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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51화 (51/115)

51.

“어디랑 분쟁이 생긴 건지 물었어요. 알키드와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고 했잖아요? 엘하임과 국경을 맞대는 곳은 알키드뿐인데 어디와 싸워야 하는 거예요? 어디기에 남부의 이름 있는 귀족들이 죄다 몰려드는 거예요?”

“궁금한 게 정말 많았나 보군.”

뒤이은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나디아는 그가 또다시 말을 돌리려 들지는 않을지 의심해야 했다. 에드윈은 조금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국경이 아니야. 퀘른이지.”

대답을 들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퀘른을 왜?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서 외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뒤늦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입에 담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퀘른을… 왜요? 왜 수도를….”

에드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이 되었다. 나디아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디아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 말 한마디로 에드윈이 계획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거대한 일이었다.

“그건, 그건…!”

반역이잖아요. 비명같이 새어 나오던 목소리가 급하게 속삭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말을 내뱉은 나디아는 지레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어떤 혼란을 겪는지 모두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에드윈은 여유로운 자세로 발을 까딱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현실 부정을 끝내지 못했다.

“…농담이죠?”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당연히 농담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 탓에 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언젠가는 그녀가 건드리지 않았어도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의 아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관련자가 된 셈이었으니까.

“겁이 나나?”

“그럼 안 나겠어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 전에 만났던 황제는 미친놈 그 자체였다. 에드윈의 괴짜 같은 모습은 귀엽게 느껴질 만큼. 황제는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했고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 못 본 척 입을 다물었다.

소문으로 듣던 돈독한 사촌지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황제는 에드윈을 유용한 사냥개쯤으로 생각했고, 에드윈은….

충격이 한 김 가시자 나디아는 에드윈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번의 목격했던 황제의 행동이 전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에드윈과 황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왔고 에드윈은 그의 수많은 미친 짓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겠지.

맹수용 화살을 두 대나 맞고도 놀라울 것 없다는 듯이 굴던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분명 그에 필적하는 일들을 직접 겪고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납득은 됐지만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죽어도 당신 하나 빠져나갈 틈은 마련해 놨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혹시나 잘못되면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지만 그녀가 처형될 상황이 벌어지는 데에는 에드윈의 실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는데 왜 잊고 있었을까?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남자라서? 그런 생각은 그의 배에 화살이 박혔던 날 내다 버렸는데.

나디아는 양손을 깍지 껴 잡으며 떨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을 참아 보려 했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을 가장하며 별 의미도 없을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황위가 탐나나요?”

“황위?”

그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딴 건 관심 없어.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그녀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보고 있지 않은 눈은 얼핏 광기마저 엿보였다. 나디아의 물음이 잠겨 있던 상자를 열어젖힌 것 같았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운 증오였다. 지금까지 꽁꽁 숨기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짙은 것이었다.

“나는 황제의 멱을 따고 싶은 것뿐이야.”

항상 냉정해 보이기만 했던 남자가 드러내는 격렬한 감정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함부로 넘겨짚기 어려울 만큼 짙은 감정이었다. 자신에게는 그 일에 말을 얹을 어떠한 명분도 없다는 사실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디아는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잠깐 동안 드러냈던 감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보름 뒤에 떠날 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이 그가 몸을 일으켰다. 식사를 하고 잠깐의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뿐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당황하며 그를 붙잡았다.

“보, 보름이요? 보름 뒤에 퀘른으로 간단 말인가요?”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내가 묻지 않았으면 떠나기 직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었나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야 통보하듯 알리는 그에게 서운했다. 제가 왜 서운함을 느끼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에드윈은 조금 전의 강렬했던 감정을 모두 갈무리한 것처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일찍 말하면, 뭐?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길어지기만 했겠지.”

나디아는 또 한 번,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굳건한 벽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의 부드럽기만 한 손으로는 아무리 두드려도 부수거나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에드윈은 오늘밤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남긴 후 여전히 굳어 있는 나디아를 흘끔 살피더니 방을 떠났다. 나디아는 그 갑작스러운 통보도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힘겹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퀘른으로 떠난다던 날짜를 세면서 파도처럼 자꾸만 밀려왔다. 떠나가길 반복하는 불안에 젖어야 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느꼈던 불안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잊고 있었던 수틀을 다시 끄집어냈다. 지난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놓기 시작했던 수는 반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에드윈이 떠나기 전 까지는 간신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방에서 수를 놓자고, 처음 마음먹었던 날도 무언가의 분쟁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정말 그런 일이 가까워지자 기분이 묘해졌다. 에드윈은 그녀에게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정말 그걸로 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하게 불안하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만이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디아가 잡은 것은 고작 수틀이었다.

에드윈은 나디아가 제 목숨만 걱정하고 있다 여기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에드윈을 걱정했다.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디아는 얼굴을 맞대며 산 시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으리만치 냉혈한이 아니었다.

나디아는 신중한 손길로 실을 매듭짓고 뒷면의 실밥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푸른빛 천을 들어 올려 완성된 수를 잠시 동안 살펴보았다. 어딘가 잘못된 곳은 없는지 살펴봤지만 고칠 부분을 찾지 못한 나디아는 손수건을 잘 접고 귀퉁이에 그녀가 즐겨 쓰는 향수를 뿌렸다.

***

에드윈이 떠난다고 했던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성안은 며칠 전부터 굉장히 분주했다. 수십 대의 수레가 들락거리며 상선으로 위장한 거대한 범선으로 실어 날랐고, 기사들과 종자들, 마구간이며 대장간, 주방, 어디 하나 바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가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나디아뿐인 듯했다.

에드윈 역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만치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지만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저녁 연회에는 참석할 예정이었다. 완성한 손수건은 그때 건네주면 되겠지.

나디아는 천 귀퉁이의 올이 풀린 곳을 멍하니 매만지며 알 수 없는 감상에 젖었다. 슬픈 듯, 두려운 듯…. 한 가지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걱정거리가 찾아왔다.

마치 그녀의 앞으로의 인생에 준비된 것은 걱정거리와 불안 그리고 더 큰 걱정거리와 더 큰 불안만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아른거렸다. 나디아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출정을 앞두고 불길한 생각만 하면 안 된다.

“마님.”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이 깊어지던 생각에서 끌려 나온 나디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 선 밀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뒤로 고개를 삐죽이 내민 하녀들도 꾸벅 인사를 했다.

“놀라게 해 드렸군요. 죄송해요, 마님.”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온 밀라의 시선이 나디아가 만지작거리던 손수건 위에 머물렀다. 그녀가 눈가를 접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영주님께 드리려고 만드셨나 봐요.”

나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앉은 그녀의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밀라가 손뼉을 치며 밝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곧 연회 시간인데 치장을 도와 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녀는 이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괜히 마음이 초조해진 나디아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치장을 했다.

평소 입던 것과 다르게 가슴이 깊게 파인 연한 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을 진주가 매달린 얇은 은사슬과 함께 여러 갈래로 땋아 틀어 올린 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작은 왕관을 썼다.

그녀가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는 사이에 하녀들이 쇄골과 팔 위로 반짝거리는 진주 가루를 얇게 발랐다. 살결이 생기 있게 반짝거리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나디아는 마지막으로 목덜미에 향수를 뿌리고 어깨 위로 흰색 망토를 둘렀다.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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