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나디아는 덜 말라 곳곳에 축축함이 남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고, 아실은 꺼내 두었던 소지품들을 챙겼다. 그리고 모닥불 안에 넣어 두었던 달궈진 돌을 꺼내 두꺼운 천을 감아 나디아에게 들려 주었다.
나디아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지만 이런 곳에서 하루 이틀 미적거린다고 나아질 리가 없으니 도시에서 의사를 찾는 게 낫다고 여겼다. 실로 옳은 선택이었다.
새벽,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그들은 다시 르네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금을 주고 빌렸던 방은 그대로였다. 나디아는 일단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잘 준비를 하자 아실은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만 하루 가까이 비워져 있던 방은 벽난로에 불을 지펴도 금방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불 안은 차가웠고 체온으로 덥혀지길 기다리며 차가운 시트가 스쳐 지나가는 손끝과 발끝을 움츠리던 나디아는 자연스레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지쳤고 추웠으며 지금 이곳에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나디아는 이불 한쪽을 들어 올렸다. 피곤한 얼굴로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있던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불에 덴 것처럼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린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드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피곤하잖아.”
얼마나 구차한 핑계인지 알고 있었다. 저지르고 봤지만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추워서 그래.’
나디아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바로 곁에 뜨거운 체온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추위에 떨기 싫었다.
“추워….”
의식하지 못한 듯 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초조하게 두드리던 아실의 움직임이 멎었다. 석상처럼 버티고 선 그의 결심이 허물어지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망설임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나디아가 들어 올린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그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곁에 누웠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맨살에 닿는 시트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
바모스로 가는 배의 출항이 내일이었다.
다행히도 발목은 조금 삔 게 다였고 찜질을 하고 쉬자 붓기가 가라앉았다. 붕대를 꽉 동여매면 혼자서도 그럭저럭 걸을 만해졌다. 온몸을 욱신거리게 하던 근육통도 생각보다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아실은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배에 오르기 전까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일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나디아의 발이 멀쩡했다면 함께 시장을 구경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실도 그녀가 성치 않은 발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보다는 여관에 머무는 것이 낫다는 말에 동의했다.
아실이 나간 뒤 나디아는 다시 잠이 들었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때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그녀는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새 옷을 입고 식사를 하기 위해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여관 1층을 빽빽하게 채운 의자와 테이블들을 반쯤 채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들이켜며 요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나디아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정오까지는 고작 10분도 남지 않았다. 아실이 그때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그가 들어오면 함께 식사를 하면 좋겠다고 여겼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간 큰 짓을 벌여?”
“난들 알겠나.”
탁자를 탕 내려치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어깨가 들썩일 만큼 놀랐다가 저들끼리 떠들며 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아실이 여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더니 딱 멈추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아실이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옆자리에 앉고,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귀를 파고 들어올 만큼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기어코 반역을 입에 담았다.
“신이 노하신 거지. 반역자들에게 벼락을 내린 거야.”
물을 마시던 나디아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시작했고, 여관 안은 거짓말처럼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반역이라니. 자연스럽게 에드윈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을 깔보는 듯하던 오만한 보라색 눈동자를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도피를 하면서도 내내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에드윈의 근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관심 또한 그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디아의 행동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아실은 나디아가 뒤에서 들려오던 이야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디아가 말리기도 전에 몸을 돌려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수도에서 내려오는 길입니까?”
“그렇다오.”
두 사내는 경계하는 기색이 강했지만 아실이 지나가던 종업원을 붙잡고 술을 사 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여관 안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종업원이나 주인까지도 안 그런 척하면서도 반역이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온 수도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궁이 무너졌다고요?”
“그렇다니까!”
이쯤 되자 관심 없는 척 뒷짐 지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내들의 테이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 작자가 관심을 끌려 거짓말을 한다는 반응을 보였기에 사내가 펄쩍 뛰며 몇 번이고 사실이라며 소리소리를 지르는 걸 들어야 했다.
나디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서 도무지 태연한 체 식사를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가루가 될 때까지 꼭꼭 씹어 삼켰던 감자가 명치 위를 꽉 틀어막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숨기려고 쉬쉬하는 것 같더니만, 그거를 어떻게 숨기나? 온 수도를 다 깨울 것처럼 콰광! 하더니만 우르르 무너지는데 나는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지. 내 그날로 장사 접고 짐을 싸서 뛰쳐나왔는데 이미 소문이 다 퍼져서 그 주변은 다 그 이야기만 합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여관 주인이 싸구려 에일 한 병을 더 내어 오며 그를 닦달했다. 관심이 쏠리자 기고만장해진 사내가 수염을 두어 번 쓸어내리더니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관객이 생기자 신이 난 것이 분명했다.
“듣자 하니 반역을 작당하던 황후나 귀족들이 죄다 깔려 죽었다더군.”
“황후가 반역을 해?”
“여기는 소식이 늦구먼. 나 아니었으면 다들 세상 돌아가는 일은 하나도 모르고 살았겠어. 영광의 홀 계단을 타고 납작해진 귀족들이 흘린 핏물이 흘러내려서 개천을 이루었다고!”
“자네가 직접 보기라도 했나?”
누군가의 의심 가득한 말에 사내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질렀다.
“또 수도나 그 근처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거들랑 물어보시오. 내가 거짓부렁을 하는지 아닌지!”
나디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반도 줄지 않았지만 식사를 계속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먹었던 것이 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뒤로 신이 노하신 거라며 욕설을 지껄이는 사내의 목소리와 그에 동조하거나 비웃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휘청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나디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으나, 빠르게 뒤따라온 아실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부축했다. 나디아는 혼란으로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에드윈, 에드윈이 거기 있었을까…?”
아실은 빠르게 주위를 훑고 나디아의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았다는 판단이 들자 재빨리 그녀를 이끌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문을 걸어 잠드는 동안도 나디아는 넋 나간 듯한 얼굴로 아실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너진 잔해 안에 그 남자가….”
“있으면요?”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짙게 가라앉은 녹색 눈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왜 걱정을 합니까? 왜 그 남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동요합니까? 왜요?”
그의 물음은 나디아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게. 왜지? 그 남자의 곁에 있는 순간순간, 홀로 외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스러운 단어들, 그녀를 모욕하는 말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야 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왜지? 왜 이렇게 마음이 요동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에 먼저 튀어 나갔다. 사랑하냐니,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고급 창부를 대하듯 내려다보던 차가운 눈과 황제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던 넓은 등이, 그러고는 떠나기 전날 밤 무언가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했던 관계가 동시에 떠오르며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댔다. 나디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그 사람은 내 남편이잖아.”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왜 배를 탄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알키드를 피하려고…?”
아실은 그녀를 이끌어 의자에 앉게 했다.
“그것뿐이었다면 성에 있는 게 더 안전했을 겁니다. 그 오합지졸은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요.”
그의 말은 나디아의 주의를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노먼의 일로도 느꼈겠지만,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누구라고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황제겠죠.”
“왜 나를….”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각하와의 싸움에 귀부인을 이용하고 싶은 것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추측일 뿐이지만.”
아실은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떨결에 끌려오며 애매한 추측만 반복하던 나디아에게 드디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알려 줄 마음이 든 것처럼.
“제가 받은 명령은 ‘준비된 은신처까지 귀부인을 무사히 호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