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77화 (77/115)

77.

“어, 어떻게….”

말을 꺼내는 나디아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그를 피해 도망 다녔던 시간들,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며 행선지를 숨기기 위해 애썼던 모든 노력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허탈했다.

그렇게나 조심했는데 어째서? 에드윈이 수도로 갔던 것은 황제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는 어떻게 된 거지? 수많은 의문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말하던 날 선 얼굴이 떠올랐다.

실패한 걸까? 그렇다면 역시 에드윈은….

그동안 홀로 해 왔던 수많은 부정이 사실이라고 코앞에 들이밀어진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황제가 손을 내밀자 기사 중 하나가 그에게 단도를 건네주었다. 황제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화려한 검집에서부터 은빛으로 빛나는 짧은 검신이 빠져나왔다. 나디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이라도 그가 단도를 그녀의 가슴에 내리꽂을 것 같았다.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황제가 칼을 휘두르는 상상이 실제처럼 생동감 넘쳤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나디아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덜덜 떠는 사이 황제가 쥔 단도는 그녀의 공포를 즐기겠다는 듯이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턱 아래까지 다가온 칼날에 나디아가 눈을 질끈 감아 버리자 황제가 즐겁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 잡은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여유였다.

잘 벼려진 칼날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파고드는 대신 옷깃을 들추기 시작했다. 옷자락의 곳곳이 베어져 너덜거렸다. 이윽고 약간의 금속성(金屬聲)과 함께 칼끝에 걸려 나온 목걸이를 들여다보는 황제의 얼굴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그가 손에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목걸이의 가느다란 줄이 끊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디아는 바들바들 떨며 다시 눈을 떴다. 황제가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걷어차자 매끄러운 바닥을 맥없이 밀려나간 목걸이가 두꺼운 로브를 걸친 남자의 발에 부딪혀 멈췄다.

“꽤 솜씨가 좋은 자입니다.”

“그러면 뭐 하나. 쓰는 자가 멍청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나디아가 상상하던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한 노인이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발을 들어 짓밟았다. 그리 힘을 준 것 같지 않았는데 그의 발아래에서 타샤가 주었던 목걸이가 작은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마치 그 루비처럼….

불현듯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 상점에서 구매했던 루비가 황제가 뿌린 술수였다면? 아니, 비약이었다. 그들이 땅속의 사과를 찾는 줄 황제가 어떻게 알고 그런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루비가 깨질 때 목걸이가 반응한 것은 에드윈이 준비한 고약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자칫하면 목걸이는 이미 버린 후였을지도 모르니까.

딱 에드윈이 할 법한 일이라 생각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에드윈이 벌인 짓이 아닌지도 모른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나디아의 얼굴 위로 충격이 스며들기 시작할수록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지 눈치챈 것처럼 황제의 얼굴 위에 고인 웃음이 진해졌다.

그의 즐거움에 한몫 더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나디아는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땅속의 사과….”

“하하, 좀 더 눈치가 빨랐으면 좋았을걸.”

나디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즐겁고 또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모습을 봐도 두려움만이 자꾸만 짙어졌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마저 들썩여 가며 웃던 황제는 간신히 웃음을 그친 뒤 그 잔향이 짙게 남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몰랐어? 하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롱이 이어졌다.

“솔직히 허술하기 짝이 없었잖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타샤의 목걸이가 반응한 것은 그저 에드윈이 해 놓은 장치 중의 하나인 줄 알았다. 사람 외의 것에도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는…. 얼마나 바보 같은지.

“에드윈을 죽이기 전에 즐길 여흥으로는 더할 나위 없군.”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홀로 결론을 내렸던 에드윈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써 왔던 나디아는 그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흐려졌던 시야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다시 밝아졌다. 턱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에드윈이….”

“다시 만나게 해 줄게. 바로 헤어지겠지만…. 금방 만날 테니까.”

넋이 나간 것처럼 황제를 올려다보던 나디아는 그의 말에서 에드윈이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여야 했다.

황제는 당장이라도 에드윈이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디아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엘란츠 성을 떠나오면서 내내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꺼내 놓았다.

“왜 나를…. 이유가 뭐죠?”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과장되게 놀라는 체하는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에드윈과 닮았고, 분명 호감형인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묘한 광기에 젖은 표정 탓인지 기괴하고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나디아는 눈을 돌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제대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를 표현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내가 알려 줘야 하나?”

그러나 황제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결혼식에서 봤던 점잖고 기품 있는 황제의 모습은 가면이기라도 했는데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을의 초입, 엘란츠 성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그동안 에드윈과 황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건지, 그게 아니면 본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그 잠깐 동안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뿐인지. 하나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황제가 나디아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커다란 손아귀에 붙들린 팔이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녀가 그 힘에서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었다.

억지로 꿇어 앉혀졌던 그녀는 또다시 억지로 일어서야 했다. 몸을 일으켰지만 팔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은 풀리지 않았다. 나디아는 고통에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말해 줄게.”

“윽!”

“에드윈은 그대를 사랑해.”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다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매달린 눈이 그녀의 전신을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러 오지 않겠나.”

황제는 내동댕이치듯 나디아의 팔을 놓아주더니 몇 걸음 물러섰다. 여전히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와 그 앞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든 그는 반쯤 남아 있던 술을 마시고 잔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벽에 부딪힌 잔이 파삭 부서졌다.

“어디 한번 기대해 보자고. 함정인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올지, 아니면 내가 틀렸을지.”

“그럴, 그럴 리가 없어요.”

나디아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지탱해 보려 애쓰며 간신히 대답을 쥐어짰다.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에드윈이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웃음을 살 것 같아 부끄러워지는 말이었다. 에드윈은 그녀에게 나름대로 잘 대해 주긴 했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디아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제 것에 대한, 말하자면 소유욕 같은 것이었다. 그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기면 이를 드러내는 법이라고.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에드윈이 온다면, 황제가 여기 있기 때문이겠지. 겸사겸사 장난감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은. 그것 외의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에드윈을 어느 정도 믿고, 의지하고 또한 묘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황제도 아무런 근거 없이 그리 믿은 것은 아닐 테니 필시 무언가가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에드윈이 그 생각을 유도했을지 모를 일이고.

나디아는 필사적으로 황제의 말을 부정하며 머릿속의 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 사람이 사랑이라니….”

“좋을 대로 생각해.”

흥미가 식었다는 듯이 뒤돌아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몸을 구겨 앉은 그가 손가락을 세워 나디아와 아실을 번갈아 가리켰다.

“엘란츠 부인은 가둬 두고, 저 친구는 적당히 처리해. 아깝지만 내 밑으로 들어올 것 같지가 않군.”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몸부림치는 아실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기사들이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귀를 의심했던 나디아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처리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고작 말 한마디에….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황제에게 손을 뻗었다.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기라도 할 생각이었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이 매달린다고 해서 생각을 바꾸거나, 명령을 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마냥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안 돼. 안, 그러지 마세요, 폐하. 폐….”

더듬더듬 꺼낸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멎는가 싶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네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이냐며 비웃는 듯 했다.

“아, 너무 우습지 않아? 지금쯤 그대를 구하겠다고 달려오고 있을 에드윈과 내연남을 살려 달라고 비는 부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율리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법 유쾌한 상상을 음미하고 있는지 그의 얼굴 위로 황홀함이 내려앉았다. 입맛까지 다시던 황제가 번쩍 눈을 떴다. 황홀함은 자취를 감추었다.

“매일이 지금 같았으면 좋겠네.”

냉락한 얼굴로 비아냥대던 율리안이 벌레라도 쫓는 것처럼 대충 손을 휘젓자 기사들이 그녀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폐하! 폐…!”

기사들이 입을 틀어막았는지 나디아의 비명과도 같던 부름은 끊겼고 웅웅거리는 소리와 가벼운 몸부림을 제압하는 소리도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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