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70화 (70/115)

70.

“은신처라고? 그게 어딘데?”

“저도 모릅니다. 목표에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받기로 했습니다.”

나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만 모르게 진행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 모든 일에 그녀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음에도 모두가 나디아를 배제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또 이렇게 휘둘리기만.

자신이 알았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괜히 서러워지는 마음은 생각만으로 다독인다고 해서 쉬이 가라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깊게 침잠해 가는 생각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아실이었다. 그가 나디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선을 맞춰 오는 녹색 눈은 나약한 심성이 모두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것과는 달리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지켜 드릴 테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디아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붙이고 기댔다. 아실이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그와의 거리를 벌리려던 노력은 쉽게도 허물어졌다. 구하고 구해지고, 함께 비를 맞고, 모닥불의 온기를 나누었던 순간은 꺼지라며 재를 끼얹었던 자리에서 희미하기 짝이 없는 불씨를 다시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게 바로 조금 전인데 뭘 하고 있는 걸까.

홀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누구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온실 속에 있다가 바깥으로 내쳐진 꽃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연한 줄기가 휘었고 빗줄기가 조금만 굵어도 부드럽기 짝이 없는 꽃잎이 상했다.

깨닫고 보니 온실은 꽃의 것이 아니었고 때때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도 마찬가지였다.

땅 밖으로 나와 있으면 쉬이 말라 버릴 뿌리로는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나디아는 체념했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항상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해도 마음속 한편에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만한 소망 한 가지씩은 있는 법이었다.

그녀의 소망은 단순했다. 바람이 불면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지탱해 주고 비가 오면 서로를 부둥켜안고 같이 비를 맞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꿈꿨다. 줄기가 긁히고 꽃잎이 떨어져도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 같았다.

소설이나 노래 속에 등장하던 주인공처럼 꿋꿋하고 의연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단단한 벽과도 같아서 고된 일 한 번 해 본 적 없는 손으로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금 한 줄 가지 않았다.

나디아는 무력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떠올리지도 못하는 백치와 다를 바 없었다.

두 남자를 떠올려 보아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에드윈에게 헌신과도 같은 동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적어도 그녀를 책임지려 하긴 했다. 반면 아실은 그녀의 바람대로 함께 비바람에 맞서는 것은 물론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 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 줄 것이었다.

하지만 나디아는 아실을 이전처럼 순수한 애정만을 가지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다. 순수했지만 동시에 터무니없던 소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바람에 흘려보내는 게 나았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만약에….”

구불거리며 등 뒤로 늘어진 밤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아실의 손이 멈췄다.

“에드윈이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바뀌는 건 없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마저도 계산해 둔 채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실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왜인지 긴장하고 있었다. 나디아에게도 그의 긴장이 전염된 것처럼 그녀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귀부인이 머물 안전한 저택과 비자금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일이 무사히 끝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나한테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았는데….”

떠나는 날까지도 승마 연습을 하라는 말 외에 다른 설명은 해 주지도 않았던 남자였다. 나디아는 손끝을 깨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

과연 그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더라도 나디아는 아무렇지 않았을까? 전부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답은 ‘아니오’였다. 분명 에드윈의 계획을 전해 들었더라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디아는 불안에 휩싸였을 것이다.

어쩌면 일을 그르칠 만한 짓을 저지르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속상했다. 왜 이렇게 억울한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실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남자는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랗고 흉터투성이인 손이 나디아의 차게 식은 손을 붙잡았다. 아실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대하듯이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그 손등 위로 입 맞추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뻔뻔스럽고 한심하다는 거 압니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식은땀이 밴 아실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그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면서 꺼낼 만한 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미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 들어찬 머릿속으로 새로운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시야를 가득 채운 남자의 얼굴만 그리고 그 위로 서린 복잡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건 기회입니다, 귀부인. 그 남자가 죽었다면, 반역이 실패했다면 우리 두 사람이 이대로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찾지 못할 겁니다.”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니 그런 것을 떠올릴 만한 여유도 없었다.

떠나올 적에는 그저 막연하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겠거니 하고 여겼고, 지금은 그 남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지 불과 몇십 분밖에….

“그러니… 나디아.”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다시는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이름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아실이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떨며 전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지위도, 부귀영화도 모두 내던진 채 그의 손을 붙잡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기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사랑하고 사랑받기만을 바라던 순진하기 짝이 없는 꿈.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고 느껴졌지만 생각해 보면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남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런 얼굴 하지 마.”

그가 조심스럽게 이마를 맞대 왔다. 내리깔린 속눈썹과 물기로 반들반들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디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설렘 때문일 수도, 어쩌면 두려움, 어쩌면 죄책감, 또 어쩌면… 사랑.

“꼭 당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잖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랑은 반짝반짝하고 티 없이 빛나는 아름다운 감정이었다.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 혹은 소설 속, 또는 연극 속에서 그리는 것처럼 아름답고 절절한 것. 적당한 난관까지 주어진다면 완벽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 한편에 똬리를 튼, 아실을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건지.

빛바랜 감정의 잔해는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일그러졌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나디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 언제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걸까? 매 순간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있나?

그녀는 아니었다. 이전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홀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지 않은가.

아실은 그녀가 당황한 이유를 에드윈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여기는 것 같았지만 나디아는 긴가민가하는 중이었다.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에드윈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동시에 그의 그늘로부터 아실의 손을 잡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미약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감정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좋을지….

“난, 나는… 모르겠어.”

나디아는 고개를 흔들며 아실을 밀어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지끈거리는 두통이 뒤따랐다.

“쉬고 싶어.”

당장 나디아의 입에서 대답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실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미약한 힘에도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냉락한 얼굴로 돌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는 방을 떠났다.

***

그녀가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우며 한숨도 자지 못했어도 태양은 떠올랐다.

잠을 못 잔 탓인지 신경에 거슬리는 미약한 두통이 지속되었다. 나디아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새벽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의 잔향이 여전히 씁쓸하게 남아 있었다.

배를 탄다고 했었지. 입술 사이로 가라앉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실을 따라나서도 좋은 것인지, 에드윈은 괜찮은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의문들이 그녀의 앞에 높은 선택지 위를 어지럽게 떠돌아다녔다.

어떤 것이든 간에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나디아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경험을 만들어 나가는 게 좋겠지.

깜빡 잊고 준비하지 못했던 상비약을 사러 나갔던 아실이 돌아왔다. 혹시라도 두고 가는 것이 없도록 짐을 챙기는 동안 아실은 밖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온통 퀘른 이야기뿐이더군요. 어제 행상인이 했던 말이 퍼진 건지, 수도에서 왔다던 다른 자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로 봐서는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헛소문일지도 모른다던 상상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황궁이 무너졌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서 정말 반역을 꾸미던 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은 아니니까.

떠나는 날까지도 새로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무너진 황궁 아래에 깔려 죽었다는 귀족들의 이름이나, 그래서 황궁은 대체 왜 무너졌는지, 이런 때에 황제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따위의 소식들.

원체 소식이 느린 곳이었으니 고작 하루, 이틀 지났다고 해서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 리가 없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퀘른이나 영광의 홀 따위의 단어가 들린다 싶으면 절로 귀가 쫑긋 섰다.

하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을 수 없었던 나디아는 어떻게 해서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아실의 품에 안겨 배에 올랐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것이 꼭 제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냐고 묻는 선장에게 그녀를 아내라고 소개하는 아실의 태연한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여린 뺨을 아프게 때렸다. 나디아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턱을 옷깃 안으로 파묻었다.

바모스라니. 이름조차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녀가 바모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대륙 사이를 나누는 홍해 건너편의 서쪽 대륙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잠시 저마다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부산한 항구와 쉼 없이 출렁이는 깊은 바다를 응시하던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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