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다행스럽게도 계단은 이제껏 걸어왔던 길만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몇 칸이나 더 남아 있었지만 천장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디아를 뒤에 세워 둔 채 걸음을 멈춘 아실이 램프를 내려놓고 문으로 보이는 천장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디아에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 신신당부하며 후드를 씌워 주곤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가 힘을 준 채 두 손으로 문을 밀자 천장이 들썩거리며 흙먼지가 후드둑 떨어졌다. 나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후드를 끌어당겼다.
몇 번인가 들썩이며 먼지를 피우던 문이 이내 확 열렸다. 흙과 반쯤 썩은 낙엽이 쏟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들킨 건가?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단장.”
입구 바깥을 빙 둘러선 세 명의 남자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을 털어 내며 검을 다시 검집에 쑤셔 넣었다. 태연한 아실의 모습을 보니 부하들인 모양이었다. 두려움으로 동당거리던 가슴의 느리게 잦아들었다.
아실이 램프의 불을 껐다. 사위가 다시 어둠에 잠겨 들었다.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자 슬슬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사 한 명이 서둘러 나디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올라오시죠, 귀부인.”
나디아는 기사의 손을 붙잡으며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흙먼지가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공기를 마시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녀가 옷을 뒤덮은 흙먼지와 거미줄을 털어 내는 동안 기사들은 비밀 통로의 문을 닫고 그 위로 흙과 낙엽을 다시 쌓았다.
나디아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하늘을 별이 수놓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멀찍이 우뚝 선 엘란츠 성의 망루가 보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성 뒤편으로 펼쳐져 있던 거대한 숲 속인 모양이었다.
“추적은?”
“없었습니다.”
“바로 출발한다.”
아실의 말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나디아에게 다가와 망토의 뒷부분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털어 주었다.
“지금부터 말을 타고 이동할 겁니다. 승마는 할 줄 아십니까?”
“조금… 에드윈이 가르쳐 줬는데….”
불쑥 떠오르는 어떤 추측에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말을 탈 줄 모른다고 했더니 답지 않게 승마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기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뜬금없다고 느껴질 만큼 몇 번이나 되풀이되던 승마 연습을 하라던 말들도.
모두 이걸 위한 거였나? 에드윈은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모두의 행동이 이상하게 침착했던 것을 이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아실과 함께 기사들이 사라졌던 숲 속으로 더 들어가자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나무에 매여 있던 다섯 마리의 말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개중에는 나디아의 말인 욜도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말이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아실은 어린아이를 챙기는 것처럼 나디아의 망토를 바람이 파고들지 않도록 꼼꼼하게 여며 주고 그녀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나디아는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에드윈의 말처럼 승마 연습을 조금 더 해 두었어야 했는데. 어설픈 승마 실력 때문에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왈칵 두려움이 쏟아졌다.
그녀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손을 쥐었다 펴며 침착하려 애썼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실이 갑자기 제 장갑을 벗더니 나디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가 직접 끼워 준 장갑은 그녀의 손에 지나치게 컸지만 체온이 남아 있어 따뜻했다.
아실은 맨손으로 고삐를 오래 쥐면 찰과상이 생긴다며 딱딱하게 덧붙였다. 나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가 바로 옆에서 달릴 테니 힘들면 말씀하십시오.”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제 말에 올라탄 아실이 점검하듯 모두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신호를 시작으로 금발 머리의 기사를 선두로 한 다섯 명을 태운 말들이 어둠을 틈타 길을 떠났다. 푹신할 만큼 깔린 낙엽이 발소리를 감춰 주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말을 달렸다. 잘 닦인 도로가 아니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울퉁불퉁하고 정돈되지 않은 숲길을 전전하느라 배는 더 힘들었다.
나디아는 이렇게 오래 말을 타 본 경험이 없었다. 에드윈과의 승마 수업은 지금과 비교하면 애들 장난 같은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이 위아래로 삐거덕거리며 흔들렸다.
나디아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위해 에드윈의 가르침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말 등을 꽉 조이려 힘을 준 허벅지 안쪽은 말이 뛸 때마다 쉼 없이 쓸렸다.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손은 고삐를 꽉 쥐느라 쥐가 날 지경이었고,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못 하겠다며 투덜거리고, 돌아가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고 싶은 속내를 감추는 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잠시 쉬려고 멈춘 시냇가에서 아실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나디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설령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더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으니까.
기사들은 승마가 어설픈 그녀를 배려해 중간중간 쉬어 가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내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쉴 때도 누군가는 멀리까지 정찰을 나갔다.
그러는 내내 기사들의 손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허리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 모든 행동들 때문에 나디아는 안심하지 못했다.
알키드가 쳐들어왔고, 기사들과 용병들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했으면서 왜 그녀는 추적을 피해 도망가야 하는 것인지, 애초에 그녀를 쫓는 자는 누구인지, 왜 쫓는 것인지 무엇 하나 분명하게 알 수 없었다. 에드윈이 실패했다는 소식 같은 건 들리지 않았는데.
그녀는 매 순간 불안해하며 아실이 준 수통을 받아 가죽 냄새가 나는 물을 마시고, 질기고 딱딱한 육포를 씹었다.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움츠린 어깨가 딱딱하게 뭉치고 가슴팍이 뻐근하게 아팠다.
날이 밝아 오자 그들은 숲 어귀에서 다시 한번 멈춰 서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나디아는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린 다음 평평한 돌 위에 얼얼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숨을 골랐다.
고작 반나절 말을 탔을 뿐인데 온몸이 삐걱거렸다. 내내 찬 공기를 들이마신 목이 깔깔했다.
나디아는 손을 덜덜 떨면서 느릿하게 장갑을 벗었다. 아실이 준 장갑은 고급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어설픈 손길로 손바닥을 매만지며 어떻게든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려 애썼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찬바람을 맞으며 달린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가슴은 불안하게 두근거렸으며 주위의 기사들은 모두 남자라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들은 나디아를 안심시켜 주거나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나름의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어색함을 숨기며 태연한 척하는 사이 정찰을 끝낸 아실이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홀로 멀뚱히 있던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아실은 나디아가 먼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않아도 그녀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채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밀라가 안겨 주었던 짐을 뒤지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통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말없이 나디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통 안에는 희미한 분홍빛이 도는 연고가 담겨 있었다. 가볍게 까진 상처 따위에 바르던 것이었다. 아실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나디아의 새빨간 손바닥에 꼼꼼하게 약을 발라 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손바닥이 따끔하고 간질거리는 게 약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상한 기분을 외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기사들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죽였다. 누구도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실은 멀뚱히 찬바람에 붉게 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뺨에도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나디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을 때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또였다. 깍듯하기 그지없는 존댓말. 그 말투를 들을 때마다 나디아는 둘 사이에 생긴 결코 메꿀 수 없는 틈을 느꼈다. 괜히 마음속이 공허했다. 그녀는 쓰잘머리 없는 감상에 젖기보다 물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처음부터 말해 주지 않았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왜 당사자인 그녀에게까지 말해 줄 수 없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왜 나한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나디아의 말꼬리를 잘랐다. 약을 바르는 건지 뺨을 매만지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목적지를 아는 것은 각하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실은 입을 꾹 닫았다.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자 나디아는 그의 말 안에서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에드윈이 성안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의 짐작대로 그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고 나디아를 성 밖의 특정한 목적지로 데려갈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 나가자, 놀랍게도 불안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에드윈이 꾸민 일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이 시나브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까칠하게 일어난 손끝을 매만졌다. 나디아가 에드윈에게 가지는 믿음과는 별개로 그 남자가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예상한 것인지는 죽었다 깨도 모두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말로, 정말 아실과 그녀 사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봐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그의 예상이 맞아 들었으니 계획대로만 행동한다면 다 괜찮은 게 아닐까 하는 안도가 찾아왔다. 그 두 가지 감정을 한순간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귀부인, 괜찮으십니까? 이제 슬슬 출발하시죠.”
사냥 모자를 깊게 눌러쓴 기사 한 명이 다가와 그리 말했다. 나디아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았지만 그녀는 돌덩이처럼 목에 걸리는 불평을 애써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