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66화 (66/115)

66.

진흙에 미끄러지거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부스럭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기를 반복하며 걷고 있자니 욜이 그리워졌다. 말을 타는 것 역시 힘들지만 적어도 이동 속도는 빠르니까.

주위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슬그머니 물러나자 하늘을 수놓은 별들도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나디아는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대로 계속 이동해야 할지 어딘가 숨어서 기다려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항상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삶을 살다가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오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일단, 일단 조금만 쉬자. 그녀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움푹하게 파인 나무둥치에 웅크리고 앉은 나디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숨을 골랐다. 빠른 시일 내에 아실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은 물론이고 물과 식량 역시. 이대로는 이틀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한 이름을 중얼거렸던 나디아는 움찔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절박하게 부를 이름은 그게 아닌데.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사람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전해 들을 수 있는 소식이 거의 없었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잘되어 가고 있는 건지. 그가 떠난 뒤로 벌써 2주는 지난 것 같은데.

땀이 식으니 한기가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디아는 뻣뻣해진 다리를 조금 주무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흙과 낙엽을 털어 내는데 뺨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투둑투둑 떨어지던 물방울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소나기인가?’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졌다. 나디아는 나무 기둥에 바짝 붙어 섰다.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터라 쏟아지는 비를 모두 맞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간혹 한두 방울씩 망토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망토를 여몄다. 비가 오자 기온이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뱉는 숨이 공기를 하얗게 물들였다. 가뜩이나 몸 상태가 좋다고 하기도 어려운데 차가운 비를 맞으며 익숙지 않은 숲길을 걸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디아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 있자. 조금만 기다리면 비가 그칠 수도 있으니까.

그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거나, 아실이 그녀를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

아실 쿠르쉬드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조금 늦은 밤이었다.

적당히 여관 주위를 훑어본 뒤 나디아와 그가 탈 배를 수소문하던 그는 나흘 후 출항하는 바모스행 티켓을 두 장 구하느라 시간을 조금 지체했다. 돌아온 여관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적당히 떠들썩했고 그가 걱정할 만한 소란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넉살 좋게 인사하는 종업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서두르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나디아가 있을 방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노먼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출몰할지 모르는 산이나 숲 속도 아니었고 도시 안의 여관이니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관대하게 봐줄 수 있는 아량이 있었다. 물론 나디아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경우에만.

성큼성큼 걸어 문 앞에 선 아실은 손을 들어 노크를 하려다 멈칫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결 다급해진 손길로 문을 열어젖혔다. 묘한 예감대로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벽난로에는 잔불이 남아 있었지만 흐트러진 침대 위에는 체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방을 비운 지 한참은 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시야에 급하게 일어선 것처럼 비뚤어진 의자와 구겨진 깔개가 들어왔다.

어째서 이렇게 급하게 떠난 걸까? 습격이라도 있었나? 아니, 그랬다면 여관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충돌이 있었다면 지금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부서지거나 흐트러져 있어야 옳았다.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서서 상황을 유추하던 아실이 뒤돌아 방을 나섰다. 날듯이 계단을 내려간 그는 마구간으로 들이닥쳤다. 한가롭게 건초를 우물거리는 나디아와 노먼의 말을 확인한 그는 다시 여관으로 달려 들어가 종업원을 붙잡았다.

말이 그대로 있으니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불안이 그를 행동하게 했다. 혹여 누가 나디아의 얼굴을 기억하기라도 할까 봐 꽁꽁 숨겼으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목격자를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일행 기억합니까? 갈색 머리의 여자와 금발의 남자인데, 키는 이 정도….”

“기, 기억합니다, 나리.”

“어디 갔는지 봤습니까?”

다그치듯 묻는 그의 기세에 놀란 사내가 당황한 낯으로 눈을 끔뻑거리더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저 급하게 나가셨죠. 두 시간은 족히 지났을 겁니다.”

“젠장.”

아실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두 시간이나 지났다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볼 수도 없었다. 말도 그대로라면 대체 뭘 타고 간 거지?

역시 그 자신 외에 다른 자와 둘만 남겨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던 엘란츠 후작의 말이 이렇게 와닿는 순간이 또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노먼과는 여기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게 승선권을 두 장만 산 이유였고. 하지만 한발 늦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아실이라고 해도 하루 온종일 날을 세우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음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순간은 생기기 마련이었고, 아실의 실수는 수년 간 생사를 함께한 전우에게 가졌던 가느다란 믿음을 끊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안일했다는 자책과 배신감 따위의 감정들이 뒤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뒤이어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파도가 되어 찾아오는 것은 뱃속을 들끓게 하는 분노였다.

그녀에게 상처 하나라도 있다면 그 변절자는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또 뭐 본 건 없습니까? 수상한 일이라든가, 뭐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실의 인내심이 다해 뛰쳐나가기 직전에야 긴가민가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짐마차가 없어졌다고 소동을 부리는 손님이 있었는데요. 이런 것도 도움이 될까요?”

아실은 자신의 직감을 제법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은화를 한 줌 건네주었다. 자기 손 위로 떨어진 동전에 정신을 모두 빼앗긴 사내의 어깨를 짚으며 마구간에 있을 말 두 마리를 맡아 달라고 당부한 아실은 빠르게 여관을 빠져나왔다.

말에 올라탄 그는 주위를 뒤지고 다니며 짐마차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던 종업원도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까지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실은 주위를 이 잡듯이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더라면 길에 남아 있을 바퀴 자국 따위를 따라갔겠지만, 그가 놓친 시간 동안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짐승들이 남긴 발자국 따위가 뒤섞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실은 성의 세 관문을 모두 돌며 두어 시간 전, 노새 두 마리가 이끄는 작은 짐마차가 지나간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순순히 대답해 주기도 했고 기억이 안 난다며 버티기도 했으며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소란을 피울 수 없었던 아실은 이를 갈면서도 그들의 손에 동전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북문 경비대로부터 그런 짐마차가 지나간 것도 같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새벽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초조와 걱정으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지금부터 따라붙는다고 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는 이를 갈았다.

비겁한 놈들. 황제는 후작보다도 더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엘란츠 성의 홀에서 나디아를 품에 안고 함부로 주물러 대던 그 뻔뻔한 놈을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은 혹여나 후폭풍이 그녀에게까지 피해를 끼칠까 걱정해서였다.

후작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자신도, 모두 얼간이였다.

아실은 성문에서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메마른 흙길 위로 희미하게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가 찾는 마차의 흔적인지, 정말 나디아가 이 길을 지나갔는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아실은 그의 감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 길을 선택한 것이 틀렸다면 영영 그의 귀부인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탁 트인 들판을 따라 이어진 길은 멀리까지도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위를 지나가고 있는 형체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새의 걸음이 아무리 느리다고는 하나 아실이 지체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멀리 이동할 수 있었다.

노먼 혼자서 모든 일을 하진 않을 테니 중간에 그쪽 패거리가 합류할 확률이 높았다. 그 전에 따라잡을 수 있기를, 이미 합류했다면 그들의 숫자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이 아니기를 바랐다.

***

나디아는 오들오들 떨며 차게 식은 뺨을 문질렀다.

비가 얼른 그쳐야 할 텐데.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여기 이렇게 가만히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인지 불안은 계속해서 쌓여 가며 그녀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빗속을 뚫고 갈 자신은 없고, 가만히 있자니 불안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소나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빗줄기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치지를 않았다. 나디아는 빗소리 사이에서 풀을 헤치며 걷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며 놀라곤 했던지라 이번에도 예민해진 탓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넘기려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여기 계셨군요, 귀부인. 한참 찾았습니다.”

비에 홀딱 젖은 금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한 걸음도 물러 설 수 없었다. 울퉁불퉁하게 일어난 나무껍질이 등을 찔렀다.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노먼은 언제나처럼 유들유들한 얼굴로 궁지에 몰린 사냥감의 숨통을 조이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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