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83화 (83/115)

83.

07. 나디아 엘란츠

어두운 복도에는 나디아가 헐떡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몇 분 전까지 그녀는 황제를 부르짖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숨이 찼다. 어지러울 만큼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지만 쓸모 있는 생각은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거죠?”

나디아의 양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이끄는 기사들은 그녀가 놓아 달라고 애원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헐떡이며 내뱉은 물음에 대답을 해 주지도 않았다. 손수건을 건네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생각 역시 없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타샤의 목걸이라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마저 잃은 지금, 그녀는 너무도 무력했다.

힘이 풀린 다리가 몇 번이나 휘청이며 무너졌지만 나디아의 몸을 지탱하는 팔 힘이 어찌나 센지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반쯤 들린 그녀의 발끝이 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것처럼 기사들의 걸음은 굳건했다.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끌려갔을 아실이 어떻게 됐을지, 혹시나 실현될지도 모를 불길한 상황들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으로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들은 긴 복도를 지나쳐 세 번 모퉁이를 돌아간 다음, 계단을 수도 없이 올랐다. 바깥에서 봤을 때 지붕 위로 삐죽 솟아 있던 곳으로 가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럽다고 느끼던 중에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 걸음이 멈췄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나디아는 삐거덕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을 몰아쉬며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기사들이 아치형 문 안의 공간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인정사정없는 손길이었다. 나디아는 차가운 돌바닥에 맥없이 엎어졌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나무 문은 나디아가 다시 달려들기도 전에 쇠붙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굳게 잠겨 버렸다.

바닥에 찧은 무릎의 통증을 참고 재빨리 일어난 그녀가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대답 대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만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한참 후 지친 몸과 마음으로 문 앞에 주저앉은 나디아는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아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어. 황제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십 명의 기사들을 보았음에도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무기를 빼앗기고 구속된 아실이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황제의 기사들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에드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일말의 안도를 찾기 무섭게 다른 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괜찮아. 괜, 괜찮….”

몇 번이나 되뇌며 억지로 심호흡을 한 후에야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나디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 끝에서 다리를 크게 벌려 다섯 걸음을 걸으면 반대편 벽에 닿을 만큼 자그마한 방에 가구라고는 낡은 침대 하나와 작은 벽장, 동그란 테이블과 굴뚝이 있는 커다란 화로가 전부였다.

희미하게 먼지 냄새가 났고 몹시 추웠다. 한쪽에 나무 덮개가 닫힌 창문이 있었고 나무가 갈라진 틈으로 희미한 달빛과 함께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덮개의 크기로 보아, 창문도 이만한 크기라면 비쩍 마른 여자 하나가 빠져나가기 충분할 것 같았다.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 배어 나왔던 땀이 식으며 한기가 들었다. 나디아는 추위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으로 떨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나무 덮개는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삭아 있었고 경첩은 뻑뻑했다.

한참이나 씨름한 끝에 갑작스럽게 열린 창문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휘파람을 닮은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바람소리에 묻혔다.

눈도 뜨기 어려울 만큼 시린 바람이 몰아쳤다. 순식간에 체온이 몇 도쯤 내려간 것처럼 추위가 엄습했다. 저도 모르게 이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나디아는 덜덜 떨면서 쇠창살이 꽂힌 창밖을 내다보았고, 터무니없는 깨달음을 마주했다.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왔으면서, 어째서 창문으로 나갈 수 있다고 여겼는지.

흔들리는 그녀의 눈이 높이를 가늠했다. 5층 건물 정도일까? 마땅히 발을 디딜 만한 곳도, 단을 이룬 지붕도 이쪽 벽면에는 없었다. 나디아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불어 들어왔다. 그녀는 서둘러 덧창을 닫았다. 곳곳이 갈라져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덧창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멍하니 선 채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을 떼었다. 나디아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혹시나 이 방 어딘가에, 엘란츠 성을 떠나올 때 지났던 비밀 통로와 비슷한 것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녀는 가장 먼저 먼지가 가득 쌓인 벽장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안에서 부서진 판자 조각 외에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디아는 거미줄이 가득 낀 벽장 뒤를 마저 살펴본 다음,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아진 벽돌들을 하나씩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에 빨갛게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 녹이려 했지만 금세 다시 식었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입술 사이로 숨이 하얗게 부서지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나디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벽을 살피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렸다. 난방은커녕 단열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은 그녀의 체온을 앗아 가기만 했다.

나디아는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상박을 문지르다가 텅 빈 화로 근처를 살폈다. 하지만 장작으로 쓸 만한 것도, 부싯돌도 없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제자리에서 동동 굴렀다. 여행길에 아실이 말해 준 적 있는 체온을 올리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아실을 떠올리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억지로 삼키자 목울대가 싸하게 아팠다.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나디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으로 무언가를 짊어진 세 명의 기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고 들어온 작은 화로가 침대 근처에 놓였다. 잘 마른 장작 한 묶음을 문가에 적당히 내려놓은 기사 하나가 창문으로 다가가 낡고 삭은 덧창을 가볍게 뜯어냈다. 나디아는 그가 창문 위에 새 나무판자를 덧대고 못질을 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 슬금슬금 열린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한 기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들고 있던 짐 꾸러미를 건넸다. 푹신푹신한 담요와 한 뼘 크기의 술병 그리고 간단한 먹을 것이었다.

“고, 고마….”

짐을 받아 들며 무의식중에 감사 인사를 하려던 나디아는 이들이 그녀를 이렇게 가둬 둔 자와 한패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그녀가 숙련된 기사를 뚫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짐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죽였다.

자세히 보니 기사는 창문에 덧창을 새로 다는 것이 아니라, 봉쇄하듯 나무판자를 박아 넣고 있었다. 뻥 뚫려 있더라도 나디아는 그쪽으로는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전처럼 사무치게 춥지 않다면 그것만큼은 환영할 만했다.

그녀가 벽에 바짝 붙어 눈만 도르르 굴리는 사이 화로 쪽을 살피던 기사가 가장 큰 화로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몇 번인가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약간의 연기가 일고 새빨간 불길이 피어올라 날름거리며 장작을 삼키기 시작했다.

방이 좁은 덕에 훈기가 퍼져 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나디아는 얼어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라고 속으로만 열심히 빈정거렸다.

방 안에 들어온 이래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기사들이 태엽 인형처럼 제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문밖을 나섰다.

나무 문이 다시 닫히고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날 때까지 나디아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답을 알고 싶은 동시에 무서워졌다. 숨소리 하나조차 흘리지 않던 기사들의 모습으로 보아 제대로 답을 해 줄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녀는 비척거리며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근처로 다가갔다. 들고 있던 꾸러미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나디아는 불을 쬐며 꽁꽁 언 손을 잠시 녹인 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밀 통로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열심히 움직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결과적으로 나디아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홀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모조리 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자조했다.

대체 황제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에드윈은 황제를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하던 남자였으니 그녀가 아니어도 황제가 있는 곳으로 올 것이다. 굳이 그녀를 포로처럼 붙잡아 둘 이유는 없다고 여겨졌지만 모르는 일투성이였기에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무언가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그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에드윈과 연락할 방법도, 그에게 조심하라 경고할 방법도 없었다. 또한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아실을 구해 낼 수도 없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 경험은 이제껏 몇 번이나 있었지만 이번만큼 끔찍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내 이렇게 갇힌 채 밖에서 벌어질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그녀가 정을 준 남자가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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