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버지의 오랜 친우였던 자는 에드윈이 아주 어렸던 때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선황과 선황의 끔찍한 짓으로 태어난 핏줄을 싫어했다는 말이 옳았다. 에드윈 역시 저에게 적의를 숨기지 않는 사람을 좋아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십시오. 늙은이 헛소리에 할애할 시간 없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에드윈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율리안을 도와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는 언제고 이젠 저하를 돕겠다?”
“잊으셨나 본데 황자 저하의 목숨을 붙여 놓은 것도 접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라펠트 후작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고 그만큼 서로를 향한 적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 도움을 받기로 한 건 저하의 선택입니다. 불만이 있다면 그쪽에 가서 따지시죠.”
그렇지 않아도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을 거스르는 상대가 나타나자 감정을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입 안에 혀 대신 칼이 돋아난 것처럼 휘두르고 싶어졌고 지금은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시군요. 윗사람에게는 찍소리도 못 하면서 만만한 곳에 왈왈거리는 그 졸렬한 성정 말입니다.”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었다.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라펠트 후작과 라슬로 황자 사이에 나누어야 할 이야기였지, 제게 와서 백날 짖어 보았자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이번 일로 그를 추궁한다면 에드윈도 할 말은 있었다. 먼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이 누군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따져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라펠트 후작의 얼굴을 살피지도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런 늙은이가 아니어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산더미만큼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만 빠듯하게 이틀이 걸렸다. 떠나기 직전, 에드윈은 라슬로 황자만큼은 직접 찾아가 떠날 것을 알렸다.
***
짙푸른 바다 위로 갈매기 대신 매 우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천적의 출현에 바닷새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에드윈의 옆에 서 있던 부관이 휘파람을 길게 불자 매가 공중을 선회하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이윽고 기사의 팔 위에 내려앉은 매의 발목에 묶인 작은 가죽 주머니가 불룩했다.
기사가 재빠른 손길로 주머니를 열어 돌돌 말린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각하.”
에드윈은 끈을 풀어내고 종이를 펼쳤다.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서신을 읽던 그는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니. 황궁에서부터 시작되어 말을 달리고 배에 올라 강을 타고 내려오는 내내 시달렸던, 이유 모를 불안에 근거가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그의 금발을 헝클어뜨렸다.
그가 던지듯 건네준 손바닥만 한 양피지 조각에 마법사가 불을 붙였다. 종이는 순식간에 재만 남기고 불타 사라졌다.
에드윈의 계산대로라면 지금쯤 도착했다는 서신이 날아들었어야 했지만 자그마한 쪽지에는 그의 부인이 아직 은신처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저 에드윈이 생각했던 날짜 계산이 틀렸든가 생각지 못한 사고로 도착이 늦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르네일에서 그가 남겨 두었던 코드가 제대로 작동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최악의 결말에 대한 시나리오 중 하나가 실현되었을 가능성뿐이었다. 그렇다면 에드윈은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에 따른 대처를 하면 될 일이다.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사흘이면 도착합니다.”
시간을 재촉해 최대한 빨리 내려왔지만, 시간은 이미 열흘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말을 탔다면 보름은 훌쩍 넘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나치게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 느껴 보는 초조함이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에드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복잡한 감정들을 갈무리했다.
그들이 탄 배는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마법사들의 힘을 빌려 순항 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나흘 후, 나스의 항구에 닻을 내렸다.
에드윈은 이번에도 르네일에서 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남겨 놓은 코드가 제대로 사라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호위를 맡을 기사 세 명과 함께 사과주로 유명한, 나스에서 제일 큰 여관의 지하 술 저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에드윈은 진작 사라졌어야 했을 마력의 잔재를 느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의 손이 벽 한쪽을 훑자 글자가 스르르 나타났다가 부서지듯 사라졌다.
그는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던 마력 잔해를 손을 흔들어 흩트렸다. 이가 갈렸다. 어디서부터 새어 나갔지?
머릿속으로 몇몇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그리 많은 사람을 동원한 계획도 아니었다. 보안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었지만, 이렇게 됐으니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찾아.”
그의 부인이 있는 곳에 율리안도 있을 것이다. 따로 찾을 수고는 필요 없게 되었지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깊은 분노가 들끓는 에드윈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 한 명이 서두르는 걸음으로 지하를 빠져나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나스의 곳곳으로 흩어진 기사들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에드윈은 여관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초조하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주석 잔을 가득 채운 달콤한 사과주의 향기도 그의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넓은 여관 안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리 구석진 자리를 골랐어도 그 주변에 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은 딱히 몸을 숨기거나 조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저의 정체를 추측하려는 듯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을 무시했다.
“라르고.”
“예, 각하.”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던 부관이 대답했다.
“감시자들로부터의 연락은?”
“없습니다.”
에드윈이 사람을 시켜 감시하고 있던 율리안의 은신처는 네 곳이었다. 그중 어디에서도 소식이 없다면 그가 알지 못하는 은신처가 더 있다는 이야기인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알고 있는 게 전부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허탕이라는 소식을 듣자 허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틀 후, 에드윈의 기사들은 땅속의 사과라는 보석을 팔았다는 보석상을 찾아냈다. 하필이면 이 도시에서, 하필이면 그가 만든 암호와 똑같은 이름의 보석이, 하필이면 이 시기에? 수상하기 짝이 없는 소식이었다.
에드윈은 그를 잡아들이라 명령하지 않고 직접 그 보석상으로 들이닥쳤다. 기사들이 영업 종료 간판을 내걸고 문을 닫아 건 뒤 내부를 꼼꼼히 뒤지기 시작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 있던 중년의 사내는 에드윈이 그의 어깨를 살짝 밀자 맥없이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떡 벌렸다. 에드윈 사내에게로 허리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소리 지르면….”
소스라치듯 놀라며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다문 사내가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안 되겠지?”
눈치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에드윈은 음산하게 웃으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2층과 지하를 모두 뒤지고 돌아온 기사들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윈은 턱을 매만지며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을 거닐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저, 저 나리께서는….”
“쉿.”
에드윈이 검지를 펼쳐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질문은 내가 해.”
말은 잘 듣는 사내를 내려다보던 에드윈이 혀를 찼다. 온 도시를 뒤져서 찾아낸 실마리가 이것 하나라니.
이 사내에게서 앞으로의 목적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쑤석거려 봐야 했다. 율리안이 초대장이라도 보내 준다면 참 좋겠는데.
에드윈이 그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율리안 역시 에드윈을 처리하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나디아를 유인한 것도 그를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율리안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싶었고, 설령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저 에드윈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정말로 초대장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는걸.
에드윈은 방 안을 맴돌던 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사내를 들여다보았다. 떠는 모양이 이상했다. 그저 겁에 질려서 떠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잘게 덜덜 떨리던 몸의 진동이 점점 거세져 의자까지 덜컹거릴 정도였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사내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기사들이 다급하게 에드윈의 앞을 가로막았고 마법사 두 명이 서둘러 방어 마법을 펼쳤다.
이윽고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내의 몸이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방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충격으로 굳어 있는 그들의 귓가에 비명 소리가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이런 짓을 벌인 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사내가 죽은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판단한 마법사들이 마법을 거둔 뒤 에드윈에게 물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영락없이 영광의 홀이 무너지던 때가 떠올랐었다. 에드윈이 이번 일로 깨달은 것은 율리안 역시 그저 에드윈의 죽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에드윈이 원하는 것처럼, 직접 그 목숨을 앗아 가고 싶은 것이었다.
의자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모래 사이로 완벽한 구체인 흰색 돌이 굴러떨어졌다.
“이건….”
“초대장이겠지.”
그게 아니면 이런 장치를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율리안이 제법 심심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에드윈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 돌이 어디든 가리키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돌이 가리키는 곳에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율리안도, 에드윈도 알고 있었다. 에드윈이 알면서도 달려들 거라는 사실을.
내도록 감정을 부정하고 행동을 합리화하려 애썼지만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겁 많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가 율리안의 손아귀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어쩌면 이런 것 역시 율리안이 함부로 지껄이던 ‘사랑’에 속하는지도 모르지. 에드윈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