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저런, 새파랗게 질리셨군요. 안쓰럽기도 하지.”
어느덧 코앞에서 멈춰 선 노먼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짓무른 손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나디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멎었다.
노먼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디아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어딘가 몽롱했다. 몇 번이고 들이켜던 뿌연 연기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거였군요. 그… 잡종 짓이겠죠?”
나디아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그가 지칭하는 욕설의 주인공은 타샤인 모양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귀부인. 해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귀부인을 모셔다 드릴 곳이 있을 뿐입니다.”
기사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떨기만 했다. 몸이 떨리는 게 한기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나디아는 몸을 돌려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진흙 섞인 물이 튀고 치맛자락이 더러워졌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어깨가 붙잡혔다.
“악! 씨발!”
욕설과 함께 노먼의 억센 손길은 금세 떨어져 나갔지만 대신 나디아를 내팽개치듯 놓아 버린 탓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진흙탕을 나뒹굴었다.
검을 뽑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소리를 들은 나디아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머리가 마비되었다.
넘어지면서 호되게 꺾이기라도 했는지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일었다. 그녀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땅바닥을 기며 노먼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모든 발버둥은 조금도 소용이 없다는 것처럼 노먼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어깨에 발을 걸고 뒤집었다. 얼굴 위로 얼음처럼 차가운 빗물이 쏟아져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죽이지만 말라고 했으니까.”
흐릿한 시야로 번뜩이는 칼날이 다가드는 것이 보였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의 검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낚아챘다. 가느다란 끈이 맥없이 끊어졌다.
“안 돼!”
붉은 보석이 허공을 날아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가온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제 손을 좀 보십시오. 이게 다 귀부인 탓입니다.”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남자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망가진 손을 나디아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댔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 버릴 것처럼 아팠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머리채를 잡은 기사의 손을 붙잡았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귀부인께서도 편하고 저도 편했을 텐데. 왜 일을 좆같이 만드시는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멈춰 선 채 숨을 고르던 노먼은 이내 검을 다시 칼집에 쑤셔 넣었다. 그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나디아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걸었다.
맥없이 끌려갈 때마다 무자비하게 당겨지는 두피는 물론이고,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늘어진 발목이 돌이나 나무뿌리 따위에 부딪히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 이거, 윽, 이거 놔요!”
“하하, 놓으면 도망가시려고요? 안 됩니다. 저는 명령을 받은 게 있어서.”
숨이 찬지 헉헉거리며 내뱉는 기사의 목소리는 미친 사람 같은 광기가 느껴졌다. 자비 없는 손길에 가축이 된 것처럼 질질 끌려가면서 나디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명을 지르거나 우는 것뿐이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로는 단련된 기사의 힘을 도무지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나디아의 새파란 입술 사이로 그녀가 의지한 적 있던 두 남자의 이름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
비가 쏟아지자 아실은 더욱 초조해졌다. 비가 오면 흔적이 지워지기 쉬웠다. 가뜩이나 확실하지 않은 루트였는데, 일이 한 번 꼬이기 시작하더니 계속해서 말썽이었다.
빗물에 젖어 든 입술 사이로 쉴 새 없이 젠장, 하고 욕설이 쏟아졌다. 평생 단 한 번도 찾은 적 없던 신을 찾는 부름이 절로 나왔다.
살갗이 차게 식었다. 빗물 때문인지 아니면 초조함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실은 이미 최대 속도를 내고 있는 말을 자꾸만 재촉했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말발굽에 채인 흙탕물이 튀어 오르고 허연 입김이 찰나 머물다 사라졌다.
길에 남아 있던 바퀴 자국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땅속으로 흡수되지 못한 빗물들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지친 짐승을 독려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쉼 없이 ‘이 길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고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그런데 여기가 아니면? 처음부터 잘못 짚은 거라면?
그런 의심을 떠올렸다가 털어 버린 횟수가 백여 번이 넘어갔을 무렵, 아실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숲길은 시간을 잡아먹기에 딱 좋았다. 우거진 나무를 모조리 밀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달리던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멀뚱히 서 있는 노새 두 마리와 그 뒤에 매달린 자그마한 짐마차였다.
그가 쫓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불안한 생각에 다시 휩싸였다.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실은 넘어질 듯 말에서 내려 짐들 위를 덮은 하얀 방수 천을 들어 올렸으나 그 안에도 나디아는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주위를 둘러보며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노새와 마차를 두고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비가 오는데 멈춰 설 이유가 무엇인가?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행보였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위는 온통 숲이었다. 숲 속으로 들어간 걸까? 왜? 끊어질 듯 이어지던 미약한 불길함이 몸집을 불렸다.
번개처럼 그의 몸을 관통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의 가련한 귀부인이 기특하게도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친 걸지도 몰랐다. 다시 마차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숲 속에서 추격전을 벌이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개자식보다 먼저 발견해야 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추측을 끝낸 아실은 무작정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 넓은 숲 어디에 그녀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함에 소리쳐 부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나디아를 찾는 이가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신중해야 했다.
빗방울이 나뭇잎과 풀숲 위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 사이로 고함지르는 남자의 욕설이 들렸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지만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실은 그 목소리가 노먼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뛰었다. 빽빽한 나무와 풀숲을 헤치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마법사가 나디아에게 건네주었던 펜던트가 떠올랐다. 그것이 그녀를 지켜 줄 것이다. 하다못해 시간을 끌기라도….
아실은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녀를 발견한 것은 노먼이 먼저였다. 아실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채 질질 끌려가는 나디아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노먼의 손을 빠르게 훑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고통에 찬 신음과 울음을 뱉어 내는 새파란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들렸다. 그는 생각하기도 전에 검을 빼 들었다. 그의 귀부인을 함부로 대하던 개자식이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쿠르쉬드!”
노먼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아실은 검을 휘둘렀다. 나디아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 있던 손이 몸과 분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자신의 존재를 늦게 눈치챈 것이 다행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감사해야 할는지도. 나디아를 인질로 잡아 그를 위협했다면 일이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게 분명했다.
검을 잡지 못하는 기사는 쓸모없었다. 노먼은 양손잡이였다. 손을 하나 잃었고 하나 남은 손은 뼈가 다 드러날 만큼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 손으로 검을 쥘 수 있다면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니 박수 정도는 쳐 줄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시체가 된 후에.
노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개자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산 채 저며 주겠다고 다짐했건만 빗물이 떨어지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디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실은 이 대치를 빠르게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단장이라니까. 눈치도 못 챘지 뭐야.”
노먼의 성치 못한 손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실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노먼은 제법 실력이 괜찮은 축에 속했지만 아실만큼은 아니었다. 심지어 한 손은 잃고 한 손은 성치 않은 상태였다. 아실은 어렵지 않게 우위를 예상했다.
아실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칼끝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간발의 차로 아실의 검을 피하는 노먼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근육이 별로 남지 않은 노먼의 손은 검을 꽉 쥐기에 부적합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검을 쥔 손이 덜그럭거렸고 바닥으로 피와 살점이 떨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물론 흉측해진 손까지, 썩 보기 좋지 못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도 어딘가 이상했다. 균형이 맞지 않는 것처럼 기울어진 중심과 묘하게 느린 반응이.
“…약을 했나?”
“들켰습니까? 너무 아파서….”
가쁜 숨을 뱉어 내느라 입가의 공기가 허옇게 물들었다가 맑아졌다. 이제야 약 기운에 물들어 흐려진 노먼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실은 어차피 놈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잘된 일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은 한참이나 남았고 여기서 노먼을 상대하다 크게 다친다면 나디아를 보호할 사람이 없으니까. 제 손으로 무덤을 팠을 남자를 구덩이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단번에 끝낼 수 있도록 급소를 노리며 찔러 들던 아실이 노먼의 남은 손을 노리고 크게 검을 휘둘렀다. 결국 검을 놓친 기사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렀다.
“제 이야기는, 허억, 한번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마디도 아까웠다. 노먼의 일그러진 얼굴과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