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56화 (56/115)

56.

비슷한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율리안은 여전히 무료함을 떨쳐 내기 위해 주변을 괴롭게 만들었고, 몇 년쯤 지나자 에드윈에 대한 불편한 관심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그를 엿 먹일 기회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슬슬 에드윈도 지쳐 가고 있던 참이었다. 당연시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황후가 찾아온 것은 늦은 새벽이었다.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검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끼고 있던 반지를 통해 묘한 마력의 파동을 느낀 에드윈이 몸을 긴장시키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의 호위가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다음 순간 새카만 망토가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잠옷 차림을 한 에스텔 황후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후 폐하?”

“쉿.”

예상치 못한 인물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에스텔이 다급하게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에드윈이 손짓하자 호위가 검을 회수하고는 물러났다. 에드윈은 놀람을 수습한 뒤 가볍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에드윈은 그녀가 방문 목적을 먼저 밝힐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이 새벽에 황후가 홀로,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마법의 힘을 빌려서까지 그의 거처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방문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율리안의 심부름이라도 온 것일까? 수많은 손들을 내버려 두고 굳이 황후를 보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디 그가 통상적인 이치에 따라 행동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자리도 권하지 않는 건가요?”

“이런. 제 불찰입니다, 황후 폐하. 이 새벽에 몰래 찾아오셨길래 예의를 따질 여유가 없을 만큼 급하신 일인 줄 알았습니다.”

에스텔의 얼굴 위로 불쾌함이 떠올랐지만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의외였다. 자신에 대한 무례를 참아 넘길 만한 성정이 아닌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에드윈은 그녀에게 잠깐의 기분보다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있나 보다,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에드윈이 권한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에드윈은 그녀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그는 빙그레 웃으며 빈정거렸다.

“설마 차와 다과를 기다리시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에드윈과 오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여겼는지 바로 목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안할 것이 있어요, 엘란츠 후작.”

“들어는 드리죠.”

에스텔의 제안의 요지는 간단하고도 발칙했다. 그녀는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윈이 동참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쉽게 꺼낼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도 황제의 측근으로 유명한 그에게는.

에드윈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함정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과민 반응이라 할 수 없었다.

“이건 또 무슨 함정입니까?”

“함정이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보다 고작 한 살 어린 여자의 얼굴이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것치고는 제법 단단했다. 에드윈은 집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황후는 율리안을 싫어했다. 본래부터 애정이 넘치는 부부 사이는 아니었지만 몇 년 전, 율리안이 에드윈을 침실로 불러 그녀를 강간하라며 정신 나간 짓을 하고 난 이후로는 악화 가도를 탔다.

율리안은 에스텔을 언제든 멋대로 굴 수 있는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고, 에스텔은 율리안의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순종적인 아내처럼 웃었지만 뒤에선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녀의 연기는 뛰어났지만 에드윈에게는 숨겨진 증오가 보였다. 그리고 그가 알아본 것처럼 율리안 역시 알아보았을 것이다.

분명 그날의 일 말고도 다른 게 더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특별히 그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관심을 끊었지만.

“당신은 계속 이렇게 살 건가요? 그 사람의 욕심을 다 받아 주면서? 나는 싫어요.”

에드윈은 에스텔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은 그와 닮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어려울 겁니다.”

“알고 있어요.”

“실패하면 죽을 겁니다. 폐하뿐만이 아니라, 동참했던 사람 모두가. 곱게 죽을 수도 없겠죠.”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하고 반역을 입에 담았을 것 같나요?”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두 사람의 생각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에드윈은 가능성을 계산했다. 자세한 정보는 그가 고개를 끄덕여야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깊어지는 생각을 모두 끝내기 전에 에스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가 될 거예요.”

황제의 곁에서 인형처럼 웃기만 하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야심찬 발언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아니, 어울릴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관에 누운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겠지.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연한 수순처럼 뒤따른 의문이었다.

사실 에드윈은 황제의 자리에 어울릴 만한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고 싶다던가 하는 허울 좋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율리안을 돕지도 않았겠지.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가능성과 그로 인해 얻게 될 이득이었다.

“부친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초조하던 기색은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인형이라 생각했던 황후보다는 사르코 공작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더라면 좀 더 쉬이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녀 혼자서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황후는 몰라도, 그 뱀 같은 작자라면 한번 걸어 볼 만했다. 에드윈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황제의 죽음.”

그동안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황제에 대한 복종이 머리를 굳게 했는지도.

그녀의 말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과 계획들이 반짝 지나갔다. 이전까지는 미처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손끝이 짜릿했다. 지금 당장 에스텔에게 고맙다며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주 구미에 맞는, 달콤하고도 위험한 미끼였다. 에드윈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 미소만으로도 에스텔은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짐작했다.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고 생각한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좋습니다.”

이해관계 일치에 의한 빠르고도 간결한 가담이었다.

***

율리안이 에드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것은 대체로 어떠한 꿍꿍이가 숨어 있었다. 최근에는 결혼이 그러했다. 귀족들의 결혼이란 감정보다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과 그로 인해 파생될 이득이 더욱 중시되는 일이었다.

에드윈은 자신의 결혼 적령기가 지났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매력적인 신랑감이라는 것 역시도.

황제의 괴팍한 성미를 특정한 몇몇을 제외하면 모르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황제의 측근이라는 지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에드윈은 빨리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중요하다 여겨지는 후계 문제는 그가 생식 능력을 잃은 순간부터 끝난 이야기였으니 특별히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거기다 에드윈에게 아내가 생기면, 그의 것을 빼앗고 싶어 안달이 난 미친놈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감정을 쏟은 게 아니더라도 험한 꼴을 당한 상대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지도 못하고 끼고 살아야 한다면 거추장스러울 게 분명하니 썩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에드윈을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몇 년 전까지는 시큰둥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제 딸은 어떠냐며 얼마 전 다섯 살 생일이 지난 황녀를 들이밀기까지 했다.

그의 결혼을 모른 척할 수 없는 때가 오자 무작정 방해하기보다는 제힘이 닿는 상대를 짝지어 주고자 하는 생각일 거라고 예상할 따름이었다.

황제가 에드윈의 결혼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에스텔 황후와 사르코 공작을 필두로 한 반란 세력은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 황제파 귀족들과 접선하고 사병의 힘을 기르고 군량을 확보했다.

율리안은 굉장히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진행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에드윈의 결혼에 율리안이 열을 올리고 있는 만큼 그의 신경을 돌리기 좋은 행사임은 사실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랐다.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화려한 예식장에서 신부의 손을 붙잡고 황제의 주례사를 들어야 했다.

“…두 가문의 결합이 제국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허울뿐인 결합이었고 이득을 볼 사람은 그가 아닐 터.

잉그램 공작은 친 황제파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황제의 제안을 얼씨구나 하며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분명 황제가 딸을 정부로 달라며 요구했더라도 군말 없이 가져다 바쳤을 사람이었다.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신부는 절로 시선이 갈 만큼 아름다웠으나 무엇 때문인지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짧게 머물렀던 시선은 황제가 고개를 드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그 잉그램 공작의 딸이니 만만치 않게 영악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부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 순진해 보였다.

황제가 말을 걸자 괜찮은 척하려 애쓰면서도 팔을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 장식을 가득 이고 있는 목은 뻣뻣하기 짝이 없었고 수시로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보며 에드윈은 머리를 굴렸다.

저 모든 것이 연기라면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리고 연기가 아니라면…. 에드윈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불신을 드러냈다.

황제와 잉그램 공작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언질도 듣지 못한 걸까?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았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기건, 연기가 아니건 간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전할 만한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율리안은 신부를 먼저 신방으로 보낸 뒤 에드윈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행동이었다. 황제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때? 신부는 마음에 들어? 초야를 같이 보낼까? 핏줄을 생각하면 내 아이를 가지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 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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