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04. 에드윈 엘란츠
에드윈의 손안에는 온통 반쪽짜리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반쪽짜리 부모, 반쪽짜리 형제, 반쪽짜리 이름.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한 번도 무언가를 온전히 홀로 가져 본 적이 없기에 억울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에드윈의 아버지는 황제 가우스였고 어머니는 그의 여동생인 아델라 황녀였다. 오라비의 아이를 가진 황녀는 그 오라비의 주선으로 엘란츠 후작과 결혼했고 엘하임에서 아들을 낳았다.
엘란츠 후작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후계가 없었다. 지금보다 더 옛날, 변방은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를 않았고, 국경과 바다를 동시에 낀 광활한 영지를 아우르던 변경백은 심심하면 찾아오던 침략자들과의 전투를 수도 없이 치러 내야 했다.
엘란츠 후작은 훌륭한 수완을 가진 사내였고 적어도 그가 변경백의 자리를 맡고 있는 동안은 단 한 번도 영역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잃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던 용맹한 세 아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나이 든 권력자가 젊은 여자를 후처로 들이는 일은 그리 특별할게 없었지만 그 여자가 황제의 하나뿐인 여동생이고 오라비의 아이를 밴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제와 후작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사생아라 할지라도 고귀한 피를 이었다면 제 후계로 삼기에 나쁘지 않다 여겼는지도, 제 핏줄이 아니니 또 죽어 나가더라도 슬프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1년의 절반쯤을 엘하임이 아니라 황궁에서 보내는 후작 부인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들은 많았다. 남매 사이가 워낙에 각별하여 여동생을 시집보내고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황제의 이야기가 미담처럼 떠돌았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더욱 더러웠다.
후작이 변경에서 국경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막고 있는 사이, 후작 부인은 황궁에서 오라비와 붙어먹었다. 에드윈은 숨길 생각도 없는 듯 자그마한 별궁 전체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정사를 들으며 잠들고 깼다.
두 살 터울의 사촌 형, 율리안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놀이 상대였다.
비록 욕심이 많아 에드윈이 가진 것은 모두 탐내고 변덕도 심하고 심술궂었지만, 고만고만하게 어렸던 탓에 같이 놀기에 썩 나쁘지는 않았다. 둘은 함께 식사하고, 수업을 듣고, 대련하고, 활을 쏘고, 또 말을 탔다.
에드윈보다 두 살이 많은 율리안은 당연하게도, 에드윈보다 아는 것이 많았다. 성안을 도는 불온한 소문이나 가끔 별궁에서 들려오는 교성 따위의 추잡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드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며 뻐기기를 즐겼다. 황제가 에드윈의 외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 준 것도 그였다.
“그거 알아? 우린 사촌이 아니라 이복형제야.”
“그게 뭔데?”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는 뜻이지.”
“우리 아버지는 엘하임에 계시는데.”
에드윈은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정정한 엘란츠 후작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율리안의 아버지는 황제 폐하이고,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도 다르니 이복형제일 수가 없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덟 살짜리 이복동생을 내려다보던 율리안이 그를 비웃었다. 비뚤게 올라가는 오른쪽 입꼬리와 그 옆에 살짝 팬 보조개가 황제의 얼굴과 똑 닮았다.
“넌 사생아야.”
“사생아가 뭔데?”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골칫덩이.”
율리안이 연습용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기며 말했다. 에드윈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활을 만지작거렸다.
골칫덩이. 정확한 뜻은 몰라도 나쁜 말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율리안이 그에게 좋은 말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무도 에드윈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없었다. 그리 말하는 건 그뿐이었다. 에드윈은 생각을 그만두고 활을 쐈다. 표적의 정중앙에 꽂혀 파르르 떨리는 화살을 보고 있자 발치로 화살 두 개가 연달아 꽂혔다.
“미안해. 실수야.”
율리안이 씩 웃으며 흙바닥에 파묻힌 화살을 회수해 갔다.
그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에드윈을 위협하고는 실수라며 씩 웃곤 했다. 이를테면 폭우로 불어난 강을 보러 가자고 한 뒤 강가에 선 에드윈을 갑작스럽게 떠밀거나, 바위산을 오르자 해 놓고 가파른 길에서 발을 거는 식이었다.
변명도 가지각색이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해서 붙잡으려던 거라고 말하거나, 에드윈이 그쪽으로 지나가려는 건 줄 몰랐다고 하거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지만 정말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황자에게 따지고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과하는 율리안의 얼굴에 천진한 악의가 반짝거리는 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고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윈이 그만두라고 하거나 싫은 기색을 내비치면 율리안은 더욱 기뻐하며 날뛰었다.
몇 번인가 우연히 율리안의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목격한 율리안의 형들이 그를 만류하며 타이른 적도 있지만 잠잠해지는 것은 그때뿐이었다.
나이가 들면 나아질 거라고 낙관했던 적도 있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율리안의 욕심은 커져만 갔다. 에드윈만을 향하던 괴롭힘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드윈이 당하는 일이 별거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율리안의 끝 간 데 없는 욕심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게 될 거라는 사실을….
율리안의 괴롭힘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제 말을 거스르는 것을 도무지 참아 넘기지 못하는 성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변경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도적이나 상선을 터는 해적 따위보다도 성가신 것은 율리안의 짜증이었다. 그래서 에드윈은 어지간한 그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언젠간 질렸다며 그를 내버려 두는 날을 기다리면서. 아직 율리안의 밑바닥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에드윈은 율리안이 황태자를 처리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축소시키며 황좌에 앉는 일을 도왔다. 피로 물든 황좌에 거만하게 앉은 율리안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율리안은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그를 위협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화살은 다른 곳을 향했다. 본디 가지고 있었던 폭력적인 성향을 방출할 곳이 필요했겠지.
처음에는 함께 사냥을 다녔다. 황궁 뒤편의 사냥터를 종횡무진하며 사냥감들의 숨통을 끊었지만 그나마도 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율리안은 몰이꾼들과 기사들, 혈통 좋은 사냥개들과 함께 맹수를 궁지에 몰아넣고 숨통을 끊는 것에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에드윈은 술에 취한 채로 단도 하나만 들고 성난 멧돼지에게 달려들려는 율리안을 막아 세워야 했다.
“미쳤습니까?”
“미치지 않았는데?”
술기운에 흐려진 푸른 눈이 그를 응시했다. 에드윈은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그의 손에서 단도를 빼앗았다. 충성심이라기엔 약했지만 절대적인 지배자를 보필한다는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황제가 되고자 했던 야망과 누구에게도 지고는 못 살 율리안의 성정을 생각했다. 그것들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 거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지금의 율리안이 증명하고 있듯이.
“과음하셨습니다.”
“그걸 네가 정하는 거야?”
그때 그를 막아서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단도를 빼앗지 않았어야 했다. 술에 취해 겁 없이 짐승에게 달려들고, 그것의 커다란 엄니에 찔려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에드윈의 지나온 인생의 방향을 튼 선택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후회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후회하는 선택의 대부분은 율리안과 관련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날부로 위험천만한 사냥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의 화살이 향한 곳은 에드윈이었다.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횡포라는 말 외에는 마땅히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 느닷없이 나이프가 날아오거나 함께 술을 마시다가도 잔이 날아오고, 회의를 하다가 멱살이 잡혔다.
잠시 시선을 줬던 귀족 영애는 이튿날 황제의 침대에서 알몸으로 잠들어 있었고, 귀여워하며 키우던 사냥개는 벽난로 안에서 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때로는 유치했고, 또 때로는 악랄했다.
에드윈은 참았다. 인내심이 아슬아슬한 수위까지 차올랐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가 감정의 동요를 보이거나 불쾌해하면 율리안은 더욱 즐거워하거나 불같이 화를 내며 주위의 모두를 피곤하게 했다.
에드윈은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관심이 생기더라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기술만 늘어 갔다.
율리안의 횡포에 지친 소수의 측근들은 폐하께서도 황후를 맞이하시고 자식을 보고 나면 조금 달라지시지 않을까 하고 헛된 기대를 품었으나 황후를 들이고 그 황후가 아들을 낳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늦은 밤, 희미하게 램프의 불빛이 일렁이는 황제의 침실로 불려 간 에드윈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얇은 휘장 너머로 아른거리던 인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시트를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율리안이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휘장을 열고 시트를 억지로 걷어 냈다. 굳어 있는 에드윈의 눈앞에 황후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당황과 수치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에드윈은 황후를 위해 급하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폐하.”
“오, 에드윈. 내 친애하는 사촌 동생.”
무슨 생각이지? 에드윈이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저를 괴롭히려는 것인지, 황후를 괴롭히려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습니다. 폐하, 저는 다음에….”
“아니, 아니야.”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반쯤 풀린 눈을 들여다보는 사이 휘장 안을 맴돌던 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에드윈은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