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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79화 (79/115)

79.

엘하임에서 벌어진 일은 남겨 두고 온 기사들이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일이었고 오히려 예상대로라 기꺼울 뿐이었다. 쿠르쉬드에게 만일의 경우 나디아를 피신시키라 지시하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율리안의 도발을 보니 그게 옳은 선택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율리안은 그 여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에드윈은 불안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그분께 퀘른으로 오시라고 전해.”

한참을 침묵하던 에드윈이 뱉어 낸 말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라르고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

불길함이 언제든 기회를 노려 뒷덜미를 낚아채려는 것처럼 등 뒤를 맴돌고 있었지만, 에드윈이 직접 나서서 율리안을 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꼭 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추적대를 파견했고 또한 사전에 율리안이 각지에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마다 사람을 심어 두었으니 율리안이 은신처로 숨어든다면 그들 중 하나는 연락을 해 올 것이다.

율리안이 그곳으로 갈 것이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고, 에드윈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은신처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에드윈이 준비해 두었던 은신처로 향한 길을 훑어가는 일 역시 지금은 위험하다 여겨졌다. 그저 그의 안배대로 무사히 도착했길 바라며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각하.”

언제 나타났는지 등 뒤로 따라붙은 심복이 은밀하게 그를 불렀다. 에드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뭐지?”

“저하께서 포름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흠. 턱을 매만지던 에드윈이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포름이라면,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나흘 후엔 퀘른에 도착하겠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모두가 놀라 나자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 꼴이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마침 몇 시간 전에 마법사들로부터 에스텔 황후가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사르코 공작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며 마법사들의 목을 다 베어 버리려 들었지만 한쪽 다리를 잃은 그는 혼자 힘으로 서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 몸으로는 마음껏 날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마법사들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사르코 공작이 충격을 수습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루에 몇 번씩, 분을 못 이겨 내지르는 피 끓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잃은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가져온 지팡이를 휘두르던 늙은이는 후계자인 알마스 백작이 들어와 말릴 때까지 날뛰곤 했다.

“노인네 기운도 좋군.”

에드윈은 혀를 찼다. 에스텔이면 몰라도 사르코 공작은 좀 더 쓸 만할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피곤하게 굴기만 했다. 아무리 대단한 자였어도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이라고 고소했다.

기왕 이렇게 될 거, 저 늙은 여우가 가장 먼저 죽었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그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된 셈이니 율리안에게 감사 인사 한 번쯤은 해 줄 마음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분을 어느 정도 털어 냈는지 날뛰기를 그만둔 공작은 고작 다섯 살 먹은 황태자를 불러들였다. 실력이 출중한 공작가의 기사를 몇 명이나 호위로 붙여 주면서, 그는 당장이라도 누군가 제 어린 외손자를 해치려 들지 모른다는 듯 신경을 곤두세웠다.

에드윈은 솔직히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늙은 여우라는 별명에 걸맞은 상황 판단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황태자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처리하고 싶었다. 그보다 더 영향력이 크고 힘 있는 사람을.

황태자는 외할아버지인 공작의 비호만 사라진다면 견제할 필요도 없었다. 고작 다섯 살이니 본인보다는 단단하게 지탱해 주고 있을 주변 사람들을 쳐 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중부 귀족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은 것 역시 사르코 공작이었다. 중심을 무너트리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명분으로 밀어붙이면 될 일이었다.

“라르고.”

“네, 각하.”

“마법사를 불러와.”

황궁에도 그가 심어 놓은 마법사는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란 전쟁에 나가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을 만한 대형 마법을 선보이는 것은 기꺼워했지만 위대한 명성은커녕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첩자 노릇은 하려 들지 않았다.

용병처럼 돈이면 뭐든지 하는 자들도 아니었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도 없는 이들에게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해 보았자 소용없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빚을 지우는 것. 그것도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일로는 안 되었다. 목숨을 걸 만한 일에는 목숨의 가치에 준하는 빚이 필요했다.

황궁에 심어 둔 마법사는 총 두 명이었고 모두 에드윈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에드윈은 그중 한 명을 불러들였다.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저기서 치료사 대신 마법사를 불러 대고 있었으니 특별히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고, 조심한답시고 괜히 눈치를 보다가는 오히려 더 의심스럽게 여겨질지도 몰랐다.

“이번 일을 잘 끝내면, 빚은 없던 일로 해 주지.”

마법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게 없었다.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에드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분’이 도착하기 전에 황궁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 게 좋겠지.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일의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각 가문에서 시신을 수습할 인원들이 올라오자 황궁은 더욱 복잡해졌다.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여름이었다면 아무리 마법을 쓴다 해도 시신이 썩으며 풍기는 시취를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시신은 유족들이 수습했고, 핏물이 지저분하게 말라붙었던 계단은 깨끗하게 청소되었고, 동산을 이루었던 건물 파편들 역시 정리되어 영광의 홀이 있던 자리는 바닥 부분만 덩그러니 남았다.

번잡한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무렵, 사르코 공작이 고열로 앓아누웠다. 패혈증이었다.

패혈증은 생각보다 흔한 질병이었다. 공작의 부상이 제법 컸던 만큼 납득하기 어려운 병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역의 주동자였던 두 사람이 죽음에 기로에 선 상황이었다.

“현재, 쇠약해지셔서 치유 마법을 견디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에드윈과 모종의 거래를 했던 마법사가 알마스 백작 앞에서 침통한 낯을 가장하여 공작의 상태에 대해 보고를 했다. 그의 뒤편으로 끙끙 앓으며 헛소리를 웅얼거리는 노인네의 모습과 제 아비의 죽음을 직감한 아들의 모습은 제법 비극적이었다.

패혈증쯤은 마법사 두엇만 있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증상이었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치유 마법은 기적이 아니었다. 본래 몸의 치유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대상의 상태가 치유 마법을 견뎌 내지 못한다면 쓸 수 없었다. 공작에게는 불운이었고, 그의 죽음을 바라는 에드윈의 입장에서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그럼 얼마나….”

“약을 처방하고 몸 상태가 마법을 견디실 수 있을 만큼 호전된다면….”

에드윈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벌에 쏘인 망아지처럼 날뛰던 공작에게 쇠약이란 말이 가당키나 한가? 입술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마법사의 솜씨가 흡족했다.

공작의 몸이 호전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모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그들도 결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상자들이 머무는 별궁에서는 쉼 없이 약을 달이는 냄새가 났고 죽음의 그림자가 무거운 안개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황제도, 황후도 없는 황궁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대신하는 것은 다섯 살 난 황태자가 아니라 에드윈이었다. 황궁의 하인들은 임시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인물이 퀘른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날아들었다.

저만치서 펄럭이는 깃발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에드윈은 제법 상쾌한 기분으로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새로운 태양이 뜨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에드윈의 뒤로 도열한 기사들과 그의 파벌들 역시,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선명한 금발과 푸른 눈, 한 핏줄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다는 듯이 더없이 닮은 얼굴. 기나긴 행렬을 구경하러 나온 평민 중에도 선두를 이끄는 남자의 얼굴에 서린 영광을 알아본 사람은 있었다.

황족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들과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선 사람들 사이로 순식간에 누군가의 이름이 술렁거리며 퍼져 나갔다.

“저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말 위에 올라탄 남자의 뒤로 태양이 강렬하게 빛났다. 에드윈은 새로운 주군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에드윈의 뒤를 따른 자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말에서 내린 남자가 감회에 젖은 듯 변함없이 우뚝 선 황궁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영광의 홀이 있었던 빈자리를 훑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저건 율리안의 짓이겠군.”

“그렇습니다, 저하.”

“일어나도 좋네.”

전 황태자이자 율리안의 큰형, 라슬로의 손이 에드윈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드윈이 몸을 일으키자 그 뒤의 사람들도 일어설 수 있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한 전 황태자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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