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런, 딱 걸려 버렸군. 자네 없이 부인 맛을 좀 보려던 참이야.”
가까이 다가서자 엉망이 된 나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혀를 차고 싶기도 했고,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느냐고 다그치고 싶기도 했다.
조금 더 구미가 당길 만한 걸 준비해 놨다는, 계획에도 없던 말을 지껄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네 꼴이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돌아선 참이었다.
입 안이 썼다. 그냥 이 여자를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았을까?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한 에드윈은 황제의 뒤를 쫓았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 값비싼 브랜디를 싸구려 에일이라도 된다는 양 퍼마시고 있던 황제가 에드윈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우습군. 네가 이렇게까지 병신인 줄은 몰랐는데.”
그가 숨넘어가게 웃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캑캑 했다. 황제의 위엄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경박하고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 계집, 아랫도리 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가 봐?”
“폐하.”
“다른 놈의 애를 밴 창녀를 감싸 줄 만큼 푹 빠졌어? 사랑해?”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율리안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가 자신의 발언에 심기가 상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에드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딴 건 관심 없습니다.”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사랑이라니. 황제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라 그런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우스운 감정처럼 여겨졌다.
그의 말속에 담긴 경멸을 율리안이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율리안은 비틀대며 일어나더니 에드윈의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짙은 황금빛 술이 머리카락을 온통 적시고 옷깃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술잔을 모두 비운 황제는 뒤이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는 율리안이 술병을 머리에 내리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방금 전의 행동 그대로 그에게 술을 들이부었을 뿐이었다.
에드윈은 거칠게 말을 씹어뱉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얌전하게 그 치욕적인 행위를 받아들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술 방울이 턱 끝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건방지게 굴지 마. 알잖아? 내 인내심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
에드윈은 얌전히 굴기로 했다. 지금 율리안을 죽이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불쑥불쑥 치솟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그가 살기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황제의 자리는 단순히 혈통과 힘만으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명분과 세력이 중요했다. 귀족들의 반감을 사는 것도, 민심을 잃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공고한 황권은 모두 발밑의 단단한 지지 세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니까.
여기서 감정에 휩쓸린 판단으로 황제를 죽이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 빤했다. 황제 살해자 따위로 불리며, 호시탐탐 그를 노리던 귀족들이 권력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좋은 기회를 얻게 되겠지. 멍청하게 순간의 감정이 휩쓸려 다 된 일에 초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딴 대치 상태를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괜히 입을 놀려 화를 돋우는 것보다는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목표는 율리안이 조용히 머물다 조용히 떠나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려면 처음부터 황제가 나디아를 희롱하는 것을 멈춰 세우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기엔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분명, 또다시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다 해도 에드윈은 여전히 황제를 만류했을 거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
“이런, 미안해. 실수였어.”
활에 맞은 에드윈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황제, 율리안이 그리 말했다. 여덟 살 때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때와 똑같이 웃고 있는 황제의 눈동자에서 불쾌함과 저급한 희열이 소용돌이쳤다. 그때는 발치에 꽂혔던 화살이 이젠 그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율리안을 죽이는 것을 실패하면, 그땐 화살이 어디에 박힐까?
몸이 바닥에 처박히며 화살이 흔들리자 속이 진탕이 되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어깨와 등이 바닥에 부딪히는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목 안에서 끓는 듯한 소리가 샜다. 헐떡이는 숨이 새어 나오는 입술로 검붉은 피가 역류했다. 놀란 말이 치켜든 앞발에 밟히지 않으려 몸을 웅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기사들이 헐레벌떡 쫓아와 에드윈을 부축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개중 하나가 그를 둘러업었다.
“정말 미안하네, 에드윈. 늑대인 줄로만 알았지 뭔가.”
그가 시위를 놓기 전 눈이 마주쳤던 에드윈은 물론, 이 자리의 모두가 황제의 말이 거짓인 걸 알고 있었다. 황제는 늑대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멍청이가 아니었고, 설령 착각이라 할지라도 두 번째 화살을 쏘기 전에는 눈치챘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하임의 숲에는 늑대가 살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사냥을 하기 위해 엘하임에 내려온 지 꼭 10년이 넘었다. 그런 황제가 엘하임에 늑대가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에드윈은 이게 율리안의 화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히 그 따위가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이 어지간히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고 가물가물해지는 머리로 생각했다. 율리안치고는 오래 참은 셈이었다.
그를 업은 기사가 달음박질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내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에드윈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 귀찮은 여자를 율리안이 멋대로 대하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나. 얌전히 있으라고, 혼자 다니지 말라고 얼마나 말해야 들어먹을 건지.
황제의 것에 박히며 울고 배신감에 치를 떨 얼굴도 제법 돋우는 맛이 있겠지만 몇 번이고 그랬어야 했다며 후회를 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율리안의 말대로 그녀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걸까? 글쎄. 간혹 들려오던 음유시인의 사랑 노래들은 애끓는 가슴과 끝도 없이 피어오르는 독점욕, 그리움과 불면의 밤 따위를 이야기했다. 에드윈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그냥… 모르겠어.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었으나 기억이 선명하게 남지는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어딘가로 내려앉았고 그러는 내내 뇌간을 자글자글 태우는 듯한 고통에 온몸이 잘게 경련했다.
끔찍한 격통과 함께 먼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그 고통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에드윈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흐….”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뱉으며 희미했던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으로 뒤범벅된 수척한 얼굴이었다.
바짝 말라붙어 깔깔해진 입술에 물기가 닿았다. 에드윈은 그의 아내가 직접 먹여 주는 미지근한 물을 찔끔찔끔 받아 마셨다.
내뱉는 숨에서 희미하게 피 냄새와 약 냄새가 났다. 약에 절은 정신은 몽롱하고 몸의 감각은 둔하기 그지없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디아가 전해 준 율리안이 이미 떠났다는 소식이야말로 희소식이었다. 떠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걱정이긴 했지만.
율리안은 이대로 그가 죽어 나가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쓸모를 다한 사냥개를 처리할 때 제 손으로 행한 적 없었던 만큼 영광이라 여겨도 좋을 일이었다. 에드윈의 입가로 비틀린 웃음이 떠올랐다.
에드윈은 얌전히 마법사들의 말을 따르며 회복에만 집중했다. 여태 그들의 알 수 없는 연구를 전폭 지원했던 덕을 보듯이 그들의 치료법은 에드윈의 빠른 회복에 큰 몫을 차지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병상에서 일어난 그가 지금까지 밀려 있던 일들을 처리하랴, 거사를 준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을 때, 귓가로 거슬리기 짝이 없는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나디아를 지켜보라며 수하를 붙여 놓고는 그 사실도 잠시 잊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를 정신없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들이 몰아쳤으니까.
수하 중 하나가 가져온 소식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쿠르쉬드에게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의 수위가 적절한 경고가 될 수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 여자가 누구의 것인지 네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코앞에 들이밀어도 부족했단 말인가?
“어디로 갔지?”
“후원으로 가시는 듯했습니다.”
에드윈은 피로로 뻑뻑해진 눈을 살짝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걸음이 후원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주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간도 크게 그의 성안에서 벌어지던 두 사람의 우습기 짝이 없는 밀회는 물론이고 아내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생명 역시 오늘로 끝을 맞이할 것이다. 관심이 없었던 때라면 모를까, 신경에 거슬린다고 느낀 이후로 지금까지 질질 끈 것이 오히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자는 생각과 왠지 모르게 거슬린다는 감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탓이었던 같기도 했다.
낮은 관목 담장 아래를 빼곡하게 채운, 정원사가 정성 들여 가꾸었을 가을꽃들을 무감각한 눈으로 지나친 에드윈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대리석 기둥에 가볍게 몸을 기대섰다.
그의 눈앞에 애틋하기 짝이 없는 연인이 묻지 못한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명화에 등장하는 커플 같기도 했다. 여자가 그의 아내이고 남자가 그의 부하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에드윈은 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쳤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란 말인가? 웃음이 새는 것을 보니 희극인 것 같기도 했다.
“이거 아주 감동적이군.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
소스라치듯 놀란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와 닿았다. 정말 밀회를 하다 들킨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모조리 구차한 변명이겠지만 에드윈은 무슨 말이든 해 보라며 자비를 베푸는 체했다.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는 것만은 막으려 머리를 쥐어짜는 꼴을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오늘로 끝을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던 차였다.
모든 일이 끝나고 기껏 살아 돌아왔는데 사생아를 안은 아내와 조우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했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인지도 의심스럽군.”
당연히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빤히 알고 있었음에도 에드윈은 그리 말했다. 시체처럼 창백해지는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봐도 기대했던 것처럼 마냥 즐겁지 않았다. 가라앉은 기분이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북쪽 별관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될 날을 기다리며 마법사에게 지나가는 투로 준비해 두라 했던 것을 사용할 날이 도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