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10년 전, 율리안의 명령으로 황태자를 죽이러 갔던 에드윈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을 만한 치명상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그때 에드윈이 느꼈던 망설임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건지는 지금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어쩌면 뼛속까지 뿌리내린 황가에 대한 복종이 방해했던 것일 수도 있었고, 혹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의 무의식이 먼저 눈치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율리안과 라슬로는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물과 기름처럼 달랐다. 율리안은 아버지인 황제를 더 닮았고, 라슬로는 어머니인 황후를 닮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감출 생각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율리안과 이성적이고 온화한 라슬로. 군주에 걸맞은 성품을 지닌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라슬로였다.
장자였고, 율리안이 걷거나 말하기도 전에 이미 황태자가 되었던 터라 누구도 다음 황제가 라슬로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선황이 지병으로 서거한 그날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율리안이 2황자 바이런을 처리하러 갔고, 에드윈은 라슬로를 죽여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10년 만이군.”
황궁을 익숙한 듯, 또는 낯선 것처럼 바라보던 라슬로가 성큼성큼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껏 그를 숨기고 지키며 변치 않는 지지를 보내왔던 북부 귀족들이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는 얼굴로 주위를 경계했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망토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희미한 피비린내가 났다.
“율리안은 아직인가?”
“면목 없습니다.”
에드윈은 평소 하던 것처럼 건방지게 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탓하려는 게 아닐세.”
사르코 공작을 위시하여 에스텔 황후를 황제로 세우려던 중부 귀족 중 살아남은 자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라슬로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윈은 그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구심점을 잃은 자들이었고, 또 다른 세력을 결성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자들은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
“이리 쉽게 돌아온 것도 다 그대 덕이 아닌가.”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에드윈은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거래나 잊지 마십시오.”
냉랭한 말투에 옆에서 눈을 부라리던 초로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건방진…!”
에드윈의 말에 당장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라펠트 후작의 어깨를 붙잡은 것 역시 라슬로였다. 평소의 성정을 드러내듯 눈가의 주름이 온화하게 접혔다.
“잊지 않았네.”
십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천장화와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을 둘러보던 라슬로 황자가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는 듯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자, 그러면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좀 씻고 쉬자고. 나흘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달렸더니 온몸이 찌뿌둥하군.”
“술이나 입 돌아가게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윈은 괜스레 초조해졌다.
입술을 짓씹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은 것은 그가 라슬로 황자의 일행과 분리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알마스 백작과 여전히 무언가에 홀린 듯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중부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였다.
“엘란츠 후작! 이게 대체….”
“왜들 그러십니까?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군요.”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드러났던 초조를 갈무리하고 태연한 낯을 가장하여 그들을 굽어보았다. 이들의 넋 나간 얼굴을 구경할 순간을 기대했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불안은 여전히 발밑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분명, 율리안 때문일 것이다. 이 불안감은 율리안이 죽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에드윈은 확신했다. 이런 곳에서 귀족들 따위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에드윈은 그동안 갈고닦았던 본인의 특기를 십분 발휘했다.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징그럽게 달라붙는 그들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지나쳐 갔다.
회랑을 가로지르자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망토 자락을 헤집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상반된 감각이었다. 에드윈의 옅은 금발이 하얗게 빛났다.
“잉그램 공작은?”
아무도 없는 곳에 속삭인 말이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지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율리안이 잉그램 공작에게 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거둘 수는 없었다. 잉그램 공작가는 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작이 수도의 정치판에서 한가락 하던 인물이었던 만큼 그가 충성하던 황권이 약해진 상황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지켜봐. 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에드윈은 잠시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라슬로 황자가 머물기로 된 방이었다. 에드윈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나지막한 대답에 망설일 것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그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쳐 오는 라슬로 황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율리안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대가?”
“제게 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두꺼운 망토를 벗어 의자 위에 대충 걸친 라슬로가 수염이 자라 덥수룩한 턱을 매만졌다.
“그거야 그렇지만, 추적대는?”
“아직입니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율리안의 은신처에 잠복 중인 자들로부터도, 잉겔에서 그대로 율리안의 뒤를 따라붙었을 추적대도, 또 두 번째로 보냈던 추적대 역시 별다른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율리안을 목격했다는 소식 역시 딱히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사들을 대거 이끌고 갔을 테니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는데.
“짐작 가는 데라도 있나?”
에드윈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높은 별, 파란 고래, 황금 잔, 산들산들 비바람…. 그리고 침대 위의 아네모네.
“좋네. 그만 캐묻도록 하지. 그대 뜻대로 하게.”
그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모르지만 라슬로는 옅게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그대가 이 정도나 해 주었는데도 못 받아먹으면 등신이지.”
에드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겸손으로 낮추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라슬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율리안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율리안이었다면 쉬이 물러나지도, 또 에드윈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았겠지. 에드윈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변화를 실감했다.
“감사합니다.”
“언제 출발하려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미리 준비해 온 것도 아니었고 그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게다가 라슬로와 오늘 저녁 만찬 정도는 함께해야 했다. 라슬로가 황제가 되면서 적지 않은 권력을 움켜쥐게 될 북부 귀족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에 척을 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늦어도 이틀 후엔 떠날 생각입니다.”
“좋네. 여긴 내가 알아서 하지.”
라슬로 황자는 제법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그 성정만큼 깔끔한 일처리를 보여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그저 자신이 시작한 일을 직접 끝내지 못한다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율리안을 죽이는 것도 일종의 끝이니 그저 노선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다.
율리안의 흔적에 대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를 찾을 가능성이 줄어들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음모를 꾸밀 시간을 벌어 주는 셈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
애초에 율리안의 추적에 이렇게 난항을 겪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작은 실마리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외면하려 애쓰던 것들을 마주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에드윈은 어린 부인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로 향하는 루트를 따라갈 셈이었다. 노골적인 예고도 있었으니 거의 확실했다.
딱 율리안이 할 만한 짓이었다. 아마 보복, 또는 단순한 즐거움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율리안이 얼마나 그를 우습게 생각하는지 그 일면을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저녁 만찬은 식사나 담화보다는 술에 집중되었다.
아직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야만인들은 시종들이 술통을 나르기가 바쁘게 값비싼 포도주를 계속해서 비웠다.
쉼 없이 잔을 들이켜는 남자의 수염에 자주색 얼룩이 남았다. 쾅쾅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는 행동에 몇 번인가 크리스털 잔이 부서져 나갔다.
혀 차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만한 광경이었지만 에드윈은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미소를 띠었다. 북부의 무력은 쉬이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에드윈의 손짓에 시종들이 크리스털 잔 대신 주석 잔을 내오기 시작했다.
“술에 물이라도 탔소? 밍밍하구먼.”
“어디 술이지?”
“자일카.”
저들끼리 떠드는 말에 대답하자 입이 딱 다물렸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자리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있을 터. 남부인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대놓고 남부산 술을 헐뜯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국가였다. 북부와 남부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두 지역은 교류하기 어려웠고 문화의 차이는 가히 다른 나라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극심했다.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 따위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고, 북부인들은 남부인들을 까탈스럽기가 마누라 못지않다며 비웃었다. 그 둘 사이가 좋지 못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두 세력은 중부를 압박하고 라슬로 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에드윈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라슬로 황자가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슬로에게 제법 공손한 태도로 인사한 에드윈은 홀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주황색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에드윈의 등 뒤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애송이.”
아무도 없는 복도에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드윈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을 뒤로한 덩치 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역광이 져 어두운 얼굴에서도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펠트 후작, 살아 계셨군요. 마땅한 소식이 들리지 않기에 진작 관에 들어가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누가 보면 믿어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한 줄 알겠군요.”
에드윈의 입가로 선명한 비소가 어렸다. 저 작자와는 예전부터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