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의 시선이 불쾌하게 에드윈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에드윈은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건 채 율리안이 지껄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골적으로 그의 화를 돋우려는 이야기였지만 율리안이 하는 것이니만큼 말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일 율리안이 정말 신방에 들어와 셋이 하는 관계를 제안하든, 신부를 제 내키는 대로 가지고 놀겠다고 하든 고대로 내어 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감싸고돌 생각도 없었지만 그가 감싸고돈다면 율리안이 더 눈이 뒤집혀 덤벼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에드윈은 새 신부의 곁에 사람을 하나 붙여 두었다. 나디아가 율리안의 사람이라면 그와 접촉하는지 알아볼 생각도 있었지만, 그는 나디아와 첫날밤을 보내고 나서도 그녀의 짐짓 순진해 보이는 언행들이 연기인지 아닌지 확신을 하지 못했다.
꾸며 낸 것이 아닐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는 했지만, 그 잉그램 공작의 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마냥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침, 침실을 빠져나오면서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지만 확인해 두라고 일러두었던 에드윈은 오래 지나지 않아 예상외의, 아주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휘하의 기사가 그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이었다.
“간도 크군.”
에드윈은 발코니에 걸터앉아 황궁 정원을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대하듯 무감각하게 읊조렸다. 라르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던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조만간 율리안이 덤벼들면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될 수도 있으니, 예습도 되고.”
“알겠습니다, 각하.”
“그것 말고는?”
다시 평소대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온 청년이 보고를 계속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좋아. 계속 지켜봐.”
“예, 각하.”
그는 한동안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 그 사마귀 같은 작자 아래에서 어떻게 저런 순진하기 짝이 없는 딸이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도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는 제법 똑 부러지게 행동한 듯싶었지만 엘란츠 성에서의 나디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다.
에드윈은 잉그램 공작이 출가한 딸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를 찢으며 비웃었다. 공작은 그를 무르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아내의 앞으로 온 편지를 함부로 펼쳐 보는 것은 물론 전해 주지도 않고 불태울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쯤이면 눈치챘을 것이다.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니.
그도 참 안일한 사내였다. 무언가를 꾸미고 싶었더라면 직접 대면할 수 있을 때 해 뒀어야지.
결과적으로 그의 아내는 음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를 지켜보게 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전 연인과의 몇 번인가 몰래 만나곤 한다는 소식도 접했지만 내버려 두었다. 후에 그것을 빌미로 쫓아내면 잉그램 공작의 얼굴이 아주 볼만할 것 같았다.
나디아와 쿠르쉬드. 두 사람이 한 편의 연애 소설을 쓰든, 떡을 치든, 지금처럼 바쁜 시기에 그딴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있었다.
내 것을 탐내는 놈이 내게 얼마나 충성할까? 당연히 뒤따라야 할 의문이었다. 에드윈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
그는 부인에게 그리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침대에서 제법 돋우는 맛이 있고 천박한 말을 귓가에 속삭여 주면 수치와 분노로 바들바들 떠는 게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아내로서 맡은 역할을 하려 드는 건 제법 귀여웠고, 은연중에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애매한 뉘앙스를 흘리면 새파랗게 질리는 얼굴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저 심심할 때 쿡쿡 찔러보기 좋은 흥밋거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의 임신 소식에 불쾌해지는 게 스스로도 제법 놀라웠다.
에드윈은 오래지 않아 납득했다. 다른 놈과 놀아나는 것을 묵인해 주고 있는데 그놈의 애까지 뱄다고 하니, 그 부주의함과 한심함에 한숨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축하한다는 주변의 인사를 들을 때마다 배알이 뒤틀렸다. 제 입으로 임신했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그가 불임인 것은 황제와 그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지만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속삭이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에드윈은 틈틈이 고민했다. 아무리 훗날 떨쳐 낼 거라고는 하지만 당장 제 아내가 사생아를 낳는 것까지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나디아는 아이의 아버지를 특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다른 것 같았다. 어여쁜 얼굴 위로 내려앉기 시작한 그늘을 보면서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에드윈은 그 이유가 쿠르쉬드를 처리하지 못해서, 혹은 태어나지 못하게 할 예정인 사생아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상황을 율리안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났다.
‘사생아의 아내가 또 사생아를.’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를 조롱하며 비웃을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울렸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느긋하게 상황을 처리할 만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폭우를 뚫고 엘하임 성을 방문한 남부 귀족들과 기나긴 회의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회담이 끝나기까지 에드윈은 자꾸만 이리저리 튀어 나가는 집중력을 붙잡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 그러던 차에 바캉스를 가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들어준 것은 있는지도 몰랐던 관대함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은근슬쩍 그녀의 호위에 함께하려던 쿠르쉬드를 제지하면서 에드윈은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내내 모른 척하고 있었더니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 개를 걷어차 줄 때도 됐지.
랑카드에 다녀온 이후로 부인은 그를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다. 어쩌면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치고는 아주 온건한 방법을 쓴 것인데도 이 정도라니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늘 느끼고 있던 아내의 유약함을 새삼 깨달으며 혀를 찼다.
그의 경고를 알아챘는지 쿠르쉬드는 더 이상 나디아의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했는데 못 알아채면 등신이지. 당장에 손목을 자르고 내쫓아도 누구 하나 토 달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만큼은 에드윈으로서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류했다.
쿠르쉬드는 아직 쓸모가 남아 있었다.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처리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에드윈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고용한 용병들이 해적으로 위장한 채 명령대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던 에드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보낸 친서를 받아야 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던가. 귀찮은 일이었다. 몇 주는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 내려온다면 황제가 일을 칠 것이 분명했다. 대놓고 그에게 맛 좀 보여 달라며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거나 그 몰래 일을 치르고 엉망이 된 아내를 보여 주려 에드윈을 불러들이거나.
답지 않게 고민이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던 때만 해도 일이 귀찮게 꼬이는 건 싫으니 그녀를 던져 주자고 생각했는데 그때처럼 아무런 고민 없이 던져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황제를 맞이하는 내내 에드윈은 사람 좋은 체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사용인들은 활기차고 영광스러운 척했지만 몸을 사리느라 정신없었고, 나디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긴장하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다지, 축하하네. 선물을 가져왔어.”
그러면 그렇지. 저도 모르게 한숨부터 튀어나올 뻔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조롱의 말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형님.”
“그거 좋지.”
에드윈은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를 아내를 황제의 핥는 듯한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며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었다. 시선이 어찌나 노골적인지 율리안이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훤히 보였다.
저 보라며 일부러 하는 속셈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손버릇이 좋지 않았으니. 누구를 닮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며칠간은 잠잠했다. 에드윈이 몇 번이고 얌전히 있으라고 당부한 대로 나디아는 얌전히 있었고, 율리안은 한 번 피 맛을 보자 사냥에 집중했다. 언제 그의 심기가 뒤틀릴지는 몰라도 아직까진 괜찮았다.
그래서 잠시, 아주 잠깐 동안 긴장을 풀었을 뿐이었다. 고작 유리잔을 반 정도 채운 샴페인을 다 마실 만한 시간이었다.
에드윈이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반사적으로 상석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 자리 역시 비어 있었다. 그는 입 안으로 욕설을 삼키며 서두르지 않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누이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가 데리고 다니던 하녀들이 연회장 안에 있는 게 보였다. 절로 혀 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분명 방으로 돌아가려 했을 테니 그쪽을 먼저 찾아볼 요량이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가던 에드윈의 귓가로 희미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율리안의 커다란 몸에 무력하게 짓눌려 있던 여자의 흠뻑 젖은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에드윈….”
한심할 만큼 가련하고도, 어여쁜 얼굴이었다. 저렇게 울어 봤자 짓누르는 사람의 기분을 돋울 뿐인데,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의 눈빛이 끈질기게 그와 시선을 맞추려 들었다. 에드윈이 자신을 이 상황에서 구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은 기묘함을 느꼈다. 뒤늦게 제가 이렇게 다급하게 황제의 뒤를 쫓아온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을 귀찮게 꼬아 버릴 것이 아니라면 그가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나디아를 넘겨주는 것이 좋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어, 율리안과도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미친 사람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 눈을 보자 더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이 움직였다. 에드윈은 만류하듯 율리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황제가 불쾌한 낯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웃었다.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