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61화 (61/115)

61.

05. 나디아 엘란츠

에드윈이 떠난 후로도 엘란츠 성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혹시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나디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걱정을 사서 하는 짓은 차고 넘치도록 했다. 권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달이 벌어진 것은 늦은 밤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나디아는 몇 번이나 뒤척거리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던 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창밖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말 울음소리 그리고 날붙이들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과 불타고 있는 건물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 따위를 눈치채지 못했다.

작은 소음을 일으키며 발코니 문이 열렸다.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흘러 들어왔다. 그제야 깊게 침잠했던 나디아의 의식이 수면에 가깝게 떠올랐다. 그녀는 고른 호흡을 방해하는 탄 냄새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푹신한 카펫을 밟는 자그마한 인기척에 나디아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창문을 닫으라고 웅얼거렸다. 잠시 멈칫하는 듯하던 발소리가 멀어지기는커녕 더 가까워졌다.

뒤척이던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얼핏 눈을 떴을 때, 그녀에게로 다가오던 그림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 버리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그 옆으로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다가와 쓰러지는 그림자를 받아 냈다. 순식간에 잠이 다 달아났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잠이 확 깨고 손끝이 차게 식었다. 맥없이 쓰러지던 남자의 가슴팍을 파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칼날이 번쩍이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덩치 큰 사내가 쓰러진 남자의 뒷덜미를 잡은 채 발코니로 질질 끌고 가는가 싶더니 난간 밖으로 축 늘어진 몸을 내던졌다. 발코니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듣지 않으려 했지만 떨어진 사람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선명하게도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늘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꿈을 꾸는 걸까? 이게 무슨 일이지? 새벽일 텐데 밖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지.

그녀는 누군가 다급하게 어깨를 흔드는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질끈 감고 있던 눈을 간신히 떴다. 흐릿한 시야로 공포와 초조함이 뒤범벅된 하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에 안도하기도 잠시, 하녀가 나디아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마님! 마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불길함이 엄습했다. 하녀는 재빠르게 나디아를 일으켜 세우고는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그 틈에 아실이 발코니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바짝 날이 선 모습의 기사에게서는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알키드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알키드가 왜…? 평화 협정은? 아, 아까 그 사람은 그러면….”

나디아는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혼란으로 가득한 질문을 던졌으나 아실은 연신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입을 다문 그의 얼굴 위로 날 선 긴장이 드리웠다.

그녀의 동요와는 관계없이 하녀는 야무진 손길로 계속 옷을 입혔다. 얼떨결에 그 손길을 얌전히 따르던 그녀는 뒤늦게 옷이 평소와 다른 것을 깨달았다.

무늬 없고 칙칙한 색의 두툼한 모직 드레스와 튼튼해 보이는 가죽 부츠, 그 위로 커다란 후드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둘러 준 하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의 뒤를 보호하듯이 아실이 바짝 따라붙었다.

하녀가 그녀를 이끈 곳은 바로 옆의 온실이었다. 온실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에 문으로 보이는 검은 공간이 보였다. 그 옆으로 밀라와 타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쩍은 조합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들의 표정이 나디아를 발견하자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무슨, 무슨 일이에요? 이게….”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한 아실이 밀라에게서 약간의 짐을 받아 들었다. 누구에게서도 자초지종을 듣지 못했지만 나디아는 성에 큰일이 벌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을 떠나야 하는 모양이었다. 불안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어떻게 되는 거지? 누군가 쳐들어온 것이 분명한데 이들은 나디아를 피신시키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가? 에드윈이 남겨 두고 간다고 했던 기사들은?

“귀부인.”

“타샤.”

“이걸 가져가십시오.”

마법사가 나디아에게 손톱만한 붉은색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를 하나 걸어 주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마력이 다할 때까지 악의를 가진 자는 부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겁니다. 금이 가면 버리세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꼭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대처들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적거리는 게 발목을 잡는 일이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밀라가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조심하셔요.”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전해지는 요란한 소음들 사이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모두는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나디아의 등을 떠밀었다.

자신이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냐는 말이나 모두 함께 갈 수는 없냐는 말 같은, 수많은 물음을 삼키고 나디아는 아실이 이끄는 대로 새카만 공간이 펼쳐진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디아가 그 안으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마치 마법처럼, 두껍기 그지없는 돌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움직였다. 문이 닫히는 틈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그녀를 안심시키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것처럼,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멍하니 어두컴컴한 공간에 서 있던 나디아는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지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새 불을 붙인 램프를 들어 올린 아실이 그녀를 돌아봤다. 나디아는 낯선 사람을 보듯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새빨간 서코트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처럼 어두운 색의 망토를 걸친 게 영락없는 떠돌이의 모습이었다.

“발밑을 조심하며 따라오십시오.”

그가 앞장섰고 나디아는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좁은 통로는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는지 곳곳에 거미줄이 가득했으며 축축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앞서가는 아실이 적당히 거미줄을 걷어 냈지만 완벽하진 않았는지 나디아는 얼굴에 걸리는 것들을 마구 닦아 내야 했다. 그녀는 불평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전 하지 못했던 질문도 퍼붓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먼지를 한가득 들이마시게 될 것 같았다.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정확히 얼마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디아가 느끼기에는 한참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오래 걸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좁고, 어둡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며 넘어지지 않게 애쓰는 것은 제법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듯이 아팠고 종아리가 단단하게 뭉쳤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디아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이 어두운 통로를 걸을수록 점점 더 두려워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 에드윈이 떠난 날로부터 엿새가량이 지났다. 그는 실패한 것일까? 그래서 황제가 관련자를 모두 죽이기 위해 온 걸까?

알키드의 짓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함 소리와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들이 떠올랐다. 희미하게 몸이 떨려 왔다. 너무도 두려웠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아실의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그녀가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묘하게 길이 경사진다 싶더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이 나타났다. 아실은 잠깐 멈춰 선 채 계단을 올려다보다가 나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램프 불빛 뒤로 보이는 계단은 굉장히 높고 가팔랐으며 이끼가 가득 껴 있어 미끄러워 보였다. 또한 군데군데 무너지거나 금이 가 있었다. 이 통로가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이 계단을 혼자 힘으로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주워섬긴 나디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검은색 장갑에 감싸인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몇 번이고 미끄러지며 계단에 무릎을 부딪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느라 먼지를 한껏 들이마셔 목이 칼칼해졌지만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뒤에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데, 고작 이런 걸로 투덜댈 수는 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죄책감이 내려앉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성에서 머물면서 매일같이 마주했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나만 이렇게 도망쳐도 되는 것인지.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헐떡이면서도 마침내 입 속을 뱅글뱅글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뒤에,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질문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맞서 싸우겠죠.”

“그러면, 그럼….”

“붉은 가시 기사단만 남은 게 아닙니다. 용병들이 합류했을 테니 엘하임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나디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말 뒤로 늘어진 침묵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졌다.

“뭐야?”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에게 말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던 아실은 그의 침묵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놈들의 목적은 당신입니다.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만.”

그의 대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나디아가 멍한 얼굴로 멈춰 서자 아실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나디아는 얼떨결에 다시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물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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