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84화 (84/115)

84.

나디아가 그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방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또 몇 번인가 문이 열리며 식사나 장작을 건네주러 온 기사들을 마주쳤다. 매일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지라 얼굴을 익히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아실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되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무너지지 말자고 각오를 다진 후에야 간신히 한 사람을 붙잡았다.

“나랑 같이 있던 기사는, 어, 어떻게 됐는지…. 빨간 머리의….”

“…….”

가면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시종일관 냉랭한 얼굴을 한 갈색 머리의 기사는 나디아와 말을 섞지 말라는 명령을 듣기라도 했는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떨쳐 낸 기사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바구니를 힐끔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지금껏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녀의 말에 친절하게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그날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지금껏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면 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모르겠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밀려오는 어두운 감정을 삼켰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자꾸만 머릿속으로 아실의 초점을 잃은 멍한 눈과 차게 식은 몸뚱이가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어도 눈을 감아도 흩어지지 않았다.

온갖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때 다른 기사들과 패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수상하기 짝이 없던 그 루비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기사가 전해 주고 간 식사가 들어 있을 바구니를 뒤지며 무기력하게 생각했다. 몸을 덥히기 위한 용도일 포도주 병을 들어 올리던 나디아는 병 바닥에 붙어 있었던 종잇조각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는 쪽지를 주워 들었다.

무사함.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 쪽지에 적힌 글자를 노려 본 다음에야 그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사하다고?”

의미를 이해한 그 순간부터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쪽지가 주먹 안에서 구겨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좁은 방 안을 서성이며 몇 번이고 쪽지를 들여다보다가 불현듯 멈춰 섰다.

바구니를 건네주러 왔던 기사의 짓이 분명했다. 바구니를 힐끔 보던 눈짓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나디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바로 조금 전이었는데 흐릿했다. 분명, 갈색 머리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는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디서 봤더라?”

소리 내어 말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어디였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나디아는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뒤 화로에 던져 넣었다. 종잇조각은 순식간에 약간의 재를 남기고 감쪽같이 불타 사라졌다.

나디아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채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화로 안의 장작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으로 변해 갈 즈음, 마른 장작을 두어 개 더 쑤셔 넣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뒷골목에서였다. 아실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여겼던 그날 뒷골목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갈색 머리의 동료. 떠올린 것이 기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것은 고작 몇 초 남짓이었으니까.

그자도 기사였구나. 그것도 황제의 기사. 친분 때문에 아실을 살려 준 것이라면 정말 엄청난 모험을 한 셈이었다. 황명을 따르지 않는 데에 얼마나 큰 각오가 필요한지는 굳이 상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실이 무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갈색 머리의 기사가 아실을 살려 주었다 한들 나머지 기사들도 황제에게 반(反)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여기서 뭘 해야 좋을지….”

내내 뇌리를 맴도는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초조해졌다. 에드윈과 아실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커다란 돌덩이가 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갇혀 있는 내내 기사들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거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태도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내 주눅 든 채로 바들바들 떠는 힘없는 귀족 여자를 전력으로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나,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무언가 계략 따위를 짜기에 그녀는 경험도, 능력도 부족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창문은 막혔고, 바깥을 내다볼 수 없어서 해가 지고 뜨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기사들이 하루에 한 번씩 들렀기 때문에 그걸로 날짜를 셌지만 제가 센 것이 맞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나디아가 셈한 것이 맞다면 방에 갇힌 지 이레째였다. 사흘째에 들어왔던 갈색 머리의 기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없었다. 그녀는 점점 기력을 잃었다.

여드레째 밤이었다. 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디아의 추측이었지만. 선잠이 들었던 그녀는 찬바람이 훅 불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비몽사몽 눈을 떴다.

창문을 틀어막은 이후로 바람이 들어올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기사들이 장작이나 물동이, 식사 따위를 가져다주러 들어올 때나 열리던 문이었지만 오늘은 이미 다녀갔는데.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이 주홍색으로 밝혀진 방 안과 아치형 나무 문을 훑었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꿈이라도 꾼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담요를 끌어 올렸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지척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이 확 깼다. 나디아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 어떻게 보아도 사람의 것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바닥의 그림자와 맞닿는 허공에서부터 느리게 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행용 부츠를 신은 발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망토가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전신이 드러났다.

비쩍 마른,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나디아의 입에서 놀라움과 두려움을 담은 비명이 새어 나오려던 찰나였다.

“쉿.”

바람처럼 다가온 낯선 남자가 나디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긴장했는지 차게 식은 손은 식은땀으로 끈적거렸다. 밤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낯선 모습이었다.

나디아는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나타난 낯선 이의 등장에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을 한 채 굳어 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숨을 죽이던 낯선 이는 다시 한번 제 검지를 펼쳐 입가에 댔다.

당장 그녀를 해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잠시 지켜보던 남자는 천천히 손을 거뒀다. 나디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혼란으로 물든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귀부인.”

무언가에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사포같이 말이 쏟아졌다.

“저는 아르카나라고 합니다. 엘란츠 후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말이었다. 에드윈! 나디아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에드윈이 근처에 있는 걸까? 두려움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것이 몸 안에 가득 차올랐다가 썰물 빠지듯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또 멍청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설 뻔했다. 이미 비슷한 일을 한번 겪어 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그녀가 감금당한 상태였고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했지만 낯선 사람의 말만 듣고 단번에 따라가지 않을 만큼의 조심성은 남아 있었다.

지난번, 노먼과의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생긴 것이었다. 나디아의 얼굴 위로 짙은 경계심이 어렸다.

“…그걸 어떻게 믿죠?”

순순한 태도였던 남자가 사납게 돌변한다면 당해 낼 방법이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쫄래쫄래 쫓아가는 짓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었다. 나디아는 그래도 제가 여전히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다 생각하며 조금쯤 기특하게 여기기로 했다.

다행히도 남자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을 뒤졌다. 그의 앙상한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눈에 익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받아 든 나디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것이 에드윈이 떠나기 전날 제 손으로 건네주었던 손수건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눈물샘이 약해지기라도 했는지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게 건네주기 전에 뿌렸던 자주 쓰는 향수의 향 대신, 에드윈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사했구나 하는 안도와 반가움 그리고 죄책감.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녀가 감상에 젖어 있을 틈도 없이 남자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귀부인, 지금부터 빠져나갈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