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06. 에드윈 엘란츠
율리안을 놓친 것도, 엘하임이 습격당할 것도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영광의 홀을 채운 귀족들의 긴장한 얼굴을 보며 다음에 실행할 계획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려던 에드윈은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소리였다. 우웅, 하고 공기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로부터 퍼져 나온 마력 파동이 예리하게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본 에드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각하!”
뒤에 버티고 서 있던 기사들이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채고 에드윈의 몸을 잡아끌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제 몸을 날려 그의 몸 위를 덮었다.
세 명의 기사들에게 깔려 넘어지기 전, 빠른 속도로 무너져 떨어지는 커다란 파편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에스텔 황후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르코 공작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윽고 머리가 울릴 만큼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홀의 천장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거대한 돌조각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기사의 가슴팍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에드윈이 위기를 느끼자 만일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방어 마법이 작동했다.
돔형의 튼튼한 실드 위로 떨어진 건물 파편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주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은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며 나는 굉음과 비명, 울부짖음 따위의 요란스러운 소음들이 잠잠해져 주변이 적막에 감싸일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욱하게 차올랐던 흙먼지가 반쯤 가라앉자 에드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충성스럽게 제 몸을 던져 에드윈을 살리려 했던 기사들은 방어 마법의 힘으로 목숨을 구제했다. 그들은 망연한 얼굴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보다 에드윈이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빠릿빠릿하게 일어났다.
잠시의 적막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바깥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울음소리와 비명,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들이 건물 잔해에 깔린 채 간신히 뱉어 내는 신음 따위로 성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매캐한 먼지 냄새 사이로 피비린내가 감겨들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에드윈의 생존을 확인하고 안도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신발 밑창이 흘러 내려온 핏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이를 갈며 내뱉었다.
“…생존자를 찾아라. 그리고 마법사들을 불러와.”
명령을 들은 기사들이 충격을 수습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인 건물 파편을 들어 옮기고, 납작하게 눌린 시체들과 혹시라도 운 좋게 숨이 붙어 있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효과가 다한 방어 마법은 빛이 꺼지듯 사그라들었고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물방울이 콧등에 떨어졌다.
에드윈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득 뒤덮었던 먹구름이 품고 있던 물방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공기 중을 떠돌던 먼지들이 비에 씻겨 내려갔다. 매캐한 먼지 냄새는 사라졌지만 피비린내는 강해지기만 했다. 빗물에 젖어 얼굴 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려 했던 에드윈은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쓰게 웃었다.
그는 길이 트이기 시작한 건물 잔해 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아름다웠을 백색 계단 위로 핏물 섞인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광경은 몹시 끔찍해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위로 늘어선 시종과 시녀, 각 가문에서 차출되었을 기사들과 경비대들 모두 넋이 나갔거나 공포에 질린 얼굴로 무너진 영광의 홀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은 에드윈뿐이었다. 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던 귀족의 반절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몇몇은 발견 당시에 숨이 붙어 있었으나 다른 건물 안으로 옮기기 전에 죽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불구가 될 만큼 큰 상처를 입은 자들과 기적적으로 경상으로 그친 자들의 수습은 에드윈이 지휘하게 되었다.
엘하임에서 데려온 스물 가까이 되는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에드윈은 그들에게 다른 마법 장치가 없는지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고 일부 기사들과 함께 별관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불려 온 황궁 소속 마법사와 치료사들이 드넓은 연회장 한쪽에 허둥지둥 치료소를 차리는 것을 보며 에드윈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건물 잔해에 납작하게 짓눌린 탓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의 형태가 남아 있는 자는 몇 없었다. 그들의 옷과 소지품 따위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으로 신원을 파악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그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셈을 했다. 순식간에 가주를 잃은 가문이 여덟, 그중 당장 후계자가 없는 가문이 둘. 그리고 그 사이에 에드윈의 가신이 둘이었다. 그들을 따라왔던 기사와 하인들을 생각하면 사상자 수는 배의 배를 넘어갔다.
“각 가문에 전령을 보내라. 가주의 부고를 알리고, …하아.”
“각하, 괜찮으십니까?”
눈에 띄게 지친 얼굴을 한 에드윈을 보며 부관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에드윈은 대충 손을 흔들며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중얼거렸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율리안이 제정신이 아닌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긴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공모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싶었을 테지. 하지만 그 방법이 이 거대한 영광의 홀을 무너트리는 무식한 방법일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건 명백한 실수였다.
뒷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린 채 황좌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드윈은 처음으로 율리안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한 번 제 손안에 들어온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놓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언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율리안이 즐겨 피우곤 하던 환각제였다. 가끔 피우는 것은 괜찮지만, 그런 종류의 약이 다 그렇듯이 과용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판단력이 떨어지며 충동적으로 변하고 약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졌다.
율리안은 일견 방탕해 보였지만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인간이었다. 약 따위에 휘둘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에드윈은 여전히 비가 오는 바깥을 내다보다 떨어지지 않던 걸음을 옮겼다. 황궁의 연회장은 옮겨 온 부상자들로 가득했고 그곳을 지나쳐 병실이 되어 버린 손님용 방을 몇 군데 지나쳤다.
하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벽에 매달린 램프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에드윈은 밝아진 복도를 걷다 반쯤 열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약을 끓이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치료사들이 의견을 나누는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드윈은 두어 번 문을 두드려 저의 방문을 알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둘러 인사하는 치료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한 에드윈은 안락의자 위에 파묻힌 것처럼 앉아 있는 사르코 공작에게 다가갔다.
한쪽 다리를 잃은 노인의 얼굴은 상처로 엉망이었지만 제 상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그의 시선은 침상 위에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에스텔 황후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좀 어떻습니까.”
“…좋지 않소.”
노쇠한 사내의 눈이 감출 수 없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에드윈은 딸을 잃을 위기를 맞닥뜨린 한 아버지를 표면적으로나마 위로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치료사들과 마법사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에드윈의 시선이 눈에 띄게 움푹 들어간 에스텔 황후의 머리와 치료사들이 닦아 내고 닦아 내도 다시 피에 젖어 드는 귓가를 스쳐 지났다.
그리고 붕대로 칭칭 동여맨 사르코 공작의 오른쪽 다리와 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망토 역시.
사르코 공작은 몰라도 에스텔 황후는 언젠가 처리할 생각이었기에 낭패라 여기지는 않았다. 이번 일로 인해 사르코 공작이 율리안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게 된다면 그것만큼은 잘된 일이었다.
“후작은 상처 하나 없군.”
몇 초 남짓, 아주 잠깐 동안 에드윈은 그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합니까?”
“아닌가?”
마주한 회색 눈은 분노로 이성을 잃은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쉬이 가라앉지 않을 의심으로 번뜩이는 것도 아니었다. 에드윈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고소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꾸민 짓이었다면 홀이 무너지기 전에, 적어도 내 가신들은 내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공작이 정말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딸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고 보니 다른 것을 탓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거겠지.
“누구든 원망하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대상을 잘못 골랐습니다, 공작.”
침묵하는 공작을 뒤로한 채 에드윈은 방을 나섰다. 잉겔에 다녀온 추적대를 만날 차례였다.
에드윈이 상황을 예측한 것처럼 율리안 역시 여러 가지를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쉼 없이 생각하다 보면 잠깐 멎었나 싶던 두통이 다시 일었다. 누가 더 많이 아느냐, 예측이 얼마나 정확한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그리고 에드윈은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 승리자가 자신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율리안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비상하게 빠른 놈이었다. 무엇도 온전히 믿어 본 적 없는 의심병 환자의 진가가 발휘된 순간이었다.
추적이 미처 따라붙기도 전에 도망쳤는지, 그들이 잉겔에 도착했을 때는 율리안의 머리털 한 올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웠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침대 위에 놓인 것은 흰 아네모네 한 송이였다.
에드윈은 추적대가 유리병에 담아 온 시들시들한 꽃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저급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알키드와의 평화 협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일부 세력이 주도한 습격이 엘하임을 덮칠 것도 알고 있었고, 그 혼란을 틈타 율리안이 나디아를 노리려 들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율리안이 도망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역시 열어 두었는데, 모든 것이 예상 범위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아네모네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잉그램가를 상징하는 꽃이 저 보란 듯이 놓여 있는 건 나디아에 대한 위협인 동시에 그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수작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비아냥대듯이 물어보던 율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흥미와 저열한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눈.
에드윈은 코웃음을 쳤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여자가 저에게 뭐라고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한단 말인가? 물론 도망칠 길을 마련해 놓은 만큼 될 수 있으면 무사하길 바랐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여자의 목숨 줄을 붙잡고 뒤흔든다고 해서 에드윈이 무릎 꿇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 말할 대상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일단은 쓸데없는 걱정에 젖어 있기보다 율리안을 추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의 숨통을 끊어 놔야지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