정말? 사랑하잖아.”

“나는 사랑을 알지 못해.”

율리안의 눈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그럼 쏴도 돼?”

에드윈이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