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배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배가 큰 덕에 많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처음 겪는 뱃멀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갑판 위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 느꼈던 상쾌함은 몇 시간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희미하게 두통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던 나디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배 속이 울렁거리는 불쾌함에 몸을 일으켰다.
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틀어막은 그녀의 모습을 본 아실은 아차 싶은 얼굴로 짐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멀미약을 찾아냈다.
“드십시오.”
그녀는 손바닥 위에 놓인 알약 몇 개를 삼키기도 힘들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목구멍으로 약을 넘기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며칠 지나면 몸도 적응해서 훨씬 덜할 겁니다.”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탄에 성실하게 대답해 준 아실이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기분 탓인지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배에 익숙해진 것은 시들어 가는 식물처럼 골골거리며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나흘은 지났을 때였다.
배는 여전히 망망대해 위를 유유히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나디아는 며칠 사이 살이 빠져 핼쑥해진 얼굴로 흔들림이 덜한 선미에 앉아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못 박았다.
선장이 말하기를 바모스까지 보름은 족히 남았다고 했다. 도중에 나스에 들러 이틀 정도 머물며 물자를 보충한다고 했으나 그 시간을 감안해도 머나먼 여정이었다.
과연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오고도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녀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이렇게나 멀리까지 가야 한다니, 꼭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다른 대륙 땅을 밟을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에드윈과 결혼한 이상 평생을 엘란츠 성에서 살며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곳이라 여기며 정을 붙이려 애쓴 탓일까. 성이 그리웠다. 석양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던 거대한 강의 모습과 미지근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오렌지 꽃향기도….
뺨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고 느꼈을 무렵,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외투를 끌어당겨 그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추위로 붉게 물든 뺨을 보면 아실이 걱정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마 선실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러 온 것일 테지.
나디아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손끝이 슬슬 차가워지기 시작한 참이라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부인.”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계단을 반쯤 내려가기가 무섭게 문 안에서 아실이 나타났다.
“들어가려던 참이야.”
변명처럼 웅얼거리자 남자가 설핏 웃었다. 멀찍이 있던 선장의 은근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는 생각보다 오지랖이 넓은 작자였는데, 묘하게 깍듯한 아실의 태도와 그걸 당연히 여기는 나디아의 모습을 보며 신분 차이가 나는 연인이 사랑의 도피를 떠나온 모양이라고 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실과 나디아는 혹여 누군가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면 둘러댈 위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추적을 피해 도망 중이었고, 혹시라도 수상한 2인조 따위의 이미지로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서 좋을 게 없었다.
남자와 여자, 단둘뿐인 구성으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부부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그들은 선장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함을 억누르며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부부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꺼웠다.
나디아는 선장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저런 자들이 얼굴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상대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아실이 나디아의 곁으로 다가와 서며 달갑지 않은 시선을 대신 받아 냈다. 두 사람은 조금 서둘러 선실로 돌아갔다.
그들이 머무는 선실은 제법 좋은 편에 속했지만 그럼에도 한쪽 벽에 달려 있는 조막만 한 창은 소금기가 끼어 불투명했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보기에는 쾌적했지만 희미한 짠 내와 비린 바다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실이 문을 열자 방 안에서부터 배 곳곳을 돌아다니며 쥐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들의 다리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발목 근처에 검은 털이 덕지덕지 붙었다.
그녀가 침대보에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 내는 사이 아실이 주방에서 식사를 받아 왔다.
두 사람은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바다 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생선이 주가 된 음식들은 아주 기름졌고 짠맛이 강했지만 맛있었다.
식사하는 내내 아실은 언제나 그랬듯이 꼼꼼하게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거나 생선 가시를 발라 주는 등. 그다지 해 보지 않은 일인 것이 분명했다. 능숙하지 못한 솜씨지만, 나디아는 그의 정성을 높이 샀다.
“배부른데.”
“이것만 마저 드십시오.”
아실은 크게 발라낸 생선 살점을 그녀의 접시 위로 건네주었고, 나디아는 한숨을 삼키며 음식을 마저 먹었다. 물 대신 마시는 에일을 두 모금 마신 뒤 식사를 끝내자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모포를 덮은 나무 의자 위에 녹은 마시멜로처럼 늘어졌다. 노곤함이 밀려왔다.
배에서 내린 후의 여정을 걱정하는지, 아실은 나디아에게 무엇이든 더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날이 추운 탓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아실에게 나를 겨울잠 자는 곰으로 만들 셈이냐고 장난치듯 물어본 적이 있기도 했다. 그는 웃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간신히 잠에 빠져들지 않은 나디아는 어슬렁거리며 다시 돌아온 고양이와 장난을 치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뎠다.
아실은 그녀가 홀로 선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디아는 그가 과하다고 여겨질 만큼 싸고도는 것을 이해했다. 아니 조금쯤은 기껍게 여겨지기도 했다.
노먼과의 일이 있었던 후로 괜찮은 것 같다가도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불쑥불쑥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주위의 모두가 그녀의 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배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고 거칠고 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혹여 마주치면 옷을 겹겹이 입고 두꺼운 외투를 걸쳐 포대 자루 같을 텐데도 그녀의 몸을 굶주린 사람처럼 샅샅이 훑어보기 일쑤였다. 성별이 여자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배 안의 몇 없는 여자들의 처지 역시 비슷했다.
원래대로 나디아의 신분을 내세운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을 내리깔아야 할 비천한 것들이 보내는 끈적한 시선은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했고 화가 났으며, 그렇게 숨긴 깊은 속내에는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가 엘란츠 성이었다면 다시는 볼 일이 없도록 저런 놈들을 모조리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으라고 했을 텐데.
홀로 방에 남아 있자면, 당장이라도 커다란 덩치의 괴한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챌 것 같다는 상상 때문에 손이 차게 식었다.
선실의 나무 문 안쪽에 달린 걸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연약해서 성인 남성이 어깨로 몇 번쯤 들이받으면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은 오직 아실이 곁에 있을 때만 잦아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따뜻한 자리를 내어 주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악몽을 꾸는 그녀를 깨워 주고,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듬직한 뒷모습에 감명받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실뿐이었다. 최근엔 배 곳곳을 돌아다니던 고양이와 제법 친해졌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와의 놀이에 흥미를 잃은 짐승이 제 할 일을 하러 떠나면 홀로 남겨진 나디아는 또 지루함을 견뎌야 했다.
자그마한 선실에서 아실과 계속 대화를 나눈 이유는 파도 소리 외에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아실은 귀부인을 즐겁게 할 만한 말주변은 가지고 있지 못한 남자였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나디아가 쓸데없는 트집을 잡거나 투정을 부리는 말들로 이루어졌다.
배 위의 음식이 형편없다든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싶다거나, 짠 내가 나지 않는 바람을 쐬고 싶다든가. 아주 어린 시절에도 해 본 적 없는 투정이 그의 앞에서는 줄줄 흘러나왔다.
나디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실에게 바모스까지 얼마나 남았느냐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령 없는 남자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선장에게 물어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싫었던 그녀의 입에서 이윽고 의미 없는 질문이 멎었다. 사실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연락 온 것은 없어?”
“무슨 연락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괴롭히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타샤라든가, 아니면 기사단이나… 피어슨 경일 수도 있고, 에드윈이나, 누구든.”
“없습니다.”
동요 한 점 보이지 않는 아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나디아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결론지은 뒤 무릎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고립된 섬에 떨어진 기분은 여전했다.
그가 신경 쓸 것이 분명해 내색하지 못했지만 모두 걱정이 됐다. 성에 남겨 두고 온 사람들과 갈림길에서 헤어진 기사들은 물론이고 에드윈까지. 살아 있는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또 성은 어떻게 됐는지.
그녀에게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수단이 없었지만 아실에게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마저 없다면….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