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68화 (68/115)

68.

“반역자의 졸개 주제에.”

지금 놈의 악에 받힌 말 따위를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그를 살려 둔 채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잠시뿐이었다. 그의 귀부인이 비에 젖은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지만 않았다면 그리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검의 궤적을 뒤따라 축 젖은 금발이 달라붙은 머리통이 피를 흩뿌리며 진흙탕을 구르고 머리를 잃은 몸이 허물어졌다. 몇 시간 가까이 사람을 지옥에 담가 두었던 배짱 좋은 놈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아실은 마음속으로 타샤에게 감사를 읊조렸다. 뒤이어 그는 피로 물든 검을 대충 풀에 닦아 검집에 쑤셔 넣고 서둘러 나디아에게 다가갔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실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반쯤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던 나디아가 눈을 떴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휘감고 매달렸다. 그 힘은 지나치게 약하기 짝이 없어서 아실은 그녀가 저를 놓치기 전에 작고 마른 등을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에 닿은 차가운 입술이 덜덜 떨며 울먹였다.

“아, 아실, 아실, 나… 무서워서, 무섭, 흑….”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나디아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정신으로도 아실에게 매달렸다. 그의 품에서는 희미한 피 냄새가 났고 비에 푹 젖어 있었지만 척척하게 달라붙은 천 너머로도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는 덜덜 떨며 그에게 한껏 매달렸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디아는 눈을 감았다.

***

그녀가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을 때는 허름한 헛간 같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아주 낡은 곳이었지만 궁여지책으로 비를 피하기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발목이 뻣뻣하다 싶더라니 부목과 함께 천 조각으로 칭칭 동여매 응급처치를 해 놓은 것이 보였다.

깊게 잠들었던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만치 한쪽에는 아실이 타고 왔을 커다란 말과 노새 두 마리가 멀뚱히 서 있었고 아실은 그녀를 등진 채 불을 피우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기가 조금 피어오르나 싶더니 불이 커지는 건 금방이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짐을 꺼냈는지, 나무 그릇이나 마른 약초, 향신료 따위가 아무렇게나 남은 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물건들을 담고 있던 나무 상자들은 박살난 채 장작거리로 전락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고 있자니 잠시 잊었던 한기가 엄습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아실이 뒤돌아봤다. 그는 민첩하게 나디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노, 노먼 경은….”

“죽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단호한 대답에 겨우 소란스럽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여관을 떠난 후로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여전히 두피를 욱신거리게 하는 통증과 퉁퉁 부어오른 발목 따위가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그녀가 추위가 아닌 불안으로 떠는 것을 눈치챈 아실이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나디아가 진정할 때까지.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추, 추워.”

더듬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이 떨려서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실이 굳은 얼굴로 손을 뻗더니 그녀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나디아는 펄쩍 뛰며 물러났으나 붉은 머리의 기사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엄한 얼굴을 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이 더 내려갑니다. 옷을 벗고 잠시라도 말려 두는 게 좋아요. 그동안은 이걸 두르고 계십시오.”

아실이 짐마차를 덮고 있던 방수 천을 가져와 내밀었다.

“젖은 옷보다는 나을 겁니다.”

“내가… 할게.”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느닷없이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그에게 매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디아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얌전하게 대답했다. 아실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그는 비에 젖지 않은 나무 조각 몇 개를 골라내 불 속으로 던져 넣더니 제 짐 안에서 쇠로 된 수통을 꺼내 빗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는 사이 나디아는 추위로 곱은 손으로 서두르며 옷을 모두 벗었다.

그녀는 약간 뻣뻣한 방수 천을 몸에 둘둘 휘감고 손만 내밀어 불을 쬐었다.

아실은 빗물이 가득 담긴 통을 모닥불 안에 넘어지지 않도록 올려 두었다. 마차의 짐 속에 있던 약초 몇 가지를 뜯어 넣고 기다리자 물이 데워지며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가 뜨거운 약초 차를 나무 그릇에 옮겨 담은 뒤 나디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반갑게 받아 들고 입이 데지 않게 후후 불어 가며 차를 몇 모금 넘겼다. 배 속에서부터 천천히 온기가 퍼졌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그릇을 잡고 있던 손끝에서도 파란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을 집어 들었다. 반쯤 눈을 감고 차를 마시던 나디아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려고?”

“먹을 만한 걸 구해 오겠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나절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두려워 꺼낸 거짓말이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들통날 것이 뭐란 말인가.

나디아는 새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그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멀리 가지 않을 겁니다. 10분 내로 오겠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혼자 남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두려움이 달려들었다. 아직도 나무둥치에 웅크린 채 느꼈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전신을 가늘게 떨리게 했다.

신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폭력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녀는 신분이 신분인 만큼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충격적이었던 만큼 쉬이 떨쳐 내기 어려웠다. 나디아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빗소리 사이로 풀숲을 헤치고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나디아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던 참이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뚫어져라 입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야에 나타난 것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던 아실이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고 안도가 찾아왔다.

그가 했던 말대로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돌아온 아실은 가장 먼저 헛간 안의 나디아를 살폈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녀에게 별일이 없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 행동이 나디아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긴 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닥불의 열기에 따뜻해진 살갗이 차게 식은 볼에 닿았다.

아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냥이라도 했는지 손에 시커먼 덩어리를 쥔 채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한동안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뾰족한 나무 꼬챙이에 꿰인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실은 꼬챙이를 모닥불 위에 기울어지도록 솜씨 좋게 바닥에 꽂고 지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어나 한쪽에 뭉쳐 있던 나디아의 젖은 옷들을 가져갔다.

그는 천을 비틀어 물기를 짜고 빈 상자를 모닥불 근처로 가져와 옷을 널었다. 그러고는 거리낌 없이 제가 걸치고 있던 갑옷과 옷도 벗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나디아만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바지만 걸친 아실은 그제야 모닥불을 앞에 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축축하게 젖은 붉은 머리를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대화는 없었다. 나디아는 여전히 따뜻한 허브차를 홀짝거렸고, 아실은 불길에 익어 가는 고기를 살필 따름이었다. 침묵이 지겨워진 나디아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르네일로 갈 거야?”

“네. 비가 그치면.”

대화가 끊겼다. 천천히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실은 꼬챙이를 하나 들어 올려 고기가 익었는지 살펴보더니 고기를 빼냈다. 그러고는 뜨겁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살점을 먹기 좋게 찢었다.

그의 손을 타고 뜨거운 기름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실은 그것을 몇 번 불어 적당히 식히더니 나디아의 입가로 들이댔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고개를 뒤로 물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택도 없는 억지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내뱉고 나자 귀가 화끈거릴 만큼 달아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수발을 들어 주는 것이 괜히 민망해 주절거린 말이었지만 아실은 굳이 그 점을 꼬집어 타박하지 않았다.

“뜨거워서 안 됩니다.”

“그러는 당신은….”

말을 하느라 벌린 입 안으로 고기 조각이 들어왔다. 나디아는 얼떨결에 입에 들어온 것을 씹었다. 고기는 약간 누린내가 났고 간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너무나 맛있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기 새가 먹이를 받아먹듯이 아실이 먹여 주는 대로 고기를 받아먹었다. 나디아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그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아실은 뒤늦게 남은 고기를 먹어치웠다.

비는 먹구름에 가려 있던 해가 저물어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쯤 되어서야 멎었다.

그사이 아실은 나무 상자를 두어 개 더 부수었고 나디아는 뻣뻣한 천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반쯤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녀를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금방 잠이 들 것처럼 나른해졌지만 뒤늦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나디아는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아실에게 말했다.

“타샤가 준 목걸이, 잃어버렸는데….”

“어디서 말입니까?”

“아까 거기….”

말을 흐렸지만 아실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듯, 주인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 충견처럼 목걸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풀숲 사이에 떨어져 있던 목걸이를 찾아왔다.

나디아는 배신한 기사의 시체가 그 인근을 굴러다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기로 했다.

타샤는 보석에 금이 가면 버리라고 했다. 그녀가 심은 마법은 제법 강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먼의 손 한쪽을 뭉그러지게 했음에도 붉은빛 보석은 실금 하나 가지 않고 영롱하게 빛났다. 나디아는 끊어진 목걸이 줄을 매만지며 물었다.

“언제 출발해?”

“이틀 내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니 여유가 좀 있습니다. 일단은 쉬시는 게….”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데…?”

가까이 다가온 아실이 조금 흘러 내려갔던 천을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턱 밑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말을 빠르게 달리면 세 시간, 천천히 가면 다섯 시간쯤.”

나디아는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지금 가는 게 좋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아실은 못마땅한 낯을 했지만 이내 그녀의 억지를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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