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55화 (55/115)

55.

최근 몇몇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는 환각제가 있었다. 향을 피우는 것처럼, 태워서 나는 냄새를 맡는 식으로 쓰였다.

에드윈도 몇 번 정도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었다. 빈민굴을 지나다 보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자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쓰던 약이었다.

다만 귀족들에게 팔아먹으려 수를 쓰긴 했는지 처음 연기를 들이킬 때 느껴지던 옅은 두통이 없었다.

귀족들이 더럽게 논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지만, 더 새로운 자극을 찾아 약에까지 손을 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중독성이 그리 크지 않은 반면 효과는 확실하다고 홍보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코웃음 칠 일이었다.

고양감이 찾아오고 성감을 자극해, 그에 관한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약이었다. 보게 되는 환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현실과 크게 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효과가 확실한 약에 위험이 조금도 없을 리가 없었다. 단발성이라면 몰라도 꾸준히 한다면 중독될 것이다. 에드윈은 그딴 약에 손을 댈 만큼 인생이 지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듣고 넘겼다.

하지만 자극과 더 큰 자극을 찾아 헤매던 율리안에게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율리안이 도망치거나 몸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황후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테이블을 더듬거렸다. 크리스털 잔 안에 가루를 조금 털어 넣은 황제가 독한 술을 콸콸 부었다.

저건 무슨 약이지? 에드윈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또 다른 종류의 환각제가 있단 말인가? 율리안은 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남은 것을 황후의 입가로 들이밀었다.

“마셔.”

“폐, 폐하….”

“마시래도?”

그는 잠깐의 기다림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황후의 턱을 붙잡더니 술을 들이부었다. 억지로 독한 술을 마시는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채 삼키지 못한 술이 목덜미를 타고 줄줄 흘러내려 가슴팍을 적셨다.

그녀는 이리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집안의 영애가 아니었다. 금지옥엽 막내딸이 황궁에서 이런 짓을 당한다는 걸 그 불같은 성정의 사르코 공작이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별수 없을 것이다. 에드윈이 그랬던 것처럼.

술을 거의 다 마시고 한참을 기침하던 황후의 몸이 지친 듯 축 늘어졌다. 술에 넣은 약이 정확히 무엇인지 에드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약에 면역이 없는 것 같은 그녀의 반응과 황제의 반응이 다르다. 그라고 해서 모든 약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마약들이 그렇듯이 섞는 건 좋지 않았다.

눈에 초점이 나간 채 늘어진 황후의 모습이 그의 생각을 반증했다.

“벗어.”

에드윈은 제 귀를 의심했다. 황제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에드윈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꼴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낯이었다.

아무리 곤란한 요구도 담담한 얼굴로 해치우던 에드윈이 이번만큼은 망설였다. 무력해진 황후를 내팽개쳐 둔 채 제게 옷을 벗으라 하니 대충 어떤 짓을 시킬지 짐작이 갔다.

이런 짓을 시킨다고 해서 황제가 무엇을 얻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즐거움인가? 즐거움을 위해서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건가? 황제에게도 최소한의 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에드윈은 쉴 새 없이 생각했다. 이 명령은 따라도, 따르지 않아도 꼬투리가 잡히기 좋은 일이었다. 주인이 준, 독이 든 먹이를 앞에 둔 사냥개가 된 것 같았다.

먹어도, 먹지 않아도 그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는 일 앞에서 에드윈은 어떤 것이 최악이고 어떤 것이 차악이 될지 구분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싫어? 맛있는 건 나눠 먹자는 형님의 뜻이 탐탁지가 않은가 봐?”

율리안이 빈 잔을 집어 던졌다. 순식간이 귀 옆을 스쳐 지나간 크리스털 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미안해. 비록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더러운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피 반쪽을 나눈,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형제인데… 내가 너무 심했지? 실수였어.”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 언제냐는 듯 힘을 쭉 뺀 율리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졌던 가운이 그의 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드윈의 앞으로 다가온 율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에드윈은 따귀를 얻어맞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제법 다정스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율리안의 손끝이 닿자 귀가 따끔한 것을 보니 튕겨져 나온 파편에 긁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황제가 그 자그마한 생채기를 엄지손가락으로 함부로 짓눌러 댔다.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참을 만한 통증이었다.

“사르코 공작 영애와 하기 싫어?”

그가 알몸으로 널브러진 여자에게 시선을 주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시트를 들어 몸을 가릴 생각도 못한 채 움찔거리고 있었다.

“황후 폐하이십니다.”

“뭐?”

율리안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하지만 에드윈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사르코 공작 영애가 아니라, 황후 폐하이십니다. 황제 폐하의 아내이자 황태자 전하의 어머니이신.”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

“내가 허락하기 전엔 함부로 입 벌리지 마. 마셔.”

그가 테이블 앞으로 가서는 손바닥만 한 유리병 하나를 던졌다. 에드윈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보름쯤 전부터 황제가 그에게 건네기 시작한 약이었다.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가 마시라고 하니 마실 뿐. 처음 이 병을 받아 들었을 때는 황제가 그를 죽이려 든다고 생각했었다. 틀림없이 독약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황제가 내린 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에드윈은 죽지 않았다. 몸에 특별히 이상이 생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죽여 버릴 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쯤. 다 합쳐서 다섯 번 정도 그가 주는 약을 마셨다. 하지만 횟수가 적다고 해서, 몸에 눈에 띄는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에드윈은 약병을 가지고 마법사들에게 가서 무슨 약인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율리안은 꼬박꼬박 병을 회수해 갔다. 황제를 만나고 돌아가자마자 토해 냈지만 율리안이 그가 바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늘어지는 날이면 토하는 것도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마법사들은 아름다운 유리병 대신 에드윈의 토사물에서 약의 성분을 찾아내야 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는 범위는 있었다.

율리안이 그에게 좋은 것을 줄 리가 없었으니까. 좋은 것이었다면 모두 그 자신이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가 아닌가.

에드윈이 병 안의 내용물을 모두 마시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유리병을 내려놓자 긴 손가락이 순식간에 병의 몸체를 꽉 쥐었다.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에드윈이 목울대를 움직여 약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도 좋아.”

선심을 쓰는 듯한 말에 에드윈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바로 황제의 침소를 빠져나왔다.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황제가 그를 위해 준비한 처소에 도착한 에드윈은 바로 손가락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욕지기가 치밀고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의 곁으로 바람같이 다가선 마법사가 입을 헹굴 물과 얼굴을 닦을 천을 건네주었다. 에드윈은 입을 헹구고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 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과는 아직인가?”

“그게….”

마법사, 마르스의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뭐지? 숨기지 말고 대답해.”

“결과가 나왔습니다, 각하. 그런데….”

“그런데?”

그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나쁜 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의 생각에 무게를 더해 주는 행동이었다. 에드윈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마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괜찮지 않습니다, 각하. 이건 낙태를 위한 약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황제가 내게 낙태 약을 왜 먹이지?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닌가?”

“아닙니다.”

마르스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계속했다.

“임산부가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가는 유산이 되기에 낙태 약이라고 불리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생식 능력에 저하를, 장기간 다량 복용 시 불임이 됩니다. 사람에 따라 적은 양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마르스를 앞에 세워 둔 채 에드윈은 발작하듯이 웃음을 쏟아 냈다.

제 형제를 모두 죽인 율리안은 아직 쓸모가 남은 이복동생을 죽이지 못하는 대신 후계를 남길 수 없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쏟아 낸 이후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손끝이 절로 떨릴 만큼 강렬한 분노였다. 에드윈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씹어뱉듯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불임인가?”

“검사를 해 봐야 합니다.”

에드윈의 불쾌한 심기를 느낀 듯, 마법사가 공손하고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고 마르스 홀로 은밀히 진행한 검사 결과, 마법사는 침통한 얼굴로 에드윈이 불임이라고 알려 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이기에 담담히 듣던 그는 마르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마법사와 에드윈뿐일 것이다. 황제는 짐작만 하고 있겠지.

마법사가 에드윈에게 결과를 전한 이후로, 율리안은 약을 내밀지 않았다. 내내 해 오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율리안이 에드윈을 믿지 않는 것처럼 에드윈 역시 황제를, 나아가서 주위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의 곁에 황제가 보낸 끄나풀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몇 번이고 확신이 되었다.

율리안은 아랫사람을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성향이 강했으니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내다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처리하는 건 에드윈의 몫이었다. 정보를 내돌린 마법사의 목을 친 것처럼.

에드윈 역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여겨지는 순간 내쳐질 것이다. 선황의 피를 이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율리안에게 에드윈은 언젠간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절대로 사이좋은 사촌지간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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