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할 일이 많으면 시간은 평소보다 배로 빠르게 지나간다. 연회가 끝나면 눈 붙일 시간도 없이 새벽 중으로 떠날 참이었다.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을 앞둔 것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를 따라 기사들도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연회장에 모였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에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한 나디아의 모습은 나이에 걸맞게 싱그러웠다.
왠지 평소보다 그녀를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은 변덕인 셈이었다.
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시선으로 쿠르쉬드를 훑었다. 한쪽 테이블에 앉은 기사의 시선은 술잔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에드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착석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나디아를 붙잡지 않았다. 절절한 이별의 인사를 나눌 만큼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고, 출발하기 직전쯤에나 잠깐 들러서 인사를 하면 되겠지. 아마 그녀는 자고 있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여겼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흐릿한 미련이 길게 꼬리를 끌며 연보랏빛 드레스 자락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르쉬드가 자리를 떴다. 에드윈이 건네었던 상냥하기 짝이 없는 경고 덕분인지 기사가 나가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거슬릴 만한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출정 준비는 예상대로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 상선으로 위장한 거대한 범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그걸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 오스카에서 하선할 예정이었다.
남서풍이 부는 요즘 같은 시기에 나흘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다. 중부 교역 도시로 유명한 오스카의 영주는 사르코 공작의 방계로 이번 일의 중요한 협력자였다. 그곳에서 퀘른까지는 말을 타고 하루면 충분했다.
준비 기간이 길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 일은 최대한 짧은 시간 내로 끝을 내야 했다. 반역이 으레 그렇듯이 오래 끌게 될수록 성공이 힘들어질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사흘 후 황제는 잉겔에 간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들은 황후가 열어 준 성문으로 평화로이 입성해 황성을 점령한 뒤, 황제를 뒤쫓아 목을 칠 계획이었다.
말로는 쉽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들은 에드윈은 늦은 시간이라 생략해도 좋았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나디아의 방에 들렀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구구절절한 인사를 늘어놓을 생각도 없었고 잠든 사람을 굳이 깨울 생각 역시 없었다. 저녁 연회에 작별의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그대로 떠나도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당장이라도 출항을 시작할 수 있는 시점에 굳이 인사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올라온 이유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침대 맡으로 다가간 에드윈은 몇 번이나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뻗고야 말았다.
무방비하게 잠든 여자의 몸 위로 흩어져 있던 밤색 머리카락이, 꽉 움켜쥐었다가 조심스럽게 펼친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고작 두어 번 정도 매만진 것이 전부였건만 여자의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늘이 질 만큼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아차 하며 손을 뗐지만 늦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직은 몽롱한 푸른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에드윈은 문득 떠올랐던 말을 부정했다.
사랑일 리 없다.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저, 작은 동물을 귀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에드윈?”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처럼 느껴지는 연약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손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는 가볍게 한번 털어 내면 속절없이 떨어져 나갈 미약한 힘을 뿌리치지 못했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바짝 굳었던 에드윈은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잠깐 인사하려고 들렀어.”
“몇 시예요?”
“2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나디아의 얼굴 위로 미처 다 떨쳐 내지 못한 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낯을 하더니 이윽고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베개 밑을 더듬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급하게 일어선 여자의 가느다란 몸을 타고 얇디얇은 실크 잠옷이 흘러내렸다.
에드윈은 늘어진 잠옷 자락을 밟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 안았다.
“조심해야지.”
크림을 부어 놓은 듯 새하얗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어깨가 드러나자 목이 탔다.
품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 하는 것처럼 굳어 있던 여자가 작은 주먹 안에 꼭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손수건이었다.
에드윈은 짙푸른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눈에 익은 터라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거기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입가로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귀여운 짓을 했군.”
손수건에서는 그녀의 목덜미를 핥을 때면 나곤 하던 향기가 올라왔다. 출정을 앞둔 기사에게 그의 아내나 연인이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걸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놓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에드윈은 제가 그녀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손수건을 접어 품 안에 넣으며 그녀에 대한 생각의 일부분을 수정했다.
인사를 할 차례였다. 이 방을 빠져나가면 그는 준비된 배에 올라탈 것이고, 나디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겠지. 건조하고도 담백한 인사를 건네려던 에드윈의 결심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얇은 실크 너머로 맨몸의 윤곽이 비쳐 보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두 손 안에 부드러운 실크와 그보다 더 부드러울 것이 분명한 몸의 감촉이 느껴졌다. 한품에 들어오고도 남을 만큼 가느다란 몸이었다.
작별의 키스치고는 지나치게 농후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부드러운 몸을 품 한가득 끌어안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린 것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을 때였다. 에드윈은 스스로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얼치기처럼 굴다니.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위를 도중에 그만둘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언제 다시 품에 안게 될지 모를,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행위가 끝나자 더욱 걸음을 떼기 어렵게 느껴졌다.
“조심….”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나디아의 목소리를 조금 더 잘 듣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요.”
그는 제가 웃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래.”
우스운 일이었다. 이 감정을 율리안이 그보다도 먼저 눈치챈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괜찮아. 괜찮게 만들 것이다. 성을 떠나며 에드윈은 각오를 다졌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끝낼 차례였다.
***
항해는 순조로웠다.
우기로 불어났던 강물은 적당한 수위를 유지하며 줄어들었고, 원래 상선이 오가기 위한 용도로 건설되었던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상선들을 누구도 대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선원으로 위장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갑판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며칠간 해를 보지 못한 말들이 예민해지는 것을 다독이며 그들은 기다렸다.
오늘 밤은 안개가 짙게 드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밤을 틈타 오스카에 정박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쉬지 않고 수도로 진군할 것이다.
해적을 소탕하러 내려간 병력은 물론, 잉겔에 갔다던 황제가 돌아오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것이다. 수도를 점령하기만 한다면 이후의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황제의 행보에 알게 모르게 못마땅함을 드러내던 대귀족은 충분히 많았다. 황실에 충성을 바치던 가신들도 황제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이후로는 태도가 미적지근했다.
에드윈은 그들 모두가 그의 반역을 거들어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훼방을 놓지 않고 모른 척 외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배 안에 처박혀서 쉬기만 했던 기사들의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오히려 날뛰고 싶어 좀이 쑤셨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하선하자마자 쉬지 않고 말을 달렸고, 이튿날 새벽 계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모습으로 활짝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 황궁까지 무혈 입성했다.
퀘른 기사단의 일부는 남부 해안에 기승을 부리는 해적 토벌에 동원되었고 남은 이들은 황제의 호위를 맡아 잉겔로 떠났던 터라 황궁은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사르코 공작과 그의 측근들이 성을 장악한 탓에 더 손을 댈 것도 없었다.
성벽 주위를 남부에서 올라온 귀족들의 병력이 둘러쌌다. 오히려 불안해질 정도로 싱거운 전개였다.
공작의 사병들이 철통처럼 지키고 선 영광의 홀, 그 끝의 휘황찬란한 황좌 위에, 황후는 이미 제가 황제가 된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에드윈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와요, 엘란츠 후작.”
“황후 폐하.”
여유 있게 에드윈의 인사를 받은 에스텔의 얼굴 위로 여유가 내비쳤다. 그녀의 옆에 버티고 선 사르코 공작과 눈이 마주친 에드윈은 그와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협력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그들은 이내 회의에 들어갔다. 황궁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황제를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황제, 율리안은 의심이 많았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항상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를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 그 자신마저도.
그는 예측불허의 남자였다. 그와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고 할 수 있는 에드윈에게도 그러했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생각해도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귀족들은 결국 유동적으로 대응하자는 뻔한 이야기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잉겔에 있을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육로로 이동하면서도 이 정도 규모의 군사를 감쪽같이 숨길 수는 없었다. 율리안은 그 자신이 찬탈자였던 만큼 반역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고 있었다. 그러니 대처하기 위한 미지의 조치들 역시 가득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났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을 것이다.
황제를 붙잡기 위해 잉겔로 향했던 이들에게서 황제를 놓쳤다는 전보가 날아온 것은 황궁을 차지한 지 이틀이 지난 날의 새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엘하임이 습격당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