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두 사람은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바람 소리나 대문이 열리는 소리 따위를 착각한 거겠지.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잘못 들었나 봐.”
대문과 울타리에 촘촘히 얽힌 장미 덩굴이 보였다. 지금이 늦봄이었다면 숨 막힐 듯한 장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겠지.
그때까지 여기 있게 되는 걸까? 화사하게 피어난 각양각색의 장미들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지금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디아는 아실의 뒤에 바짝 붙은 채 따라 들어갔다. 손을 잡는 것 대신 그의 등허리 위를 짚은 손 아래로 긴장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실의 긴장이 옮겨 온 것처럼 손바닥에 식은땀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발아래에서 마른 풀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지레 놀란 나디아가 흠칫 놀라 아실의 옷을 콱 움켜쥐었다.
뒤돌아본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실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나디아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 이러면 안 돼!”
“그렇겠죠. 물론입니다.”
그의 눈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마치 귀여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빛에 얼굴에 오른 열이 내리지를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었는데. 분위기가 불가에 놓은 캐러멜처럼 녹아내렸다. 한결 말랑해진 분위기에 심장을 아프게 하던 불안도 한 꺼풀 걷힌 느낌이었다.
아실이 신중하게 내부의 기척을 살피는 사이 나디아는 겨울을 맞이해 황량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누렇게 말라붙은 잔디와 생기 없는 관목, 얼어붙은 분수대와 새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린 감탕나무가 몇 그루 늘어서 있었다. 따뜻한 계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 꾸준히 관리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해는 순식간에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고 사위가 캄캄해졌다. 아실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에 달린 상아 손잡이를 붙잡았다. 여전히 한 손은 검집 위에 놓인 채였다. 힘을 주자 부드럽게 손잡이가 돌아가고 이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빛이 없는 새카만 내부로 아실이 먼저 들어섰고 나디아가 뒤따랐다. 바람이 훅 들어오는가 싶더니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고개를 좌우로 저어 부정하던 그녀는 내부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겨우 입을 열어 속삭였다.
“없어.”
그녀의 대답이 들리고 나서야 아실은 안심하듯 고개를 돌려 건물 내부를 응시했다. 두 사람은 입구에서 못 박힌 듯이 한참을 서 있고 나서야 서서히 어둠이 눈에 익어 가며 사물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저택 안은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치 조용했다.
누군가 함부로 침입하거나 어질러진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값비싸 보이는 가구와 양탄자 따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정원의 모습처럼 꾸준히 관리해 온 사람이 있는 듯 깔끔했다.
하지만 역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실은 아직 마음을 놓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넓은 홀을 가로지른 그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화려한 액자와 검 장식 따위가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쳤다.
“별일 없겠지?”
나디아에게 기척을 숨기는 재주는 없었기 때문에 만약 안에 누군가 있다면 그들의 존재를 진작에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아실에게 묻는다기보다는 그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복도를 꺾어 들어가자 응접실 입구 부근에서 희미하게 주황색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해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들은 걸음을 잠시 멈췄다. 아실은 안의 상황을 확인해야 할지, 이대로 돌아서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에드윈이 준비해 둔 은신처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의 경계심 한쪽을 천천히 무너트리고 있었다.
숨죽인 두 사람의 발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울렸다. 아치형 통로 너머로 벽난로 안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과 그 앞의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크리스털 잔, 내용물이 반쯤 남은 술병과 반쯤 타다 만 시가가 쑤셔 박혀 있는 재떨이, 안락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역광이 져 얼굴을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저 선명한 금발은….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아실이 그녀를 부르는 게 들렸지만 얌전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가야 합니다!”
“…에드윈?”
“부인!”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축 처진 모습이 꼭 어딘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아실이 그녀의 앞으로 팔을 뻗어 막았지만 나디아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인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디아는 그 사람이 에드윈일지도 모른다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저 얼핏 보인 머리카락이 금발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옆에서 아실이 검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날 선 긴장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아실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이내 웅크리고 있던 남자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속삭이듯이 ‘에드윈?’ 하고 한 번 더 불렀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의 키는 그녀가 생각하던 사람보다 반 뼘은 더 컸다.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쩡, 하고 얼어붙었다. 그녀의 사고가 더 이어지기도 전에 새파란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왔어? 정말 오래 기다렸잖아.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이 목소리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뒤에서 아실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실의 말대로 뒤돌아 도망쳐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실망시켜서 어쩌지? 나야.”
황제…! 그제야 나디아는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늦었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니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이미 그의 손아귀 안이었을 것이다.
“그 얼굴, 정말 보고 싶었어.”
그가 에드윈과 닮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안 좋은 기억을 선사한 자의 얼굴을 왜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엘란츠 성에서 봤을 때보다 야위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의 등 뒤로 날카로운 예기(銳器)가 느껴졌다. 뜨끔한 통증이 일어 뒤를 돌아보려던 나디아는 뒤에서 나타난, 배려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손이 강압적으로 어깨를 움켜쥐자 흠칫 놀라며 굳었다.
돌아보지 말라는 것 같기도 했고 허튼짓할 생각 말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덜덜 떨며 앞에 선 황제를 바라보자 이윽고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자가 그녀의 오금을 걷어찼다. 나디아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나디아!”
아실의 절박한 외침에도 그를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찾아왔다.
고통이 방아쇠가 된 것처럼 눈물이 터졌다. 마치 앞으로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먼저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릎 꿇은 나디아의 앞으로 다가온 황제의 반질반질한 구두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윽고 그가 그녀의 앞에 무언가를 내던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은 두 개의 신분 패였다. 나디아는 거기에 새겨진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폰스 베이시, 로베르토 피어슨. 그녀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귀찮았잖아.”
이곳에 있는 황제 그리고 주인 없이 내팽개쳐진 신분 패. 그 모든 것들이 뜻하는 바를 유추해 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내 억센 손길이 그녀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강제로 들려 올라간 시야에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에드윈의 옆구리에 화살을 박아 넣은 뒤 성으로 들어왔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디아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두려워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우리 엘란츠 후작 부인 꼴이 말이 아니시군.”
황제의 뒤로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싼 기사들이 보였다. 이미 포위되었고, 식견이 없는 그녀의 눈으로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허튼짓할 생각 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지?”
황제가 아실을 향해 말하자 야차 같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던 아실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검을 겨누고 있던 자들이 달려들어 그를 포박했다.
순식간에 그의 양팔이 구속되고 무릎이 꿇려졌다. 그 과정에서 몇 대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재갈을 문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하던 황제의 시선이 나디아에게로 옮겨 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말, 오래 기다렸잖아.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