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네? 하지만 어떻게… 혼자 왔나요? 이 저택은 황제의 기사들로 가득해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느껴졌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지만 그는 매우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근접전으로 이어졌을 때 숙련된 기사를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마법은 사전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 혼자 왔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몰래 빠져나갈 겁니다.”
그는 느긋하게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재촉했다. 나디아는 얼떨결에 손수건을 품 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걸쳤다.
서두르는 기색에 그녀의 마음까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디아가 외투를 여미는 것을 도우면서 숨죽인 목소리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은신 마법을 걸어 드릴 겁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가 남기 때문에 어두운 길로 갈 겁니다. 이쪽은 감시가 느슨한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누가 오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죠.”
아르카나는 문밖의 기척을 살피더니 침대 곁으로 다가가 모포 안으로 둘둘 만 담요를 밀어 넣었다. 몇 번의 손길이 지나가자 꼭 안에 웅크리고 누운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깜짝 놀랄 만큼 신속한 손길이었다.
아르카나가 나디아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정수리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느릿하게 아래로 흘러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기묘한 감각에 몸서리치는 사이 시야가 굴절되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상했다. 투명하고 물컹한 젤리를 한 겹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그 어떤 당황도 비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의도했던 상황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마법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 자신에게도 마법을 건 마법사가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제가 죽거나, 직접 풀어 드리기 전엔 풀리지 않을 겁니다.”
신기하게도 아르카나 역시 그녀의 모습과 비슷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은신 마법이라고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은신 마법인데 그녀는 어째서 그를 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역시 있었지만 느긋하게 그런 것을 물어보고 있을 시간은 없는 듯했다. 서로를 볼 수 있게 수를 쓰기라도 했겠지. 그녀는 답을 들을 기회를 나중으로 미뤘다.
아르카나가 문 앞에 선 채 다시 한번 밖의 기척을 살피더니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의 속삭임이 뒤따랐다.
“가시죠.”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쫓아갔다. 바닥에서 그림자 두 개가 일렁였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이 잠겼다. 두 그림자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밖은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이 가득 껴 별빛조차도 희미했다. 그림자가 보이니 일부러 밤을 틈타 온 거겠지. 어둠에 몸을 숨기기 딱 좋은 밤이었다.
나디아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아르카나는 방의 문을 다시 잠갔다. 아르카나와 마법사는 숨죽이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맨발로 걷는 것이 아닌 이상 발소리가 조금도 나지 않는 건 어려웠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조용한 공간에 발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들이 무사히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멀찍이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밝힌 램프의 불빛을 피해 커다란 기둥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했다.
나디아는 어금니를 지르물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림자 사이로 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사는 총 세 명이었다. 나디아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녀에게 쪽지를 가져다주었던 갈색 머리의 기사였다.
기사들은 잠시 멈춰 섰고 개중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사 하나가 나디아가 갇혀 있던 방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림자 속에서 나디아의 눈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하루에 한 번 방문하던 간격이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여겼건만. 어째서? 고작 몇 시간 전에 다녀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기사가 다시 뛰쳐 내려와 방이 비었다며 소리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남은 두 명은 짧은 인사 후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그들과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조용했던 탓인지 중얼거리는 기사의 목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유령 아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쫄았어?”
갈색 머리의 기사가 낄낄 웃으며 동료의 등을 팡팡 내려쳤다. 그녀가 잔뜩 겁먹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기사들은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 버렸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다가 이윽고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을 즈음,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헐떡였다.
아르카나와 나디아는 혹시나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지 잠시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벗어났다. 발치에 늘어진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마법사의 은신 마법은 생각했던 것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그림자까지 숨길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욱 한정적이었다. 타인의 눈에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소리, 냄새, 기척, 실체 등 감춰지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뒷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뒷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나디아와 아르카나는 어렵지 않게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달이 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빛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면 더욱 숨기 쉬울 것이다.
온몸이 뻐근할 만큼 긴장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싱거운 탈출이었다. 그녀가 갇혀 있던 방을 확인하러 갔던 기사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어둠에 휩싸인 저택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워, 무언가 벌어질 거라는 전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 정말 이렇게 쉽게?’
석연치 않은 감상이 자꾸만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디아는 앞서가는 남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손쉬웠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다행인 일이지, 의문을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소요도 겪지 않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자작나무 숲의 초입에 들어섰다. 발아래에서 마른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바람 소리에 묻혔다. 캄캄한 밤이 안락하게 그들을 감싸 안았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군요.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나디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르카나 역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이대로 북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델라 님과 합류하면 럼코르바 측에서 파견한 기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델라 님이요?”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디아는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아델라 황녀? 엘란츠 후작 부인이요?”
“이젠 아니시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던 아델라 황녀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 럼코르바에서 파견한 기사는 또 무슨 이야기인지. 그녀는 수많은 의문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끄집어냈다.
“그럼 에드윈은요?”
“각하께서는 작전 대기 중이십니다.”
작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드윈의 목적은 황제를 죽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의 격돌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나디아의 존재는 걸림돌이었을 테니 이렇게 미리 빼돌리는 거겠지.
마법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했다. 그제야 나디아는 제 발이 멈췄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걸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마른 낙엽 더미가 와작와작 부서졌다. 두 사람이 저택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뒤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나디아는 충격에 앞으로 털썩 엎어진 채 눈을 부릅떴다. 귀가 멍했다.
뒤에서부터 비쳐 온 강렬한 불빛에 숲 안까지 번쩍 환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고개를 치켜들자 뒤를 돌아보고 있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덤덤한 얼굴이었다.
“시작됐군요.”
마법사가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디아는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커다란 저택의 일부가 무너진 채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정문 쪽에서 저택을 향해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꽈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택이 아니라 허공에 부딪힌 불덩이가 산산이 부서졌다. 이리저리 불어 대는 바람이 매캐한 냄새를 실어 왔다.
아르카나가 나디아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간신히 한 걸음 뗐다. 그 이후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소란을 뒤로한 채 더 어두운 숲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무언가 터져 나가는 강렬한 파열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두 사람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척 보기에도 허약해 보였던 마법사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은지 그는 어느새 그녀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나디아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자꾸만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불안을 지우려 속삭였다.
“혹시, 혹시 아실을 만났나요?”
그녀는 서둘러 말을 고쳤다.
“쿠르쉬드 경이요.”
“아, 나흘 전에 저희 측에 합류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을 구하러 가겠다고….”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을 닮은 날카로운 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가로질렀다.
“…날뛰는 걸 진정시키느라 아주….”
헐떡거리며 이어지던 말소리가 뚝 끊기고 나디아의 옆을 걷던 그림자가 풀썩 쓰러졌다. 영락없이 나무뿌리 따위에 걸려 넘어진 거라 여겼던 그녀는 마법사가 다시 일어나길 기다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르카나…?”
옆을 내려다본 나디아는 마법사의 등을 꿰뚫은 쇠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창이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머리보다 먼저 사태를 감지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