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72화 (72/115)

72.

“별일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별일이 있더라도 각자 살길은 하나씩 마련해 놓았으니 목숨은 건졌을 겁니다. 지금은… 부인을 제일 걱정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을 곱씹었다. 조용히 등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위협을 깨달은 날, 몸과 분리되어 흙바닥을 뒹굴던 기사의 머리통이 떠올랐다. 잊으려 노력했지만 쉬이 잊히지 않을 강렬한 기억 중의 하나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도망쳐야 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군말 없이 따르면서도 직접 느낀 위협이 없었기에 무언가 착오가 있었거나 과잉보호가 아닐까 하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겪고 보니 너무도 멀리 있어 그녀는 알아챌 수도 없었던 칼끝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뒤이어 찾아오는 것은 또다시 추격당할 위험은 없는지 따위의, 나디아가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걱정에 잠겨 죽지 않기 위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 만한 주제를 생각해 냈다.

“다른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말, 어떤 뜻이야?”

“네?”

또다시 질문이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멍한 낯을 하던 아실이 한 박자 뒤늦게 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새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다음 목적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손질하던 검을 검집에 넣고 한쪽에 조심스럽게 기대어 둔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높은 별, 파란 고래, 황금 잔, 눈 먼 늑대, 붉은 호수, 산들산들 비바람, 땅속의 사과, 설탕 다리.”

나디아는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음률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걸로 찾습니다.”

“암호 같은 거야?”

“비슷합니다.”

암호라는 말답게 이리 듣고 저리 들어도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되는 것들뿐이기도 했고. 그녀는 그 뜻을 캐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안전한 거야?”

“후작 각하와 저 그리고 각하의 최측근 중 일부만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이 흘렀다.

“각하께서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믿습니다. 그분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설득력 넘치는 말이었다. 나디아가 적당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실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인지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이틀 후에 나스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나디아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바모스까지는 긴 여정이었다. 당연히 도중에 항구에 들러 물자를 보충해야 했다. 나스에서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 정박한다 했으니 그들도 배에서 내려 여관을 잡고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일단 목욕부터 하고 싶었다. 배 위에서는 아무리 물을 많이 실었다고 한들 몸이 푹 잠길 만한 양의 물을 씻는 데에 쓸 수 없었다. 수건을 물에 적셔 몸을 닦긴 했지만 그래도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땅을 밟게 된다는 것도 기꺼웠고, 짠 내가 덜한 공기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틀 후, 정오 무렵 예정대로 나스의 항구에 정박한 배가 돛을 접고 닻을 내리기 무섭게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배를 빠져나갔다.

사흘간 정박하기로 했으니 물자를 보충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룬 선원들이 떼를 지어 사창가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실과 함께 갑판으로 나온 나디아는 그 모습을 보며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삐걱이는 발판을 아실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내려온 나디아는 오랜만에 밟는 땅에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단단하게 발밑을 받쳐 주며,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울렁이지 않는 땅의 소중함을 이렇게 깨닫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었다.

바닷가의 도시라 바람에 짠기가 밴 것은 여전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땅 위에서 들이쉬는 공기는 바다 한가운데서 맛보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기분 탓인지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여관으로 향해 방을 잡았다. 비슷한 시기에 배 두어 척이 더 정박했었기에 남은 방은 제일 작은 것 하나뿐이었지만 잠을 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아실과 한방을 쓰는 것도 이젠 어느 정도 적응한 참이었다.

나디아는 커다란 나무 욕조를 가득 채운 뜨거운 물속에서 몸에 배어든 것처럼 느껴지는 짠기를 모두 우려내듯 오래도록 목욕을 했고, 그동안 아실은 문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녀가 목욕을 끝낸 후 아실도 몸을 씻었다. 그가 씻는 동안 나디아를 문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었기에 나디아는 등을 돌린 채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뒤에서 찰박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가림막이 있었기에 굳이 뒤를 돌지 않아도 됐지만 뻔뻔하게 그가 씻는 곳을 바라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은 따뜻했고 몸은 개운했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는 너무도 쾌적해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난로 앞에서 온기를 담뿍 머금은 담요를 뒤집어쓰는 것 같은 포근함이었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눈을 뜬 나디아는 칭얼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늘어질 만큼 쉬다가 출항하기 직전쯤에나 배를 타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을 깨우는 손길이 달갑지 않았다.

“외출하려고 합니다만, 더 주무시겠습니까?”

외출? 멍한 머릿속으로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며 이대로 더 자는 것과 그를 따라나서는 것을 저울질해 보던 나디아는 이윽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낯선 곳에 혼자 있기 싫었다. 사람들이 얼마든지 드나드는 건물 안에 혼자 남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방 안에 마주 앉아 간단히 식사를 끝마친 그들은 거리로 나섰다. 날씨는 화창했고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복작복작한 거리를 걸으며 낯선 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던 나디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아실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실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실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땅속의 사과.”

나디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며칠 전, 배 안에서 그가 말해 주었던 알쏭달쏭한 암호들이 떠올랐다. 그걸 여기서 찾는 건가? 바모스까지 가기로 했던 건 뭐였지?

여정을 이어 오는 동안 몇몇 도시에 도착했을 때마다 아실이 두세 시간씩 자리를 비우곤 했던 기억이 뒤이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랬던 때에 노먼에게 납치당했었지. 잠시 안 좋은 기억도 떠오를 뻔하였으나 이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알 수 없는 설렘이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철없는 감상이라는 것은 알지만 순간순간 이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스스로의 주의를 돌려야 했다.

“그건 어떻게 찾아야 해?”

그녀는 아실이 조심스럽게 속삭인 말을 경솔하게 입 밖으로 크게 내뱉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아실이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어깨를 끌어안아 제 옆구리에 붙이며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손끝만 스쳐도 큰일 나는 줄 알 만큼 몸을 사렸던 때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실과 말을 섞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에드윈은 여기에 없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이목을 피하기 위해 부부 행세를 하고 있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혹은 어깨를 끌어안는 등의 접촉은 제법 익숙한 일이 되었다.

나디아는 사실 그와 붙어 있는 것이 꽤 기꺼웠다. 상대가 아실이라서가 아니어도, 의지하는 사람과 긴밀한 거리를 가지는 것은 그녀를 안심하도록 만들었다. 상대의 존재감을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수수께끼나 은유 같은 겁니다. 규칙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일관성 역시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쉬이 찾을 수도 있고, 찾기 어려울 수도 있죠. 나스가 고대어로 비바람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거 아십니까?”

나디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듯, 아실이 마치 똘똘한 아이를 기특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미소를 띤 채 시선을 맞춰 왔다.

“추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도출해 낸 답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려 줄 겁니다.”

그녀는 아실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어 따라가며 그가 속삭였던 말의 뜻을 풀이해 보기 위해 애썼다. 땅속의 사과. 무슨 뜻일까?

그들의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각양각색의 외국어와 특이한 악센트, 큰 목소리들이 교차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고민했다.

사과, 사과라. 사과는 나무에 열리는데 왜 땅속일까? 사과가 땅속으로 들어가면? 썩겠지. 그리고 씨앗은 싹을 틔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뻔한 것이라면 암호일 필요가 있을까? 아실은 이 모든 게 수수께끼나 은유한 것이라고 했으니 조금 더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그동안 길바닥에서 멍하니 시간을 버릴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 보자는 생각에 나디아는 아실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실이 그녀에게로 몸을 숙여 주었다.

“사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볼까?”

“사과나무?”

그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런 뻔한 추측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느냐고 물어 올까 봐 얼굴이 붉어졌다.

붉어진 나디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그녀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디아는 조금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뭐든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거기부터 시작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디아는 사과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다. 사과가 매달려 있거나 꽃이 피어 있다면 모를까. 지금 시기면 사과는 모두 수확했을 것이고 잎도 거진 떨어졌을 테니 꽃은 언감생심이었다.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의 생김새란 거기서 거기니까.

의견을 내어놓기는 했지만 그게 맞을 거라는 확신은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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