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65화 (65/115)

65.

나디아는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죽이려 애쓰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조금 전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손은 물론이고 턱까지 덜덜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왜 이리 숨이 차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마저도 무서웠다.

나디아는 제 가슴 위를 꾹 내리눌렀다.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위협도 없는 것 같은데 돌아가면 안 되느냐고 졸랐던 일전의 행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깨달을 계기가 이렇게 찾아오기를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마차가 한 번 덜컹일 때면 나디아의 심장도 함께 덜컹거렸다. 아실은 무사한 걸까?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있다 했으니 그들을 떨쳐 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다시 합류하는 거겠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노먼을 붙잡고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퍼붓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자신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행동을 막아섰다.

지금까지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너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얌전히 참기만 했다. 조금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도 하지 못했더라면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이라고 나디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노먼의 말대로 르네일을 벗어나면 아실도 뒤따라올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겠지. 상황이 급박한데 설명을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녀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생각들을 몰아내려 애쓰는 사이 노먼이 모는 짐마차는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매끄럽게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는 밤 근무를 하는 경비병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여유마저 보였다.

그들은 수확이 끝나 휑한 밀밭을 지나쳤고 아무것도 없는 목초지 역시 지나쳤다. 얕은 개울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따라붙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자니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풀벌레 우는 소리와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이 불어 짐을 덮은 천이 부시럭대는 소리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개울물 소리 그리고 노새가 투레질을 하는 소리뿐이었다.

겁에 질려 덜덜 떨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평화롭기 그지없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게 안심해도 좋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조금쯤 느슨해지기에는 충분했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짐들과 머리 위를 뒤덮은 천의 끄트머리를 밀어 올렸다.

어두컴컴한 들판을 둘러보았으나 수상한 움직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부석 쪽으로 다가갔다. 자그마한 짐마차라 두 걸음 만에 마부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디아는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앞을 살피며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노먼의 어깨가 흠칫 굳는가 싶더니 그녀가 손끝으로 들추고 있던 천을 다시 덮었다. 얼핏 보이는 그의 한쪽 손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이상하게 짓물러 있었다. 나디아가 의문을 키우기도 전에 노먼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랑카드로 갑니다. 피어슨과 베니시가 그쪽으로 갔을 테니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별일 없다면 단장도 이내 따라올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제야 나디아의 희게 질린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깨를 뻣뻣하게 만들던 긴장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갔다. 그녀는 짐마차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망토를 꼭 여몄다.

“눈이라도 좀 붙여 두세요.”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나른했다. 나디아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는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

갑작스럽게 소름이 돋아 잠이 깼다. 나디아는 팔을 문지르며 눈을 떴다. 짐마차는 여전히 덜컹이며 달리고 있었고 주위는 어두웠다. 잠든 지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목뒤가 당기고 소름이 돋았다. 추워서, 혹은 여독이 모두 풀리지 않은 탓이라 여기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감이라는 게 있었다. 만성이 되어 버린 불길함 안에서도 묘한 의구심이 도드라졌다.

나디아는 살며시 천을 걷어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먼이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렇게 여유롭지? 그녀를 방에서 끌어낼 때의 다급하고 초조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디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금살금 움직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랑카드로 간다던 말과 달리 짐마차는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르네일에서 랑카드로 가는 길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도에서 봤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랑카드로 가려면 동쪽으로 달려야 했다. 어디를 가는 거지? 한 번 싹트기 시작한 의심이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기운 달을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내내 그의 생사를 불안해해야 하건만 어째서 노먼은 즐거워 보이는지.

답답함과 의구심 사이에서 입술만 질근질근 씹어 대던 나디아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타샤가 걸어 주었던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옷깃을 헤집어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살갗에 닿아 있느라 체온을 전해 받은 목걸이는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마력이 다할 때까지 악의를 가진 자는 부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겁니다.”

마법사의 목소리를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악의를 가진 자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노먼은? 나디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심하게 짓물러 있던 그의 오른손이 떠올랐다.

짐마차에 오를 적 그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었다. 그게 명확한 증거였다.

‘바보같이!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나디아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확신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할수록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았다.

다짜고짜 도망치는 것은 소용없었다. 그녀의 달음박질로 훈련된 기사를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아마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다시 붙잡힐 것이다. 그렇다고 노먼을 처치하기에는 그녀에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노먼을 찌를 수 있다면…. 나디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 실패하면 화만 돋울 뿐이다. 물론 그녀라면 제대로 사람을 찌르지도 못하겠지만.

나디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달리던 마차가 크게 덜컹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숲길이라 길이 험한 모양이었다.

순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디아는 짐과 그녀의 머리 위를 덮어 주었던 흰 천을 다시 제대로 덮어 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천천히 마차의 뒤쪽 끝으로 이동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차가 고르지 못한 길을 지나며 튀는 소리나 덜컹임 따위가 어설픈 움직임이 내는 소음을 묻어 주었다.

“흠… 망할, 아….”

기사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사이사이 욕설이 들려왔다. 흉측하게 짓무른 손의 통증을 참기 어려운 게 분명했다. 후욱, 하고 숨을 길게 뱉어 내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바람에 흩어져 날아왔다.

진통제일까?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희미해진 연기가 나디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진통제를 썼다면 감각이 둔해질 테니 좋은 일이었다.

나디아는 마차 아래로 느리게 지나가는 바닥을 노려보았다. 노새 두 마리가 이끄는 짐마차는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거나 나뒹굴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이전처럼 마차가 크게 덜컹일 순간을 기다렸다.

다리가 저릿저릿한 게 쥐가 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마차가 또 한 번 심하게 덜컹거렸다. 허둥지둥하던 나디아는 연달아 한 번 더 덜컹거릴 때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다행히 별다른 실수나 큰 소음 없이 내릴 수 있었다.

짐에서 그녀의 체중만큼의 무게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지만, 궁여지책치고는 나쁘지 않았는지 마차는 멈춰 서는 일 없이 계속해서 길을 따라 나아갔다.

혹시라도 바로 들킨다면 마차가 덜컹거려 떨어졌다 변명할 생각이었다. 나디아는 주저앉은 채 숨마저 멈추고는 마차와 흥얼거리는 소리 따위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나디아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침착하게 망토와 치맛자락을 모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둘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노먼은 머지않아 그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챌 것이고 그러면 바로 추적해 올 것이다. 나디아는 그동안 아실이 무사하기를,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내 찾아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좋다고 했지만 나디아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기사들이 흔적이라고 말하던 것들도 그녀는 알아보지 못하기 일쑤였으니까.

그저 최대한 숲을 휘젓지 말고 떠나온 길을 되돌아가거나 적당히 숨을 만한 곳을 알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지진 않았을 테니 위험한 맹수나 마수는 없지 않을까? 그저 스치듯 떠올린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숲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해서 다행이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따위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당장이라도 그 소리를 듣고 노먼이 쫓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일단 르네일 쪽으로 걷자. 조금이라도 노먼과 멀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자 어김없이 또 아실이 떠올랐다. 추적을 따돌리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 같은데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된 것인지? 혹시라도 노먼이 방심한 아실을 처치하고 그녀를 데려온 거라면? 그러면… 아무리 기다려도 아실은 오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이 자꾸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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