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73화 (73/115)

73.

두 사람은 발바닥이 아프도록 돌아다니며 사과나 사과나무와 관련이 있을 법한 것을 찾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황금빛 사과를 쌓아 놓고 파는 좌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며 상인에게 눈총을 샀을 뿐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여관으로 돌아온 나디아와 아실은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톡 쏘는 에일, 닭고기와 양배추가 들어간 묽은 스튜, 건포도가 들어간 귀리 빵과 바삭하게 튀긴 베이컨이 뒤섞인 감자구이를 먹는 내내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다 피곤했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 맛을 느낄 여유는 남아 있어서 식사는 즐거웠다.

배 위에서 먹는 지긋지긋한 절인 청어, 절인 정어리, 말린 대구 따위로 이루어진 식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해산물을 그리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동안은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느리게 식사를 계속하는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와 테이블을 채우고 술을 마시고 요란스럽게 떠들었다. 멍하니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행위만을 반복하던 나디아는 에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싸구려 음료였지만 계속해서 마시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도 같았다.

“사과나무는 아닌 것 같아.”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만 한 커다란 잔에 담겨 있던 에일을 반이나 단번에 들이켠 후 ‘음’ 하고 애매한 한숨 같은 소리를 내었을 뿐이었다.

나디아는 생각이 꽉 막혀 있기라도 한 건지 도무지 다른 것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애당초 사과와 관련이 있긴 한 건지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건…?”

“이방인이 이상한 질문을 하고 다니면 눈에 띄기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언제까지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거잖아?”

아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고민했다. 분명 아실도 나디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이에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지만 외지인이 오래 머물기 시작하면 관심을 가진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얼마나 머물 건지, 혹은 정착할 생각인지.

도피 생활 중인 두 사람에게 그런 관심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이렇게 멀리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추적자를 따돌리려 이런저런 장치들을 마련한 모양이었지만 정말로 완벽히 따돌렸는지 어쨌는지는 끝에 가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우리 바모스로 가는 것 아니지?”

나디아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은 아실이 놀란 것처럼 시선을 맞추더니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이곳에서 새로운 목적지를 찾을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만 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나 조심해야 하는구나, 하는 감상과 또 그녀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빚어지는 소외감.

어쩔 수 없었겠지. 나디아는 쓸모없는 감상을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았다.

“여관 주인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대해야 하니까 그다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데.”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아실이 손을 들어 여관 주인을 불렀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는 서늘해진 날씨에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뭐 더 필요하신 거라도?”

강한 악센트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주인장, 물어볼 것이 있는데.”

“땅속의 사과가 뭔지 아나?”

잠자코 있지 못한 나디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이 든 남자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감자잖소.”

조금의 고민도 없이 들려오는 대답에 두 사람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감자라고?”

“그렇소만, 갑자기 그거는 왜….”

“감자를 왜 땅속의 사과라고 부르지?”

저만치서 얼굴이 새카맣게 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러 댔다.

“난들 아나. 하여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오. 감자 좀 더 드릴까?”

“아니, 됐네.”

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미련 없다는 듯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답을 들었지만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과를 찾아야 하는지, 사과와 관련된 것을 찾아야 하는지 막막했던 것이 이제는 감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감자밭을 찾아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감자로 된 음식을 찾아야 하는지. 그나마 옳은 방향이 잡혔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튿날 그들은 선장에게만 휴식을 위해 정박 기간 동안 인근의 여관에 묵을 것이라는 말을 해 놓고 짐과 말을 챙겨 배에서 내렸다.

특별한 은유를 찾지 못했으니 1차원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도시 외곽의 감자밭을 돌아다니거나 식당의 감자 요리를 주문하면서도 나디아는 정말 이게 맞는지 몇 번이고 회의감을 느꼈다. 아실도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엔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잖아?”

“매번 운이 좋았습니다. 푸른 고래를 간판에 그려 놓은 가게를 뒤지거나, 마을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커다란 황동 종 안을 살핀다거나.”

열심히 고민하며 숨겨진 뜻을 찾거나 드넓은 밭을 헤맨 노력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귀갓길에 지나친 보석상에서 땅속의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커다란 루비가 진열된 것을 발견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새빨간 루비 원석은 큼직했지만 그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물질이 보석을 탁하게 만들어 누구도 사려 하지 않았다. 자고로 보석이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제일인 법이었다.

어느 농부가 감자를 캐다 발견했다는 보석에 땅속의 사과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뒤 어떻게든 좋은 값에 팔아 보려 노력했지만 누구도 사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던 탓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아실과 나디아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들은 보석을 사겠다며 나섰고 흥정은 아실이 맡았다. 보석상은 겨우 잡은 기회에 어떻게든 비싸게 팔아 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실은 칼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처럼 버티고 서서 담담하게 보석상을 구워삶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디아는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아무런 말도 거들지 못했다.

제시한 가격을 듣고 겨우 그 가격에 파느니 안 팔고 말겠다고 뻗대는 주인에게 아실은 우리가 아니면 그 가격으로도 살 사람이 있을 것 같냐며, 안 팔려서 가게 안을 굴러다니는 물건은 그저 돌덩이일 뿐이라며 쏟아 냈다.

그 말은 보석상 주인의 ‘설마’ 하는 마음을 제대로 강타한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가게를 나서는 아실의 외투 주머니 안에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에 성공한 땅속의 사과가 들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부수는 게 어떻습니까? 안에 들어 있는 게 열쇠일 것 같은데.”

나디아는 습관처럼 턱 끝을 매만졌다. 루비를 어떻게 부수지? 쉽게 부서지는 광물이 아닐 텐데. 여관방에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고민에 빠졌다.

대장간이라도 가야 하나? 그녀는 고민을 끝내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나디아가 보석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타샤의 목걸이에서 번쩍 빛이 났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보석이 깔끔하게 바스라지며 안에 들어 있던 것을 토해 냈다.

놀라 얼이 빠진 나디아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빛 가루가 흘러내렸다.

아실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이물질인 종이 뭉치를 펼쳤다.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 글씨가 떠올랐다. 그리고 종이 끝에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디아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험한 말이 입 안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고약한 건 처음입니다.”

아실의 감상도 그녀와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얌전하게 가슴팍에 드리운 목걸이의 영롱한 붉은 보석은 금 간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금이 가면 버리라고 했는데, 이미 버렸더라면 어떻게 되는 거였어? 아니 애초에 이걸 다른 누군가가 사 갔더라면? 농부가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드넓은 감자밭을 일일이 파헤치기라도 해야 했던 걸까?

누가 그 성격 나쁜 남자가 벌인 짓 아니랄까 봐. 나디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다음 목적지는 나스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대로를 따라 닷새쯤 가면 나오는 도시였다.

나디아는 그곳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닷새가 걸린다는 것도 여관 주인에게 물어 들은 사실이었다.

나디아는 퀘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소식이 대양을 건너오기엔 너무도 멀었고 그들은 갈수록 퀘른에서 더 멀어지는 길을 가는 중이었다.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살아 있을 거라며,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일이라며 다독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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