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64화 (64/115)

64.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실은 화를 내는 대신 나디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노먼이 돌아왔다. 금발의 기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놀라는 듯하였으나 아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디아를 제 말에 태우는 것을 보고는 상황을 이해했다.

어리둥절한 것은 그녀뿐인 듯했다. 저만치에서 풀을 뜯던 욜이 눈이 끔뻑거렸다. 아실은 욜의 고삐를 노먼에게 쥐여 주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는 눈치 빠르게 고삐를 받아 들었다.

아실은 냉락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디아의 뒤로 올라탔다. 그는 나디아가 제 품에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잡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제 허리에 감았다.

놀라며 손을 떼는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어 다시 허리를 끌어안게 한 아실은 말에 매달려 있던 주머니를 열었다. 마른 약초를 꺼낸 아실이 그것을 나디아에게 먹였다. 회복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녀는 의심 없이 씁쓸한 약초를 질겅질겅 씹었다.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디아는 싫어도 그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기댔다. 그녀는 노먼이 두 사람을 흘끔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일 오후쯤이면 르네일에 도착할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발의 기사가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여 왔다. 나디아는 어색함에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달리지 않을 테니 눈이라도 좀 붙이십시오.”

아실이 딱딱하게 덧붙였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달리는 말 위에서 잠들 만큼 간이 크지 않다고 구시렁거리던 나디아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아실은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한 손으로는 나디아의 등을 받친 채 말을 달렸다. 노먼이 가까이 따라붙었다.

“피곤하실 만도 하죠. 귀부인께서 감당하시기엔 힘든 여정이니까요.”

아실은 노먼을 흘끔 보고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초에 수면 효과가 있는 약초 잎을 섞어 먹였다. 나디아는 앞으로 피로가 다 풀릴 때까지 어지간해서는 깨지 않을 것이다. 노숙과 여정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녀의 정신력이 깎여 나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귀부인께서, 단장을 많이 의지하시네요.”

떠보는 것처럼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완벽하게 거짓말을 소화할 자신이 없을 때에는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아실은 지금껏 자신이 이렇게까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늘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엘란츠 후작의 목소리가 귓가를 내내 맴돌았다.

“아무도 믿지 마라.”

같은 기사단에서 생사를 나눴던 전우들도 믿지 말라는 말이었다.

후작은 아실 역시 믿지 않았지만 나디아에 대한 그의 감정은 믿었다. 그 남자는 싫었지만 아실은 그의 믿음대로 그 말을 철저하게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직접 뽑은 이 여정의 구성원들이 최소 3년에서 최대 6년까지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이라고 하더라도 온전히 믿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소수였던 일행을 또 반으로 나눈 것은 혹시라도 있을 추적자를 교란시키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의심’에 대한 이유도 있었다. 여럿을 동시에 지켜보는 것보다는 소수인 게 감시하기 더 쉬웠을 테니까.

의혹을 가진 상대들에게 아실, 자신이 나디아에게 느끼는 각별함, 혹은 그 반대의 것이라도 알릴 생각은 없었다. 만일 그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불리하게 작용할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실수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했으니까.

***

나디아는 정말 오랜만에 더 자고 싶지 않을 만큼 푹 잤다. 푹신한 베개에 뺨을 비비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려던 나디아는 온몸을 지끈거리게 하는 근육통 탓에 비명을 닮은 신음 소리를 내뱉어야 했다.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석양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동안의 일이 모두 꿈이었나?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낯선 천장과 낯선 침대를 본 순간 바로 사라졌다.

나디아는 당황하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온통 낯선 것투성이인 방 안에 홀로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그녀는 다시 한 번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가 이번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근육통은 도무지 꿈일 수가 없었다.

아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노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몸을 내려다본 그녀는 여전히 흙먼지가 가득한 옷을 입은 채였고, 방 한쪽의 가림막 뒤에는 가져다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김이 풀풀 올라오는 뜨거운 물로 가득한 욕조와 깨끗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황을 이해해 보려던 그녀는 한순간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씻으라고 가져다 둔 것이겠지?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먼지투성이 옷을 벗어 던진 나디아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아으….”

조금 뜨겁다 싶은 온도의 물이 살갗을 적시는 감각이 이렇게 좋은 줄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다. 천근만근 같았던 몸이 물속에서 가벼워진 것 같았다.

단단하게 뭉쳤던 근육이 노곤하게 풀릴 정도로 몸을 담그고 있던 나디아는 물이 식을 때가 되어서야 느릿하게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참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을 때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나디아는 비명부터 내질렀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당황하는가 싶더니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더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낯선 사람이 아니라 기사들이었다. 아무리 가림막이 있다고는 하지만 알몸으로 물속에 잠겨 있던 나디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더듬거렸다.

“나, 나가요!”

물이 출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기사들은 재빨리 상황 파악을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나디아는 가림막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누군가가 들고 들어왔다가 황급히 놓고 나간 듯, 테이블 위에 음식이 담긴 쟁반과 식기가 살짝 흩뜨려져 있었다. 음식을 보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강렬한 허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서둘러 목욕을 끝마치고 준비되어 있던 새 옷을 입었다.

나디아는 어색하고 민망한 기분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문밖을 지키듯이 버티고 선 노먼과 아실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실례했습니다, 귀부인. 주무시는 줄 알고….”

“아니에요.”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노먼에게 손을 내저었다.

“저, 여기는….”

“르네일입니다. 많이 힘들어하셔서 부득이하게 수면제를 사용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동안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저기, 그러면 내가 얼마나 잔 건가요?”

“하루 정도입니다.”

그만큼 잤으니 더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멋대로 약을 썼다는 말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덕분에 힘든 것도 느끼지 못하고 편하게 오지 않았던가? 두 사람에게서 특별히 다친 곳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녀 역시 컨디션이 좋았으니 상관없다 여겨졌다.

무례한 행동에 대한 자신의 기준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나디아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하시죠?”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노먼이 넉살 좋게 말문을 열었다.

“식사는 방 안에서 하셔야 합니다. 누군가 귀부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두기라도 하면 곤란해서요.”

“물론이에요. 난 괜찮아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아실을 올려다보았다가 여전히 노먼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딴청을 피웠다.

“저는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노먼 경,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그녀는 아직 노먼을 대하기 어색했다. 눈인사를 하며 문밖을 지키겠다는 듯 등을 돌려 버티고 선 기사의 모습을 보며 나디아는 느릿하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홀로 식사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푹 쉬고 배불리 먹고 나자 나디아를 우울하게 만들던 생각들이 멀어지다가 희미해졌다. 단순한 스스로에게 자조하는 사이 창밖은 금세 어두워졌다.

밤이 깊어 가고 달이 뜰 때까지 아실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며 태평하게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를 음미하던 나디아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문자는 그녀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밖을 지키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금발의 기사는 어딜 다녀오기라도 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깨끗하게 세탁되어 벽 한쪽에 걸려 있던 나디아의 망토를 집어 들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귀부인. 지금 당장 떠나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쉬고 있었던 탓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자 가슴이 아팠다.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추적자가 붙었어요. 아주 실력이 좋은 놈인 모양입니다. 흔적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설명은 가면서 하겠습니다. 단장이 놈들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얼른 가시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나디아의 마음이 덩달아 다급해졌다. 망토를 받아 걸친 그녀는 서두르는 기사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더라니 일이 터졌다. 아실 혼자서 추적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말에 눈물이 나올 것처럼 무서웠지만 나디아는 마음을 굳게 먹으려 애썼다.

마구간으로 갈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노먼은 나디아를 밖으로 데려갔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짐마차 앞에 선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노먼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말은요?”

“말을 타면 모습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상인인 척하며 르네일을 빠져나갈 겁니다. 어서 타세요.”

노먼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손길로 나디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가 마차에 실린 짐 사이에 몸을 구겨 넣자 노먼이 그 위로 천을 덮었다. 이윽고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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