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82화 (82/115)

82.

에드윈과 그 일행은 나스에서 며칠을 더 흘려보냈다. 그사이,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가 머무는 여관을 찾아왔다.

낯선 차림새인 한 무리의 기사들이 여관 앞에 멈춰 선 것을 우연히 목격한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선두에 선 여자를 알아보았다. 아델라 황녀, 전 엘란츠 후작 부인이자 에드윈의 어머니였다.

에드윈이 나디아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는 아델라가 선대 엘란츠 후작의 사망 후, 퀘른으로 돌아오라는 선황의 부름을 무시하고 망명한 곳이었다. 명목은 요양이었지만 더는 오라비에게 농락당하고 싶지 않았던 황녀의 최선책이었다.

지금껏 그녀는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으니, 나디아를 그곳으로 보낸다면 그녀 역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더라면 추적을 피한답시고 괜한 암호로 루트를 꼬는 짓 대신 최대한 빠르게 아델라에게 보낼 계획을 짰을 것이다.

선황의 마수에서 벗어난 그녀는 더 이상 에드윈이 어릴 적에 보았던 유리 인형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에드윈은 경계 태세에 들어간 기사들을 진정시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델라를 직접 만나는 것은 그녀가 엘란츠 성을 떠난 후로 처음이니, 10년도 넘은 셈이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말에서 내린 여인이 여행용 로브의 후드를 벗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감각하게 세월을 계산했다.

10년이 넘도록 떨어져 지냈던 모자간에 애틋한 재회 같은 건 없었다.

“연락도 없이 왜 오셨습니까.”

“10년 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게 다니?”

“그럼 눈물이라도 흘려 드릴까요?”

굳이 말을 가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낯선 기사가 불쾌하다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에드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델라는 혀를 찼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자 주제도 모르고 눈을 부라렸던 기사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에드윈은 아델라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 자신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온몸이 가라앉는 듯했다.

“어디 소속 기사입니까? 제가 보내 드렸던 기사들은 돌려 보내셨잖습니까.”

“3년 전에 말이지. 럼코르바 왕국군 소속이야.”

마치 그가 물어볼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델라의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드윈은 기사의 가슴팍에 수놓인 문양을 노려보았다.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 대답만으로 그가 쉬이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델라가 머무는 은신처는 럼코르바에 속하는 곳이긴 했지만 수도와 멀리 떨어진 시골 한구석이었다. 왕국의 기사와 얽힐 일은 치즈 부스러기만큼도 없어야 옳았다.

에드윈은 제 물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것이 분명한데도 모른 척 의뭉을 떠는 여인을 노려보았다.

“럼코르바에서는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랬었지.”

고작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진이 다 빠졌다. 며칠 내내 바짝 곤두서 있던 신경 탓인지도 모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 위를 갉작거리는 듯한 대화에서 오는 불쾌함. 에드윈은 그녀를 믿었지만 이런 식으로 진을 빼는 대화는 썩 달갑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심신이 지쳤을 때는 더욱.

“됐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하고 돌아가십시오.”

“돌아가라고? 내가 데려온 기사들의 숫자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니?”

그동안 쌓아 온 인내를 잃고 일어선 에드윈의 등 뒤로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제가 매달리기라도 바라십니까? 유도하지 말고 확실히 말하세요.”

한편에 차곡차곡 쌓여 가던 초조함 탓인지, 상대의 속내를 끄집어내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는 상대여서인지 에드윈의 여유를 잃은 모습이 드러났다.

“율리안의 위치를 알고 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말이었다. ‘초대장’으로 마법사들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것이었다. 또한 여전히 그곳에 율리안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함정일 수도 있고.

에드윈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함정일 확률이 높은 곳으로 부나방처럼 달려들 것인지, 아니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른 방도를 찾아볼 것인지. 과연 다른 방도가 존재하긴 하는지.

“…어떻게?”

“그자가 이끌고 온 게 네 병력의 두 배다. 타국에서 온 그만한 병력이 떠돌아다니는데 당연히 주시할 수밖에 없지.”

럼코르바의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끈질기게 감시가 따라붙었던 모양이었다. 소국 주제에 제법이었다. 운 좋게 율리안이 눈치채지 못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눈치채도 상관없었던 것이겠지.

럼코르바 공국은 소국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제국과 엮이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국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만큼 제국의 병력이 오래 머무는 것 역시 달갑지 않을 터.

그 반대 세력에 힘을 실어 줄 테니 얼른 끝내고 썩 꺼져 버리라는 속내일 것이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럼코르바의 기사단은 왜 어머니께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아델라는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쉰에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과 똑같은 보라색 눈이 반쯤 접히며 눈웃음을 그리자 신경질적인 인상이 부드럽게 변했다.

“내가 럼코르바 국왕의 제수(弟嫂)가 되었기 때문이지.”

에드윈은 그답지 않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턱을 매만졌다. 저가 관여할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자 복잡하게 휘몰아쳤던 생각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말 되는군요. 어머니께서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죠.”

선황을 치 떨리게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에드윈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선황은 죽었지만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선황을 쏙 빼닮은 율리안과 그가 하는 터무니없는 행동들을 감당해야 했던, 그녀를 빼닮은 에드윈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드윈은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를 흥분이 몸 안을 맴돌았다.

“어딥니까?”

“성급하게 굴지 마라. 왜 그렇게 초조해. 아, 그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마주쳐 오는 시선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 여자 때문이니?”

에드윈은 어설프게 부정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착각은 아닌지,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괜한 고집을 부리는 중인지. 아델라의 호기심 어린 눈이 스스로도 정의 내리지 못한 것들을 파헤치려 들자 입이 말랐다.

“럼코르바에서의 지원은 기사단이 다입니까?”

“그래. 마법사까지 내어 주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

아델라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려 드는 에드윈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라보며 순순히 대답했다.

에드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소국이 마법사를 여럿 데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데리고 있다 하더라도 쉬이 내어주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해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지원인 만큼 원래대로라면 무슨 속셈이 더 있을지 모른다며 단번에 거절했을 일이었지만 그 지원을 이끌고 온 사람이 아델라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에드윈은 다시 아델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문득 갈증을 느꼈지만 낮은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별거 아니야.”

에드윈은 그녀의 얇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끝나고 나면 그 즉시 모든 병력을 본국으로 되돌리고, 다시는 럼코르바 영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

일견 타당해 보이는 요구 안에서 에드윈은 쉬이 숨은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불가침 조약을 맺자는 겁니까?”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왕국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길 만했다. 기사단 하나를 빌려주는 것도 제법 큰맘 먹은 일일 것이다.

“제 권한이 아닙니다.”

“새 황제에게 물어보렴.”

부모님께 허락을 맡으라는 투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라슬로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럼코르바 입장에선 어떤지 몰라도 제국으로서는 이득도, 손해도 없는 일이었다. 굳이 불필요한 조약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

황좌의 주인은 이미 뒤바뀌었고 율리안을 죽이려는 것은 그저 후환을 없애 두려는 것뿐. 라슬로는 철저하게 득과 실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서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를 충동적인 조약을 함부로 맺으려 들 리가 없었다.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돌아가야겠구나. 잘해 보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인을 망연히 바라보던 에드윈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문고리를 붙잡자 그제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생각이 더 이어질 틈도 없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이 아델라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윽고 그는 아델라의 입가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웃음이 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는 아직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가녀린 어깨가 몇 번쯤 들썩이더니 낭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한참이나 웃은 뒤에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라. 네가 전전긍긍하는 게 너무 우스워서.”

“…어디까지가 농담입니까?”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놀음을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마법사들이 추리해 낸 좌표 근처를 헤매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할 듯싶었다.

“지금 돌아가겠다는 말은 농담이야. 물론 2안도 있어.”

아델라는 이번만큼은 애태우지 않았다. 에드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차를 한잔 마셔야겠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혼인 동맹이지.”

“터무니없군.”

아델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이번 건을 빌미로 어떻게든 무언가 얻어내고자 하는 럼코르바 왕의 속내가 모두 읽혔다. 모두 거절당하더라도 본전이었고, 하나라도 얻는다면 이득인.

터무니없는 소리라 여기면서도 집어치우라고 일갈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델라가 저렇게 흥미로운 눈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에드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의 순간이었다.

“저하께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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