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굳이 확인받고자 한 것은 궁지에 몰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디아의 얼굴을 감상하며 한계에 치닫는 제 가학심을 한껏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요소는 타샤였다.
“각하의 아이가 맞습니다.”
“확실해?”
“…네.”
거짓말을 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 담담한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그럴듯했다. 냉소적인 마법사가 그녀의 편을 들어, 감히 제 앞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몇 번 진료를 맡았다고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그런 짓을 할 만큼 잔정이 넘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릴 수도 있었지만, 에드윈은 그러지 않았다. 후작 부인이 사생아를 가졌다는 말이 돌아 봤자 그 또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는 변명하듯 늘어놓은 저 혼자만의 생각에 쉬이 납득했다.
엉망이 된 얼굴로 우는 여자를 탕녀라 매도하며 성 밖으로 내쫓고, 오욕을 뒤집어쓴 잉그램 공작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내의 부정을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제게 거짓을 고한 마법사의 행동까지 봐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잠시 자리를 떠났던 에드윈은 나디아가 돌아간 다음 다시 마법사의 방으로 돌아갔다. 쉴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가벼운 옷차림을 한 타샤가 놀란 기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각하, 뭔가 남은….”
에드윈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부터 휘둘렀다.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비쩍 마른 마법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핏기 없이 창백했던 그녀의 뺨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남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비틀거리는 마법사가 다시 일어나길 기다린 후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 아이라고?”
“…네.”
마법사는 에드윈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미 그가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꿋꿋하게 일관된 대답을 입에 올렸다. 이번엔 반대쪽 뺨을 후려쳤다.
입술이 터졌는지 그녀의 턱 아래로 피가 흘러내렸다. 마법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에드윈은 그녀가 바로 설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인내심이 강한 사내였다.
“다시 말해 봐.”
“…각하의 아이가 맞….”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몸이 한쪽 침상에 처박혔다. 코피가 터졌는지 턱 아래로 떨어지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에드윈은 다시 일어서려는 마법사의 다리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휘청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타샤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아도 에드윈의 마음속에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시뻘겋다 못해 퍼렇게 물들어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에 길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에드윈은 자비를 베풀듯,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다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법사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가, 각하의….”
“고집이 세군.”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바르작대는 그녀의 머리채를 강하게 낚아챈 에드윈이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얻어맞으면서도 굽히지 않을 만큼 나디아를 보호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 그럴 만한 유대 관계가 있었나? 아니면 제 입으로 뱉은 말을 함부로 뒤집지 않겠다는 같잖은 자존심인가? 그게 조금 더 그럴 법한 이유 같았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너의 고집 센 점을 높이 사지만, 지금은 아니야.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마법사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에드윈은 그 눈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네 주인이 누구지?”
“…각하이십니다.”
“넌 누구를 위해 일하나?”
“각하를 위해….”
“그런데 내게 거짓말을 해?”
에드윈의 목소리에 냉소가 스며들었다. 그는 넝쿨 같은 검은 머리칼을 움켜쥔 채 함부로 뒤흔들었다. 마법사의 가느다란 목이 삐걱거리며 그의 손길을 따라 무력하게 흔들렸다.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그의 손을 붙잡아 왔으나 감히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 내 아내가 내 아이를 가지지 않은 것에 화내는 게 아니야. 네가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이지.”
“언제부터 알고 계셨, 습니까?”
헐떡이며 묻는 마법사의 얼굴은 그리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같은 질문을 듣게 된 시점에서 이미 눈치챘어야 했고 영민한 마법사는 기대대로 그렇게 했다.
에드윈은 그녀의 머리채를 놓고 가볍게 손을 털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피투성이 얼굴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처음부터.”
마법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짓 미소를 짓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매끄럽지 못했다.
“아이를 지우는 약을 달라고 하거든 주도록 해.”
“하지만 그 약은…!”
마법사가 나디아에게까지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으니 그녀는 이제야 확신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심약한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비틀린 심기가 얼굴 위로 드러났다.
“괜찮지 않나. 부부가 나란히 불임인 것도.”
에드윈은 타샤를 내버려 둔 채 방으로 돌아갔다. 이 정도 폭행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며칠간은 내내 불안해하겠지만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 마법사는 에드윈의 신뢰를 잃었고 앞으로 그녀에게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기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
이대로는 침실로 돌아가 보았자 쉬이 잠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은 집무실로 향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조용한 복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청년이 에드윈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각하,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르고는 조용히 앞장서 문을 열었고 에드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닫아걸었다.
에드윈은 뻐근해진 목 뒤를 주무르며 의자에 기대앉아 가볍게 손짓했다. 라르고가 눈치 빠르게 한쪽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랐다.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잔을 내밀자 청년이 술을 채웠다. 세 잔을 거푸 마시고 나서야 뒷덜미를 뻣뻣하게 만들던 긴장이 풀렸다. 에드윈은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해 봐.”
얌전히 서 있던 청년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한 에드윈을 바라보며 청년이 덧붙였다.
“황제와 움바르토 백작 사이에 오가던 서신을 빼돌렸습니다. 날을 잡은 것 같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에드윈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이것 참 영광이군. 직접 처리하시려 들다니.”
그는 다시 채워진 잔을 비웠다. 식도를 타고 독주가 흘러 내려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가슴팍이 홧홧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예상과 가능성들이 교차했다. 그의 손끝이 초조하게 보일 만큼 빠르게 책상을 두드렸다. 날짜는 거짓일지 몰라도 그에게 반역 누명을 씌우겠다는 계획만큼은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안의 머릿속에서 그의 쓸모가 다한 모양이었다. 쉽게 쳐 내기 어려울 만큼 크게 자란 혹을 처리하기에 반역만큼 좋은 구실이 없지. 억울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한 반역은 진짜로 일어날 일일 테니까.
“이제 와서 도박을 할 수는 없어. 우리는 예정대로 간다. 영주들에게 전령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각하.”
“수고했다.”
잔을 내려놓으며 손을 내젓자 라르고가 잔과 술병을 챙겨 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쉬이 분간이 가지 않았다.
***
에드윈의 어린 신부는 생각보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내버려 두고 지켜보자면 물가에 어린아이를 홀로 둔 것처럼 못미더운 구석이 있었다.
출정 날짜가 확정되고 난 이후 에드윈은 쿠르쉬드를 불러들였다. 무표정한 기사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검만 잡고 살아온 애송이치고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제법이었다.
위겔도 자신의 제자에 대해 모두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알았더라면 주군의 아내를 탐내는 놈을 기사단장 자리에 추천하지 않았을 테니.
에드윈은 집무실 한가운데에 젊은 기사를 세워 둔 채 그 주위를 느린 걸음으로 빙글 돌았다.
그는 에드윈보다 반 뼘이 조금 안 되게 키가 더 컸고, 고된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오로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단단했다. 에드윈은 길게 흉터가 남았지만 제법 잘생긴 아실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구불거리는 새빨간 머리카락까지 집요하리 만치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오랜 침묵과 끈질긴 시선을 끝까지 참아 내지 못한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건방지군.”
눈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지 기사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것인지 원래부터 표정이 없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에드윈은 습관처럼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면서 입을 놀렸다.
“주제 파악이 안 되나?”
기사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천하게 자란 것들은 눈치가 빠르던데. 자네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말에 따르는 게 싫어서 일부러 뻗대는 건지.”
에드윈은 기사의 앞에 멈춰 선 채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녹색 눈에서 희미한 반항심과 함께 걱정이 묻어 나왔다. 그 걱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참 절절하기도 하지. 그는 혀를 찼다.
손발을 자르고 내쳐도 누구도 감히 말을 더할 수 없을 만한 짓을 저지른 기사를 굳이 내버려 둔 이유는 단순했다. 그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임무.
놀랍게도 쿠르쉬드 이외의 적임자가 없었다.
에드윈은 그에게 지도를 하나 건넸다. 기사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들고 펼쳐 보았다. 그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에드윈은 낮은 목소리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쿠르쉬드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각하, 이건….”
에드윈은 검지를 펼쳤다.
“네가 할 말은 ‘네’야. 이외의 말은 내뱉지 않는 걸 추천하지.”
기사의 손에 반쯤 구겨진 채 쥐어져 있던 지도를 빼앗은 에드윈은 양피지 조각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이 재가 된 잔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